조기현 | 작가
청년은 돌봄으로 생애를 전망할 수 있을까?
요즘 자주 곱씹게 되는 질문이다. 당장에 긍정적인 답을 찾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사회에 진입하는 데 손해가 되고, 경력을 단절시키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 질문을 나누고 싶은 이유는 두가지다. 언젠가 돌봄을 하게 될 청년들의 생애 전망을 통해 미래에는 지금보다 더 나은 돌봄 사회가 될 수 있을지 가늠해보고 싶다. 그와 함께 돌봄을 하는 것이 ‘정상’적 생애주기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니라, 생애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을 듯하다.
팬데믹 이후 우리는 공동체에서 돌봄이 얼마나 필수적인지 깨달았지만, 여전히 돌봄은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어떤 것이다. 내가 지금 바로 돌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부담감이 먼저 밀려오는 게 사실이다. 당장에 포기해야 할 것들이 떠오르고, 익숙하지 않은 돌봄 상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적지 않다. 만약 지금보다 돌봄에 대한 국가책임이 강화돼 돌봄 서비스가 늘어난다면 돌봄은 덜 부담스러운 것이 될까?
내가 하기 부담스러워서 다른 이가 돌봐주길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돌봄은 폭탄 돌리기에 지나지 않는다. 돌봄이 폭탄 돌리기 신세를 벗어나야만 돌봄의 가치도 올라갈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돌봄 하는 것을 넘어, 기꺼이 돌봄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는 없을까? 모두에게 돌봄 할 권리가 보장될 수는 없을까? 결국 누구나 잘 돌봄을 받기 위해서는 모두가 일정 정도 돌봄을 부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청년이 돌봄으로 생애를 전망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에 누군가에게 돌봄을 제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애주기에서 긍정적으로 여겨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돌봄이 저평가돼왔던 근본적인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청년’과 ‘돌봄’ 가치의 위계 문제다.
흔히 청년기는 ‘생산’적인 시기로 여겨진다. 생산성을 담보하기에 미래를 위해 ‘투자’해서 ‘인재’로 길러낼 대상인 셈이다.
그와 반대로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비생산적이라고 여겨진다. 그렇다면 청년에게 돌봄은 ‘생산가능인구’가 생산을 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나 다름없다. 청년도, 국가도 돌봄을 무시하는 편이 마땅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온전히 클 수 없었고, 일하게 될 수도 없었다. 우리 삶을 가능하게 한 건 언제나 돌봄이었다. 그럼에도 돌봄은 경제적 생산보다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위계 자체가 돌봄을 저평가해온 핵심 중 하나다.
낸시 프레이저는 자본주의 초기부터 경제적 생산은 사회적 재생산에 의존해왔음에도 이를 성별 분업에 기대어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생산은 재생산에 기대고 있으므로 계속해서 재생산을 무시하면 생산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그런 위기의 순간마다 생산과 돌봄의 관계를 재설정하며 유지돼왔다. 프레이저는 재설정 과정을 ‘범주투쟁’이라고 불렀다. 어쩌면 청년과 돌봄을 논의하는 건 세계의 중심을 생산에서 돌봄으로 옮기려는 범주투쟁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지금 청년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도 제한적이고, 경제적인 자립도 쉽지 않다. 노동을 중심으로 생애를 전망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벅차다. 그럼에도 노동 중심적 생애에서 돌봄 중심적 생애로 전환할 수 있을까? 일상에서 여성 동료들이 생애에서 친밀성을 추구하지 않는 이유로 성별 분업이 자주 얘기된다.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며느리 노릇, 간병 등 여성이라는 이유로 떠안으며 노동 생애를 위협받게 된다. 한 연구에서는 청년의 생애에서 성별 분업을 강화하는 기제 중 하나가 부모의 자원에 의존하는지 여부라고 꼽았다. 돌봄으로 생애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성평등이 중요하고, 그를 위해 소득 보장도 필수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