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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기현의 ‘몫’] ‘가족 보호자’라는 자리

등록 2021-11-15 04:59수정 2022-02-13 10:34

전화가 걸려온다. 누군가 쓰러졌으니 병원으로 오라는 연락이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환자의 상태를 듣고 중대한 결정을 내리거나, 입원 수속 등 필요한 행정 업무를 맡는다. 환자가 중환자실에 있으면 다시 위독해졌다는 연락을 받을까 전전긍긍하고, 일반병실에 있을 때는 직접 간병을 하거나 간병인을 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돈을 마련해야 한다. 수중에 돈이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여기저기 돈 빌리는 전화를 돌린다. 복지 정보를 찾아보고 구청과 주민센터를 들락거린다. 그마저도 안 되면 대출을 알아보거나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본다. 그렇게 ‘가족 보호자’가 된다.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진 가족의 보호자로 불려가는 이도 있고, 아무런 경제력도 없이 보호자가 되어 병원비를 마련해야 하는 이도 있다. 아픈 이에게 마음을 계속 쓰며 주변에는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다 보면 일상은 금세 무너져 내린다. 어느 가족 보호자는 쓰러진 가족뿐 아니라 자신도 ‘사고’를 당한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지난 11월10일, 뇌출혈로 쓰러진 아버지를 굶겨 사망하게 한 강도영(가명)의 2심 재판이 있었다. 재판부는 원심의 존속살해 징역 4년 판결을 유지했다. 2심 판결문의 몇몇 문구는 ‘가족 보호자’의 자리를 곱씹어보게 한다. 판결문에 “삼촌이 생계 지원과 장애 지원 등을 받으라며 관련 절차를 알려주었지만, 기본적으로 게으른 성격이라 주민센터 등을 방문하거나 지원받기 위한 노력을 한 적”이 없으며,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기간 동안 직접 “간병한 적이 없었는데 피고인은 피해자가 퇴원하여 자신이 직접 피해자를 간병할 상황에 놓이게 되자마자 이 사건 범행을 계획”했다는 내용이 언급돼 있기 때문이다.

이제껏 우리는 가족 중 누군가 아프면 힘들어도 당연하게 ‘가족 보호자’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여겼다. 선택의 여지도 없었고,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강도영도 그랬을 듯하다. ‘가족 보호자’ 역할을 외면해서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꾸역꾸역 해내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이유로 혼자서 모든 걸 다 감당해야 하는 걸까? 누군가 쓰러졌을 때 ‘가족 보호자’에게 책임을 떠맡기는 것과 ‘복지 신청주의’ 사이의 공백이 만들어낸 비극이 강도영이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판결문 속에서는 공백을 적극적으로 메우지 않은 ‘가족 보호자’의 ‘게으름’은 죄가 되어 있다. 직접 간병하기 이전에 ‘가족 보호자’로 홀로 짊어졌을 무게는 세상에 없는 셈 쳐버린다.

한 개인에게 위기가 닥친 그 순간부터 사회와 국가가 함께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가구 규모가 축소되고, 불안정한 일자리가 증가하고, 청년들의 진로 이행 시기가 늦춰지는 건 ‘가족 보호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듦을 말해준다. 무엇보다 병원이 ‘가족 보호자’를 호출하는 것에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 의료법에 빈번하게 ‘보호자’가 등장하지만, 그에 따른 자격이나 범위에 대한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족 보호자’가 계속 유지돼왔던 이유는 ‘보호’가 ‘가족의 의무’라는 통념과 사회와 국가가 공백을 내버려둔 탓이다.

환자가 혼자 치료받을 수 있는데, 병원에서 가족 보호자를 대동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두고 환자의 자기결정권 침해라는 견해가 있다. 보통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치료 의사에 국한해서 생각했지만, 좀 더 넓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족 보호자’가 모든 걸 다 떠맡는 상황을 아픈 이가 원치 않는다면, 그것도 환자의 자기결정권 침해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아픈 이와 보호하는 이 모두 안전할 수 있는 사회를 위해 ‘가족 보호자’의 자리를 재고해보자. 어쩌면 그곳이 사회와 국가가 시작되어야 하는 출발선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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