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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돌봄 경험으로 연결된 청년들

등록 2021-10-18 05:00수정 2021-10-18 20:39

[조기현의 ‘몫’] 조기현ㅣ작가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의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2년 전에 시도했다가 사람이 모이지 않아서 무산된 모임이었다. 이제야 함께할 사람들이 모여서 제대로 하고 있다. 모임 구성원은 총 6명으로 10대 시절이나 30대 초반부터 돌봄을 했거나 여전히 하고 있는 당사자들이다. 몇번의 모임을 더 진행한 후에 지금까지 나눴던 경험을 기반으로 돌봄 당사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를 함께 기획할 동료들이기도 하다. 그동안 돌봄 경험을 시로 쓰기도 했고, ‘커뮤니티 케어’ 정책에 대해 토론을 하기도 했다. 돌봄을 하며 느낀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었고, 돌봄이 끝난 이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들어볼 수 있었다.

모임을 진행하는 동안, 한 동료는 직업 훈련을 마치고 첫 출근을 했다. 그가 첫 출근을 하던 날 그의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장기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직장에 적응하는 데 온 신경을 쏟아도 모자랄 판이었지만, 그의 신경은 줄곧 아버지의 상태가 회복되길 바랐다. 차라리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아버지가 아팠다면 어땠을까.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운명의 장난’은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에게 자주 벌어지는 일이었다. 진로 이행과 가족 돌봄, 생계 부양이라는 삼중 과제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청년들이 모이니 ‘운명의 장난’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다. 일상에 닥친 돌봄 위기가 얼마나 다양한 계기로 나타나는지 각자의 삶이 증명하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됐다. 서로가 서로의 언어에 포개져 서로의 상황을 드러내줬다. 지난날 내가 아픈 가족을 돌보는 청년들을 만나서 나누고 싶었던 감각을 실제로 교감할 수 있었다.

다른 동료가 모임 도중 급히 가야 할 때도 있었다. 어머니를 맡아줄 사람이 없었다. 돌봄 상황으로 갑자기 모임이나 약속을 취소하는 일은 나도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만약 내가 돌보는 가족을 잠시 보호해줄 곳이 없다면 모임에 함께 오면 그만이었다. 구성원 모두 자신만의 돌봄 노하우를 지녔고, 질병에 대한 이해도 어느 정도 있었다. 우리는 동료의 어머니가 혹시라도 욕을 하거나 때리더라도 이해한다는 우스갯소리를 나눴다. 서로 차근차근 쌓아온 신뢰 위에서 이런 농담을 주고받으니 괜히 설렜다. 어쩌면 이 모임이 ‘집 밖 활동’과 ‘집 안 돌봄’의 대립을 해소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돌보는 가족에 대해 말하는 언어도 서서히 바뀌어갔다. 나는 병원에서 아버지가 어디가 아픈지 그래서 무엇을 못하는지 얘기하기 바쁘고, 공공기관에서 아버지가 얼마나 무능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지 힘주어 설명한다. 그래야 진단서를 받고, 복지를 신청할 수 있다. 모임에서는 오히려 반대의 언어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돌보는 이는 무엇을 잘하는 사람인지, 그의 존재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할 수 있었다. 어느새 서로가 돌보는 이의 장점을 자랑하는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아픈 이가 지닌 역량을 함께 발견하는 대화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생존자 발견’, 첫 모임 이후 한 동료가 남긴 소감이다. 마치 좀비 영화에서 사람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라고 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세계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모여야 안전한 세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내가 모임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바로 그런 세계의 가능성이다. 새로운 돌봄 문화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생기를 느낀다. 진로 이행, 가족 돌봄, 생계 부양이 꼬이지 않고, 집 밖 활동과 집 안 돌봄이 대립하지 않으며, 아픈 이를 무능으로만 설명하지 않는 세계의 모습이 현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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