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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기현의 ‘몫’] ‘공정’과 ‘형제 격차’

등록 2021-06-21 04:59수정 2021-06-21 15:41

조기현 작가

부모님의 이혼 이후, 여동생과 나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했‘었’다. 내가 아픈 아버지를 돌보니 나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는데, 이 규칙은 올해 1월부터 깨졌다. 동생은 월세가 밀렸고 카드빚이 불어났고 일도 구하지 못했다. 이것저것 지원 정책을 찾아봐도 요건 한두 가지가 맞지 않아 신청을 못 했다. 거기에 동생이 사는 집의 소유자는 2년 계약이 끝나자 ‘이 시국에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월세를 올리겠다고 못을 박았다.

결국 ‘혈연’에게 손 벌릴 일만 남은 듯했다. 나는 불어난 카드빚이라도 갚아줘야겠다 싶어서,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나름 큰돈을 지출했다. 하지만 정말 마지막이 될지 잘 모르겠다. 동생은 며칠 전부터 파트타임으로 물류센터에 다니며 자격증 공부에 열중하고 있지만, 이 노력이 안정적인 소득으로 이어질지 미지수다.

정치권과 언론은 연일 ‘공정’이라는 두 글자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논한다. 청년 시민들에게 몫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 기준을 정하는 논의의 장이 열린 것 같다. 가장 큰 목소리는 경쟁을 통해 실력을 입증한 사람만이 제 몫을 차지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다. 능력주의는 한 사람을 ‘독립적인 인간상’으로 전제한다. 그로 인해 자신이 가진 것은 오로지 자신의 노력 덕분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런 사고방식에는 한 사람을 존재할 수 있게 한 ‘의존’을 상상할 여지가 없다. 그 사람이 무엇에 의존해왔는지를 철저히 은폐할 뿐이다. 하지만 의존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은폐된 자리를 ‘비공식 복지’라고 부를 수 있다. 최근 책 <한국의 비공식 복지>를 펴낸 손병돈 교수는 ‘비공식 복지’를 혈연, 지연, 학연, 직장연 등 연줄망을 통해 이뤄지는 복지라고 정의했다. 비공식 복지의 종류는 ‘현금’과 ‘현물’을 주고받는 것부터 서로 돌보고 돌봄받는 ‘서비스’, 주거 공간을 공유하는 ‘동거’의 형태까지 포함된다. 대개 가족 간에 ‘당연하게’ 이뤄지는 지원이 대표적이다.

자신을 독립적인 인간이며 능력의 원천으로 상정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비공식 복지가 탄탄해야 한다. 만약 비공식 복지가 탄탄하지 않다면,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어쩔 수 없이 의존해야 하거나, 반대로 누군가의 의존을 겨우겨우 감당하며 버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탄탄하지 못한 비공식 복지 속에서 스스로 능력만 발휘하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겨를은 없다. 나처럼 아픈 부모를 돌보는 청년들이 그렇고, 가난한 형제에게라도 손 벌려야 하는 동생이 그렇다.

몇 해 전, 일본에서는 ‘형제 리스크’와 ‘형제 격차’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고령 인구 증가로 부양을 책임지는 인구가 많아진데다, 버블 이후 노동시장이 불안정해지며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중장년층도 늘어났다. 거기에 비혼이나 이혼 등으로 가족 형성을 하지 않는 경우가 늘면서 형제 부양에 대한 고민이 촉발됐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책 <나는 형제를 모른 척할 수 있을까>에서는 형제 리스크를 “자신도 여유가 없는데 다른 형제의 가난을 그대로 떠안아 공멸하는 리스크”라고 설명했다. 저자는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논의되지 않는 이유를 간단하게 요약한다. “‘내 가족’과 사회는 다른 차원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부모 부양이 리스크가 되는 것을 넘어, 격차가 생긴 형제까지 부양해야 하는 형국은 한국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각자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하면서 여전히 혈연 중심의 비공식 복지가 강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금 ‘공정’만을 외치는 것은 이런 문제를 은폐하고 더 심화시킬지 모른다. 우리는 은폐된 자리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우리 모두 의존하며 살아왔다는 진실에서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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