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푸틴 신동방정책·기후온난화로
극동항구들 화물·원유 처리 진땀
코지미노항 15만톤급 유조선 접안
러, 수출다변화, 한중일은 값싼기름
보스토치니항 컨테이너로 빼곡
처리물량 넘쳐 운송지연 다반사
러 “투자유치위한 인센티브 용의”
극동항구들 화물·원유 처리 진땀
코지미노항 15만톤급 유조선 접안
러, 수출다변화, 한중일은 값싼기름
보스토치니항 컨테이너로 빼곡
처리물량 넘쳐 운송지연 다반사
러 “투자유치위한 인센티브 용의”
거대한 땅 러시아가 펄떡이고 있다. 러시아의 동쪽 끝, 극동 연해주에도 봄의 기운이 약동했다. 지난 4월 하순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분홍빛 벚꽃이 화사하게 피었다. 서울보다 한달쯤 늦게 봄은 대륙을 물들이며 북상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에너지 대국이다. 극동의 생동감도 러시아가 지닌 막대한 에너지의 힘에서 가장 먼저 느껴졌다. 4월24일 러시아의 극동 에너지 수출 창구인 코즈미노 원유 터미널을 찾았다. 최대 15만t 규모의 유조선이 접안할 수 있는 수백m 길이의 원유 주입 터미널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태평양 쪽으로 낸 러시아 최초의 원유 터미널이다.
한국 언론이 터미널 완공 후 이곳을 공식 취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주일 전 미리 신상정보와 카메라, 노트북 등의 시리얼넘버를 알려줘야 했을 만큼 보안이 철저했다. 터미널 책임자인 보리스 멜니코프 총국장이 사무동 건물 입구까지 나와 취재진을 맞았다.
이곳의 원유는 동시베리아 타이셰트 기름밭에서 만리장성보다 긴 4740㎞를 달려 도착한다. 지난해 이곳을 통해 수출된 원유는 모두 2130만t. 이 가운데 300만t은 시베리아횡단열차(TSR)로, 나머지 1830만t은 동시베리아~태평양 송유관을 통해 운송됐다. 2012년 말 개통된 이 송유관은 중간지점인 스코보로디노에서 중국 다칭으로 이어지는 지선과 갈라진다. 러시아는 장기적으로 다칭 라인을 통해 중국으로 3000만t을, 코즈미노 라인을 통해 아태 지역으로 5000만t을 매년 수출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륙적 규모의 송유관과 터미널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집권 3기를 맞아 야심차게 내놓은 국가발전전략인 ‘신동방 정책’을 상징한다. 푸틴 대통령은 2012년 12월 국정연설에서 시베리아·극동 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3기 내각에 극동개발부를 장관급 부처로 신설했다. 2013년 2월엔 ‘신외교정책개념’을 채택하고 아태지역이 세계경제와 국제정치의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는 만큼 극동에서의 지역협력을 한층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는 1856년 태평양에서 만난 첫 부동항에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158년만에 러시아가 다시 동방의 가치에 눈길을 주고 있다.
동해와 시베리아횡단철도 등을 활용하는 유라시아 물류협력 또한 동방을 겨냥한 러시아의 주요 관심사다. 당장 코즈미노 터미널 자체가 한·중·일 등 태평양 국가에겐 중동원유의 수입비용을 줄여주는 획기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아시아에 더 비싼 값을 부르는 중동산 원유의 이른바 ‘아시아 프리미엄’을 견제할 수단”(에너지경제연구원)이기도 하다. 러시아도 유럽에 치중된 수출선을 다변화할 수 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구도이다. 이미 중국은 지난해 이후 25년간 600억달러의 러시아산 원유를 사들이기로 하는 등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한국은 아직 신중한 태도다. 멜니코프 코즈미노 터미널 총국장은 “지난해 우리 수출량의 8%가 한국 몫”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국가들의 공산품을 배로 실어와 유럽으로 보내고, 러시아 시베리아의 철과 석탄 등을 아시아로 되실어보내는 구상도 추진되고 있다. 기후온난화에 따른 북극항로 개척도 러시아와 협력을 통해 막대한 물류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프로젝트이다.
이를 원활하게 수행하려면 먼저 러시아 항만의 규모와 효율성을 대폭 끌어올려야 한다. 러시아 교통부 보고서를 보면, 러시아 극동 지역 항만의 처리물동량은 2012년 1억3500만t으로, 전년도보다 7% 증가했다. 이미 극동 최대 항구 블라디보스토크는 물동량이 터미널수용능력을 초과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상업항은 러시아 최대 물류그룹 페스코의 소유이다. 페스코의 물동량이 최우선적으로 처리된다. 블라디보스토크항 부국장 올레그 본다렌코는 “더 이상 항만을 늘릴 계획은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 블라디보스토크 항은 주변이 높은 언덕과 건물들로 들러싸여 더 이상 뻗어나갈 공간도 찾기 어려웠다.
컨테이너 항만으론 극동 두번째 규모를 자랑하는 보스토니치 항은 국내 서너배에 이르는 화물처리비용으로 악명높다. 자루비노, 슬라비얀카 등 블라디보스토크 남쪽의 소규모 항만을 확장하는 방법도 있지만, 막대한 현대화 비용을 누가 어떻게 부담할 것인지 등이 선결돼야 한다. 이성우 한국해양수산개발원 국제물류연구실장은 “러시아는 거의 모든 항만이 개별 회사 소유로 쪼개져 민영화돼 있어 국가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현대화 계획을 추진하기가 극히 어렵다”고 말했다.
항만마다 주인이 다른 탓에 외국 자본 참여를 두고도 받아들이는 태도가 극과 극이었다. 슬라비얀카 항만을 임대한 신예 기업 트랜지트-디브이의 올가 칸티셰바 사업개발 이사는 “현재 이곳에서 하고 있는 벙커링(선박에 운항용 연료를 돈을 받고 주유해주는 사업) 규모를 늘리고, 컨테이너 환적 사업도 새로 시작할 계획이다. 한국 기업의 투자를 두 손 모아 환영한다”고 말했다. 반면, 슬라비얀카에서 1시간 거리의 자루비노항 운영을 맡고 있는 ‘트리니티 베이 포르트’의 바비이 아르템 부국장은 “특별히 외국 투자를 유치할 계획이 없다. 지금으로도 충분하다”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시베리아횡단열차와 동해 항만 간 연계성과 효율을 강화하는 것도 물류협력 성공의 핵심적 선결 요건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진출한 한 한국 대기업의 현지 책임자는 “동해와 대륙을 연결한다는 게 말만큼 쉽지 않다. 현재 배로 들여오는 많지 않은 물동량도 열차로 환적해 유럽이나 러시아 내륙으로 옮겨가려면 심각한 지연 현상이 다반사”라고 했다. 시베리아횡단열차의 운송능력이 제한된 탓에 러시아 자국 물동량에 우선권을 주다 보니, 외국 화물은 애초 기대했던 납기 단축 효과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러 어려움에도 극동 러시아의 잠재력에 미래를 걸어야 한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보스토니치항에서 바로 연결된 철도로 쉴새없이 컨테이너가 옮겨실려 운송되는 모습이 이를 웅변하는 듯 했다.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로 러시아가 극동개발과 협력을 한층 가속화할 것”(이양구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이라는 긍정적 전망도 나온다. 실제 유리 트루트네프 부총리가 4월말 북한을 방문해 극동 개발을 위한 남·북·러 경제협력을 제안하는 등 러시아 정부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막심 셰레이킨 러시아 극동개발부 차관은 22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한러협력대화에서 “극동지역 투자개발 활성화를 위해 규제완화·세금감면·원스톱 투자서비스 제공 등의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성우 실장은 “어렵지만 가지 않으면 안되는 길”이라고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코즈미노·보스토치니·자루비노·슬라비얀카/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러시아 코지미노항에 태평양 쪽으로 낸 최초의 원유 터미널의 웅장한 모습. 최대 15만t 규모의 유조선이 접안할 수 있다.
자루비노·블라디보스토크·코지미노/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지난달 23일 러시아 연해주 자루비노항에서 노동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러시아의 자루비노항은 북한의 나진항 등을 통해 우리나라 속초, 일본으로 이어지는 물류 거점도시로 발전가능이 높은 지역이다.
극동 최대 항구인 블라디보스토크 전경.(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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