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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죽음 이전에 삶이 있었다…‘발굴’을 넘어 ‘관계’로 [조기현의 ‘몫’]

등록 2022-09-04 18:02수정 2022-09-05 02:37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조기현 | 작가 

며칠 전, 한국사회보장정보원을 다녀왔다. ‘가족돌봄 청년의 현황과 과제’ 세미나에 강사로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보건복지부 산하 사회보장정보원은 보건복지 서비스를 시민들에게 잘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한다. 잘 보이지 않는 돌봄 청년들의 고통을 행정데이터 속에서 찾으려는 첫걸음이 이번 세미나인 셈이다.

사회보장정보원이 입주한 서울 광진구 보건복지행정타운 내부는 거대했다. 그 거대함에 어떤 힘이 느껴지기도 했다. 거대한 데이터를 통해 보이지 않는 고통을 찾아내려는 정부의 의지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럼 힘은 국가가 잘 보살펴줄 것만 같은 안온함을 주는 동시에, 이 거대함이 미세한 고통까지 포착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한다. 그 의문에 마땅한 답을 찾는 과정에 나도 기여하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강의에서는 돌봄 청년으로서 내가 겪은 일에서부터 그동안 만났던 돌봄 청(소)년들이 겪는 문제들까지 짚어갔다. 예상치 못한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에서 탈락하거나 돌봄서비스를 받지 못한 사례, 돌봄에 관해 알려주거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함께 논의할 어른이 없거나, 또래들 사이에서 고립된 사례 등을 나눴다. 강의하는 내내 직원들은 같이 탄식하고 안타까워하며 집중에 집중을 더해갔다.

강의를 마치고 직원들과 나눈 대화에서는 다양한 발굴 아이디어가 오갔다. 돌봄 청년, 자립준비청년, 고독사 지원과 관련한 정보원의 역할을 들을 수 있었고, ‘시나리오 접근법’을 활용해 데이터로 발굴 가능하겠다는 희망을 나누기도 했다. 발굴보다 발굴 이후 서비스 연계가 더 중요하다는 데 뜻이 모아지기도 했다. 같은 뜻을 품는 건 희망이 선명해진다는 말이기도 하다. 계속 노력하면 세상이 조금 더 나은 방향을 찾아나갈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된다.

하지만 최근 마주한 소식들은 내가 품었던 희망과 기대가 얼마나 어설픈 것인지 말해준다. 최근 광주에서는 자립준비청년 2명이 삶의 막막함을 호소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했고, 경기 수원에서는 세 모녀가 가난과 질병에 쫓기다가 세상을 떴다. 죽음 이후 정부는 자립준비청년을 ‘부모 심정’으로 돌보겠다고 나섰고, 위기가구 선별 정보를 현 34종에서 39종으로 늘리겠다는 대책을 내놓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견디고 있을 누군가에게 한시라도 빨리 가닿기를 바란다. 하지만 죽지만 않게 해주는 정도의 대책이라는 인상을 버릴 수 없다.

죽음으로 세상에 알려진 고통이지만, 죽음 이전에 삶이 있었다. 죽지만 않게 하는 것을 넘어, 삶의 고통을 없애고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할 수는 없을까? 우선 자립준비청년 지원을 확대하고,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를 선정할 때 빡빡한 기준을 완화해야 한다. 발굴하더라도 기존의 복지서비스 중에서 받을 수 있는 게 없다면 발굴은 무의미하다. 동시에 거대한 데이터 속 발굴뿐 아니라, 작은 일상 속에서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래디컬 헬프>의 저자 힐러리 코텀은 돌봄과 복지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20세기에 구상된 복지는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이제 복지는 위기 관리가 아닌 사람들이 삶의 가능성을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조건은 ‘관계’다.

복지서비스 제공을 넘어, 모두가 넓고 다양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당사자가 관계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얻고, 삶의 의미를 곱씹으며 생애 전망을 계획할 수 있다. 위기가구 선별로 파악되지 않는 고통을 누군가 곁에서 발견해줄 수도 있다.

코텀이 제안한 새로운 복지는 우리가 직접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하게 한다. 누군가 위기 속에서 더 나은 삶을 상상할 수 있으려면 정책의 변화와 함께 우리의 삶도 변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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