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현 | 작가
언론과 에스엔에스(SNS)에 연일 2030 표심을 분석하는 글이 쏟아졌다. 특히 2030 여성의 표심은 ‘젠더 갈라치기’로 여성을 배제한 국민의힘의 선거 전략이 실패했음을 알렸다. 한편 나는 이재명 후보에게 투표한 58%의 20대 여성만큼이나 윤석열 후보에게 투표한 33.8%의 20대 여성에게도 관심이 간다. 33.8% 중에 내 동생이 있기 때문이다.
동생은 백신 패스 기간에 이번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했다. 백신을 맞지 않았기에 백신 패스 기간 내내 고립됐다. 애초에 국민의힘을 지지한 적 없었지만, 정권을 교체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사표를 만들기보다 ‘저쪽’이 되지 않길 바라며 투표했다. 선거 결과가 나온 후, 동생은 또래 여성 친구들에게 ‘원하는 대로 되니까 좋냐’는 비아냥거림을 받았다. 대놓고 여성을 배제한 후보를 여성이 찍었다는 데 친구들은 분노했다.
거기에 동생은 2월부로 계약 종료라는 이름의 실직을 했다. 곧 서른이 코앞인데 삶은 점점 더 불안해지기만 했다. 선거 기간 내내 나온 국민의힘의 ‘젠더 갈라치기’를 생각하면 앞으로 동생의 삶이 더 힘들어질 것만 같다. 동생의 선택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가 끊기고 불안정 노동을 견디는 고졸 여성인 동생의 삶에 어떤 정치가 필요한지 깊이 고민하게 된다.
우선 ‘공정’을 외치는 정치는 아닌 것 같다. 지금의 ‘공정’은 내가 피해자라고 느끼거나, 내가 약자가 되어선 안 된다고 느끼게 한다. 그런 느낌은 서로 돌보지 않는 심성을 자라나게 하면서, 어떤 허구를 강화한다. 바로 내가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허구다. 하지만 우리는 의존 없이 자립할 수 없고, 능력을 발휘할 수도 없다. 그래서 공정과 짝을 이루는 ‘능력주의’는 우리가 상호의존적이라는 진실을 은폐한다. 우리의 상호의존성을 바탕으로 한 정치가 필요하다.
‘공정’ 대신 ‘불평등’을 말하면 어떨까? 사람이 의존해야 하는 여러 자원을 분배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지금 ‘공정’은 ‘불평등’으로 쉽게 대체되지는 않을 듯하다. 공정이 주관적인 언어인 데 반해 불평등은 객관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런 차이를 좁히는 데 참조해볼 만한 책이 있다. 더블린대학교 평등학 교수 캐슬린 린치가 동료들과 함께 쓴 <정동적 평등>이 그것이다.
저자들은 불평등이 발생하는 영역을 네 가지로 구분한다. 경제체계, 정치체계, 사회문화체계, 그리고 정동체계다. 앞의 세 가지 영역은 우리가 익히 불평등을 이야기해온 영역인데 정동체계는 낯설다. 정동체계는 사랑, 돌봄, 연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동적 평등’이란 사랑하고 돌보며 연대하는 삶이 모두에게 고르게 주어지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공정’을 지지하는 이들의 근저에 ‘정동적 불평등’이 자리한 것은 아닐까? 저소득의 고졸 여성인 내 동생의 삶은 말할 것도 없다. 정동적 (불)평등은 주관적 체험을 경제, 정치, 사회문화적 (불)평등인 객관적 조건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더불어 관점 자체가 상호의존성이라는 진실에 기반한다. ‘공정’이 아닌 ‘정동적 평등’을 위한 정치는 불가능할까?
지방선거가 79일 남았다. 지방선거에서만큼은 그런 정치의 가능성을 보고 싶다. 우리 삶에 가장 가까운 정치이기 때문이다. 올해 초부터 지방선거에 출마한다는 몇몇 이들의 소식을 들었다. 청년들의 떨어진 ‘활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던 청년 활동가, 자신이 출마한 곳을 ‘외로움’ 없는 동네로 만들겠다는 진보 정당인, 모두가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마을을 목표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마을기업가까지. 이번 지방선거는 우리가 서로 의존한다는 진실을 무시하지 않는 정치가 가까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