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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기현의 ‘몫’] 죽이고 죽지 않기 위한 평등

등록 2022-07-03 17:52수정 2022-07-04 02:36

돌봄은 오랫동안 가정의 일이었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부담도 온전히 가족의 책임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돌봄의 많은 부분이 사회로 옮겨지고 점차 돌봄 서비스가 정립되는 중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돌봄은 국가의 개입 확대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림은 에드바르 뭉크 <병든 아이>(1907).
돌봄은 오랫동안 가정의 일이었고, 여기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부담도 온전히 가족의 책임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돌봄의 많은 부분이 사회로 옮겨지고 점차 돌봄 서비스가 정립되는 중이다. 그런데 제대로 된 돌봄은 국가의 개입 확대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림은 에드바르 뭉크 <병든 아이>(1907).

조기현 | 작가

돌봄에서 살인으로 번지는 일이 끊이지 않는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죽인 소식, 돌봄을 하던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식, 그 두가지가 동시에 벌어진 소식이 반복해서 들려온다. 아픈 부모나 배우자를 죽이는 간병살인도 계속된다.

그런 소식에 나는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지난날 나를 짓눌렀던 가난과 돌봄의 무게를 떠올리며 극단적 선택 말고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 몰입했다. 마음을 쏟던 소식들이 끊이지 않고 들리니 어느새 변하지 않는 국가에 혀를 끌끌 차며 다시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오죽했으면 그랬겠냐” 돌봄에서 살인으로 번진 사건을 두고 세간에서 많이 보이는 반응이다. 많은 이들이 혼자서 돌봄을 하다 살인을 택한 이에게 동정을 표한다. 가족을 죽인 비정한 살인자라고 질타하던 지난날과는 달라진 분위기다. 더 이상 돌봄이 가족 책임일 수 없으며 한시라도 빨리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돌봄 하는 이가 그럴 수밖에 없던 상황을 헤아리는 마음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죽어야 했던 돌봄 받는 이의 존재를 잊게 한다. 돌봄에 지친 가족에게 죽임을 당할 공포를 일상적으로 느끼는 이의 마음은 어떨까. ‘가해자’에게 동질감을 느꼈던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주저앉는다.

‘가해자’의 자리에 있는 마음도, ‘피해자’의 자리에 있는 마음도 같은 해결책을 지향할 수는 있다. 국가가 더 많은 책임을 느끼고 돌봄 서비스를 확충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가해자’의 자리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취약한 이가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전제를 강화시킨다. 그런 전제는 돌봄을 제공과 수혜라는 이분법으로만 보게 만든다.

수혜와 제공의 이분법은 우리가 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돌봄에 의존하며 살아왔다는 걸 느끼지 못하게 한다. 우리 모두 돌봄 수혜자임에도 돌봄을 삶의 예외적인 것으로 두거나, 돌봄 제공자의 관점에서만 돌봄을 상상하게 한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돌봄에서 살인으로 번진 사건을 평등의 관점에서 되짚을 수 있어야 한다.

책 <정동적 평등>은 돌봄 제공자가 처하는 불평등과 돌봄 수혜자가 처하는 불평등을 함께 보려고 시도한다. 평등·불평등이 발생하는 영역은 네가지다. 우리에게 익숙한 경제, 정치, 사회문화와 더불어 정동의 영역도 함께 봐야 한다. 네 영역은 서로가 얽히고설키면서 (불)평등을 강화하거나 약화시킨다.

여기서 정동은 사랑, 돌봄, 연대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서로가 대체 불가능한 보살핌을 주고받는 관계를, 돌봄은 이웃이나 동료 간 도움이나 돌봄 서비스로 제공되는 관계를, 연대는 국가나 지자체의 제도와 시민사회의 활동 등으로 권리를 보장하거나 대표해주는 관계를 의미한다. ‘정동적 평등’이란 대체 불가능한 사랑, 공동체에서 주고받는 돌봄, 권리를 보장하는 연대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고르게 주어진 상태를 말한다.

서로가 잘 돌봄 받고 잘 돌보는 것은 단지 국가의 책임만으로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국가에 의해 제공되는 돌봄 서비스는 정동적 평등을 위한 관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선 자리에서부터 누군가와 사랑, 돌봄, 연대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돌봄이 어렵다면 그건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우리의 일이다.

<정동적 평등>의 저자들은 돌봄을 받는 이와 하는 이뿐 아니라, 그 돌봄에 관계된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까지 함께 들으려고 했다. 자신들의 방법을 ‘돌봄 대화’라고 칭했다. 사랑, 돌봄, 연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말을 못 하고, 죽인 자는 말이 없다. 살아 있는 우리가 동정을 넘어 돌봄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모두의 정동적 평등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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