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란바토르 징기스칸 광장과 징기스칸 동상
[한겨레 창간 26년 특집, 떠오르는 환동해]
초원에 해양항만청을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에 몽골이 참가했을 때, 바다도 없는 나라에서 무슨 해양엑스포냐고 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나 몽골은 당당히 참가했으며, 흡스굴 호수를 ‘초원의 진주’로 소개하면서 바다로 내세웠다. 실제로 몽골인들은 큰 호수를 큰 바다로 간주한다. 동아시아의 고대적 세계관에서 옛 몽골땅인 바이칼호수는 북해(北海)였다.
초원은 기본적으로 노마드적 삶이다. 그런데 바다 역시 노마드적 삶이다. 이 항구에서 저 항구로 떠돈다. 어제의 낙타부대가 오늘의 콘테이너선일 수도 있다. 초원이 ‘녹색의 바다’라면 바다는 ‘푸르른 초원’과도 같다. 따라서 내륙국가 몽골이 항만청을 만든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산악국가 스위스가 세계2위의 해운사 MSC를 거느린 것을 주목하자. 현대상선과 한진해운을 합쳐도 세계5위권이다.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세상은 전혀 다르게 보인다. 몽골의 항만청이 좋은 예다.
물론 몽골이 해양경영에 나선 것은 거대 중국과 러시아 틈바구니에서 제3의 출구를 마련하려는 간절한 선택이다. 몽골은 ‘맹지국가’이다. 걸핏하면 중국과 러시아는 국경선의 숨통을 적당히 숨죽여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국의 이득을 취한다. 땅값계산에서 맹지는 주변부의 판단과 허락에 의존한다. 자신의 운명을 타국에게 저당잡힌 맹지국가의 선택은 결국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어 맹지에서 벗어나는 방법 밖에 없다.
몽골이 선택한 길은 두 개의 루트이다. 자민우드 등을 통한 육상루트와 북한 나진항으로 나아가는 해상루트이다. 광산자원이 있는 현지에서 철길과 도로를 내는 험한 과제가 남아있기는 하나 몽골이 선택한 두 가지 병행전략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울란바토르 남쪽으로 300여km 떨어진 철도역 아이락에는 한국인에 의해 육상에 건설되는 드라이포트(dry port)가 준비되고 있다. 그 옛날 몽골 제국통치술에서 가장 중요했던 교통로인 잠치 역시 일종의 역사적으로 보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인류 역사에서 세금만큼이나 오랜 것이 교역의 역사이고, 교역은 곧바로 물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몽골 제국은 제국 내에 20만 5천필의 말과 1만여곳 이상의 잠치를 두어 제국을 경영했다. 풍부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약소국으로 전락한 몽골이 자신들의 옛영화를 어떻게 새로운 잠치로 만회해낼 것인가. 오늘의 몽골이 처한 궁색한 처지를 보면서, 바다 없는 나라의 한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는데, 그러나 정작 삼면이 바다인 우리는 바다 알기를 우습게 안다. 너무 흔하여 바다 고마운 줄 모르다가 세월호 같은 사건도 터진 것이리라.
초원뿐 아니라 바다를 경영해본 역사
몽골의 해양진출과 해양경영은 남다른 데가 있다. 려몽연합군은 900척의 전함과 4만 군사를 이끌고 큐슈 하카다만에 상륙한다. 하지만 폭풍우 덕분에 일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다. 역사적으로 일본인이 갖고 있는 북방세력에 대한 일정한 공포심은 이러한 경험과 무관할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 각별하게 몽골은 탐라를 경영했다. 몽골이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후에 제주도에 설치한 탐라총관부에서는 목마장을 경영했다. 높고 낮은 오름과 드넓은 초원은 어쩌면 몽골초원과 흡사하다. 최영에 의해 진압될 때까지 말을 키우던 목호들은 끝까지 저항하였다. 이로써 몽골의 도서경영은 막을 내렸다.
몽골이 보르네오 정벌에 나선 일은 덜 알려져있다. 오늘날 쿠칭 등에는 몽골습래의 흔적이 남아있으며 이로부터 초기 화교촌이 형성되었다. 오늘의 보르네오 화교사회의 성립이 천년에 육박하는 오랜 장기지속의 역사적 맥락을 지니는 것이다.
유목민은 말에서 태어나 말 위에서 죽는 법이다. 거침없이 초원을 횡단하고 바람의 아들로 제국을 건설했다. 바다 사람들도 바닷바람을 받으며 거침없이 대양을 횡단하면서 제국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노마드적 삶의 공통점은 개방성이다. 세계의 수도였던 카라코롬에는 유럽인도 와있었고, 당연히 불교, 회교, 기독교 등 종교박람회장을 방불케했다.
스텝문명사 관점에서 본다면, 국경은 온전히 존재하지 않았고 매우 유동적으로 넘실댔다. 오늘은 내몽골과 몽골이 분리되었지만 본디 하나다. 중국은 내륙국 몽골을 준식민지, 혹은 작은 오랑캐 정도로 생각하면서 몽골인들에게는 무비자로 통과시킨다.
오늘의 동아시아역사는 지나칠 정도로 중화주의적이다. 어찌보면 중화와 오랑캐의 대립과 타협으로 이루어진 역사임에도 중국만 돋보인다. 대륙굴기 해양굴기에 나선 경제강국 중국의 주도권을 인정한다고 해도, 중국 이외의 ‘오랑캐들의 연대’는 또 다른 각별함이 있다. 그런 면에서 몽골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친연성을 지녀온 ‘친근한 오랑캐’이다. 물론 얼굴이 비슷하다고는 하나 농경적 삶을 살아온 우리와 유목적인 그들의 근본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한반도가 해륙국가로서 바다로 나아가 노마드적 사고로 세계로 나서고 있는 방향에서 본다면 새로운 공통점 모색이 가능해질 것이다.
몽골리안 오랑캐의 도전
오늘의 몽골이 무사히 항로를 개척하여 무진장한 자원을 나진항에 부려놓게 된다면, 한족 중심의 중화적 세계관을 뛰어넘는 몽골리안의 또 하나의 도전이 가능해질 것이다. 몽골의 초원과 환동해의 푸른 ‘초원’이 맞닿는 계기가 되리라. 같은 몽골리안으로써 몽골의 도전을 지켜보고 그네들 역사와 마주함으로써 우리는 중화중심의 세계에서 또다른 변화를 목격하게될 것 같다. 몽골의 나진항 입성을 통한 환동해권으로의 진입을 환영하는 역사적 의미가 여기에 있다. 물류이동을 통한 자원확보라는 경제적 의미와 별도로 몽골의 환동해권 진입을 해양문명사적 입장에서 환영하는 바이다.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원장(제주대 석좌교수)
자민우드 시내의 러시아풍 집들
몽골의 일본침략을 그린 몽골습래회도
주강현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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