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화가 오토 딕스의 동판화 시리즈 ‘전쟁’ 중 <제12도. 독가스를 사용해 전진하는 돌격대>. 필자 제공
서경식
코로나 참화는 2년을 넘긴 지금까지 종식될 기미가 없다. 그런 가운데 언제까지고 꼼짝 않고 있을 수도 없어서 조금씩 외출을 하고, 강연 의뢰 등이 있으면 수락하고 있다. 인천 디아스포라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5월에는 한국에 가서 벗, 지인들과도 오랜만에 재회할 예정이다. 나가사키 원폭기념일(8월9일, 히로시마는 8월6일)을 전후해서 나가사키시에서 벗인 화가 마스다 조토쿠씨가 개인전을 여는 것에 맞춰 나도 현지에서 강연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얘기할지, 생각하면 할수록 어렵다. 정년퇴직으로 환경이 바뀌고 나 자신이 나이를 먹은 탓도 있겠지만, 그것 이상으로 지금의 세계 상황이 내 마음을 틀어막고 입을 무겁게 만들기 때문이다.
지난번 칼럼(2월19일 집필)을 쓴 직후에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 2개월이 지난 지금 남부의 요충지 마리우폴이 격렬한 공격을 받고 있어 며칠 안에 함락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투항하지 않으면 전멸시키겠다”고 러시아 쪽은 밝혔다.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고 생화학무기와 핵무기 사용마저 현실감을 띠고 있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전쟁이 바로 지금 계속되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이 전투를 중단시킬 방책을 누구도 갖고 있지 않다. 전투는 장기화하고 수렁에 빠져 무참한 희생이 이후로도 되풀이될 것이다.
나는 1951년에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조선(한국)전쟁을 직접 경험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이어지고 있는 사태를 흡사 조선전쟁의 재현인 것처럼 느끼고 있다. 젊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몸에 와닿는 것을 느낀다. 조선전쟁으로 조선민족 모두의 심신에 새겨진 상처가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지를 지금 새삼스레 생각한다. 우크라이나 사태에 연동된 조선반도 핵위기는 이런 치유될 수 없는 트라우마의 경련과 같은 발병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난번 칼럼에 ‘
이상 없는 시대에 온전한 정신으로’라는 제목을 붙였다. 나 자신은 아직 ‘제정신’을 차리고 있을 작정이지만 세계의 대세는 그것을 잃는 쪽으로 급속히 흘러가고 있다. ‘이상 없는 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생각해보면 훨씬 이전부터 그랬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파시즘 진영이 패배하고 냉전이 일단 종결된 뒤, 세계는 평화를 향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마침내 맞이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짧은 시기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끝나지 않은 냉전이 순식간에 열전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실황중계하듯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목격하고 있다.
‘극히 짧은 기간’이라고 썼으나, 실은 그것도 구미나 일본 등 극히 한정된 지역에서나 그랬다. 그 기간에도 아프리카·중동·중남미 등 제3세계에서는 파괴와 살육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번 우크라이나의 몇배나 되는 피와 눈물을 흘렸다. 말할 것도 없이 구미도 그 가해자 쪽 멤버다. 세계가 거기에 충분히 관심을 쏟아왔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 유럽을 직접 말려들게 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자 비로소 세계를 자신의 일로 얘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인생 70년을 지나 자신이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최대의 시련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느낀다. 이 시련의 핵심은 지금이 ‘이상이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이상을 찾아내지 못한 채 시련을 견디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푸틴의 러시아가 ‘악’이라는 데에는 논의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와 그 배후에 있는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가 ‘선’이라고도 할 수 없다. 구미 국가들(일본 포함)도 중남미나 아프리카에서 미국의 패권이나 글로벌 금융자본의 이익 확대를 위해 정의에 반하는 힘을 행사해왔기(그리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칠레, 최근의 이라크 또는 베네수엘라만 보더라도 그것은 분명하다.
내가 이해하는 한, 지금의 세계는 예전에는 ‘민주주의’ ‘인권’ ‘피억압민족 해방’이라는 보편적 이상의 기치 아래 ‘파시즘’ ‘나치즘’ ‘천황제 군국주의’라는 쉽게 눈에 띄는 ‘악’과 싸운 결과 다다른 도달점으로 여겨져왔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곤란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해도 많은 사람들이 ‘이상’을 공유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통과점이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잠깐 동안의 평화시기는 지나가버렸는가. 우리는 이 커다란 전환점에 서서 어떤 각오를 해야 할까.
서두에 소개한 마스다 조토쿠씨는 일본의 서양화계에서는 소수의, 무거운 사회적 테마를 다뤄온 화가다. 근년의 대표작으로, 동일본 대지진의 쓰나미(지진해일) 피해를 상기시키는 <적광>, 후쿠시마 원전사고 뒤의 방사능 피해를 테마로 한 <판도라의 상자> 등이 있다. 모두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대작이다. 일본에서 이런 작품을 만날 기회는 드물다. 일본 서양화계의 다수파는 메이지 이래의 외광파(인상파의 일본적 변종)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밝고 장식적인 화풍이다. 무겁고 어두운 테마는 경원당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스다의 작품은 그런 다수파와는 다르다.
그의 작품에는 흔히 방독 마스크를 쓴 인물상이 등장한다. 가스 마스크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가 무기로 많이 쓰이면서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에서 묘사되고, 독일 화가 오토 딕스의 동판화 시리즈 ‘전쟁’(사진)에 등장했다. 즉, 그것은 20세기와 함께 시작된 대량살육전쟁을 상징하는 이콘(Ikon)이었다. 그 이후 대략 100년이 지났으나 가스 마스크는 아직도 퇴장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우크라이나에서까지 그것을 볼지도 모른다는 악몽에 직면해 있다. 마스다씨가 그리는 가스 마스크 인물은 “일찍이 이런 시대가 있었다”는 증언이기도 한데, 그 시대는 아직 계속되면서 끝날 것 같지 않다.
앞서 얘기했듯이 이번 여름에 나는 나가사키시의 기리시탄(16세기에 일본에 들어온 가톨릭과 그 신자들) 탄압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26성인 기념관’에서 강연할 예정이다. 내가 무엇을 얘기할 수 있을까. 기리시탄 탄압, 원폭 참화, 군함도 등에서의 가혹한 강제노동… 그런 기억들이 겹쳐져 있는 나가사키는 특별한 땅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먹구름 아래서는 더욱 그렇다.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과 잔혹한 역사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질까. 언제 종말을 고할까. 애초에 그것이 ‘끝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내게 좀 더 ‘밝은 희망’을 얘기하라고 권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정직하게 아픈 진실과 어두운 생각을 얘기하고 싶다. 그것이 우리가 ‘제정신’을 차리기 위한 깊은 성찰의 기회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도쿄경제대 명예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