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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경식 칼럼] 이상 없는 시대에 온전한 정신으로

등록 2022-02-24 15:29수정 2022-02-25 10:10

전쟁이 터지면 순식간에 몇만명의 사람이 죽고 다칠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 끝없는 내전상태가 시작될 것이다. 그 몇만명, 몇십만명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떤 ‘이상’을 위해 희생당하게 되는 것인가. 그 희생을 설명할 이상(대의)은 찾기 어렵다. 있는 것은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천박하고 야비한 구호뿐이다.

서경식 | 도쿄경제대 명예교수, 번역 한승동(독서인)

오늘은 2022년 2월19일이다. 어제 나는 만 71살이 됐다. 멘탈 관련 병으로 고생한 아내가 점차 회복 조짐을 보이기 시작해, 내 생일 축하를 겸해 함께 마쓰모토시로 짧은 여행을 갔다. 마쓰모토는 나가노현 중부 아즈미노라는 지역에 있는데, 표고 2000미터급의 산들로 에워싸인 중소도시다. 시내 곳곳에 맑고 찬 물이 샘솟는 우물들이 있어서 시민들은 마음대로 그 물을 맛볼 수 있다. 아내는 초등학생처럼 기뻐하며 우물로 달려가 갖고 다니던 빈 병에 물을 담았다. 길가의 오래된 양과자점에서 잠시 쉬며 달콤한 과자와 커피를 즐겼다. 80살이 넘어 보이는 늙은 주인이 지금도 현역으로 과자 만들기에 힘을 쏟고 있었다. 가게 벽에 재미있는 그림이 걸려 있는 걸 본 아내가 물어보자, 그 지역에서는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라고 한다. 참으로 마쓰모토다워 마음에 든다. 지금은 코로나 재난 탓도 있어서 행인이 많지 않다. 안온한 휴일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은 평온하지 못하고 시름에 잠겼다. 그 시름이 아내에게도 감염된 듯한 긴장을 느꼈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국경에 결집하고 있다. 세계는 전쟁 위기의 벼랑 끝에 있다. 이런 시대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나는 ‘이상 없는 시대’라 부르기로 했다.

노벨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세컨드핸드 타임>이라는 작품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탁월한 제목이다. 이 경우의 ‘세컨드핸드’란 ‘이념’의 중고품이라는 의미다. 소련이라는 실험이 좌절하고 사회주의 이념도 무너졌다. 고르바초프의 개혁도 신자유주의가 날뛰고 설치게 만들어 빈부격차는 극대화하고 민족 간 분쟁도 재연됐다. 옛 소련을 구성했던 나라들 다수에 권위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긴장도 결국 소련 붕괴로 야기된 사태다. ‘유토피아의 폐허’다.

그 폐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게다가 2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 재난이 우리를 계속 위협하고, 한편에서는 아이티(IT·정보통신기술)나 제약 관련 기업들이 전례없는 이윤을 얻고 있다. 이상을 내세울 뜻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냉소받는 시대, 힘과 돈만을 진실로 여기는 시대, 따라서 필연적으로 국가주의가 횡행하고 지켜야 할 이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 국가주의를 앞장서서 추종하는 시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그런 시대다.

과거부터 일관되게 모든 싸움의 배경에는 패권국가의 정복욕, 지배자의 권력욕, 그리고 권력에 빌붙어 막대한 이익을 탐하는 자들의 물욕이 있었다. 오히려 그런 ‘욕망’이야말로 싸움의 진짜 동기였다. 다만 어느 시기까지는 그런 욕망과 함께 늘 ‘이상’(대의)을 얘기했다. 계급해방, 민족해방, 평등과 자유 등이다. 그런 것들이 욕망이라는 진상을 덮어 감추는 이데올로기적 원칙이라는 측면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런 이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많은 사람들이 존재했다. 예컨대 명저 <기묘한 패배>로 알려진 프랑스의 역사가 마르크 블로크는 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 투쟁에 참여했다가 독일군에게 총살당했다. 그가 목숨을 바친 것은 ‘프랑스라는 국가’가 아니라 그 국가에 체현돼 있다고 본 ‘자유 평등 우애’의 이상이었다.

1951년에 태어난 내 인생의 시간 중에도 알제리 전쟁, 베트남 전쟁, 쿠바 혁명, 남아프리카의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 등이 있었다. 그런 싸움들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은 싸움을 관통하고 있는 ‘욕망’의 원리에 무지했던 바보들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욕망의 추악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종종 자신들이 그 욕망에 의해 부조리한 희생을 강요당하면서도, ‘이상’ 편에 계속 서는 쪽을 택한 것이다. 설사 그 사람들이 국가권력이나 탐욕스러운 자본에 기만당하고 이용당했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가슴에 품었던 이상 자체가 허망했던 것은 아니다. 만일 그것조차 포기해버렸다면 남는 것은 적나라한 욕망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사회는 지침을 잃고 영원히 표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세계에서는 어떤 ‘이상’을 얘기하고 있을까? 우크라이나에서 일단 전쟁이 터지면 순식간에 몇만명의 사람이 죽고 다칠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 끝없는 내전상태가 시작될 것이다. 그 몇만명, 몇십만명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어떤 ‘이상’을 위해 희생당하게 되는 것인가. 러시아 쪽이든 우크라이나 쪽이든 그 희생을 설명할 이상(대의)은 찾기 어렵다. 있는 것은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천박하고 야비한 구호뿐이다.

양과자점을 나오니 바깥 공기는 영하의 추위였지만 하늘은 맑게 개어 있어서 주위의 봉우리들이 눈을 이고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20년쯤 전에 북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눈을 이고 있던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멀리서 바라본 순간을 떠올렸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생가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그 삼엄하고 청정한 산악지대에서 레비는 독일에 대한 레지스탕스 활동을 벌이다 체포당했다.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아 토리노로 귀환한 그는 파괴당한 인간성의 재건이라는 ‘이상’을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다. 해방된 지 약 40년 뒤 레비는 토리노의 생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생명을 빼앗은 것은 나치의 수용소가 아니라 건망증이 심하고 무관심한 바깥세상(外界)의 일상이었다.

토리노에서 보이는 알프스를 예전에 나는 ‘이상의 빛으로 빛나는 흰 봉우리들’이라 불렀다. 얼핏 보면 평화 그 자체인 마쓰모토에서 아즈미노의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이상의 빛’은 이미 영원히 사라진 것인가.

역사상 ‘이상’은 종종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제목에 지나지 않았다. 괴롭지만 그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상 따위는 애초에 모두 허망하다고 단정하고 냉소주의에 투철한 것은 결코 평화나 행복에 다가가는 길이 아니다. ‘이상 없는 시대’에 끝까지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럼에도 좌절의 고통을 참고 새기며 상처받은 이상을 회복하고 재건하기 위해 온전한 정신을 지켜가는 수밖에 없다.

한국의 대통령 선거가 목전에 다다랐다. 나도 도쿄에서 투표를 할 작정이다. 국내외 동포들에게 감히 호소하고 싶다. 투표할 때 저 암흑의 유신독재 시대부터 5·18, 6월 민주항쟁을 거쳐 촛불시위에 이르기까지 힘든 투쟁의 시대의 눈물과 환희를 상기하자. 우리를 늘 고무했던 자랑스러운 ‘이상’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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