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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아기 맨다리에 기저귀 차고 피란…우크라 ‘인간 충격 보고서’

등록 2023-06-27 06:00수정 2023-06-29 15:47

러 ‘우크라 침공’ 1년 4개월째 삶 가린 포연
인도적 지원 필요 인구 1700만명으로 급증
아동 비중 10→23%…피란민은 540만명
우크라이나 동부 도시 리시찬스크에서 정처 없는 피란길에 나선 어머니와 두 자녀. 리시찬스크/AP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동부 도시 리시찬스크에서 정처 없는 피란길에 나선 어머니와 두 자녀. 리시찬스크/AP 연합뉴스

러시아 용병집단 바그너(와그너) 그룹을 이끄는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24일 반란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지도력이 크게 손상된 이후 우크라이나 전쟁 양상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러시아 내부 혼란을 틈타 우크라이나가 강력한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도 있지만, 푸틴 대통령이 정치생명을 걸고 더 호전적으로 나설지도 모른다. 전쟁이 더욱 격렬한 대결 국면으로 빠져들면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삶이 또다시 큰 위기에 빠지게 됐다.

유엔이 파악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상황은 처참하다. 현재 받고 있는 고통만큼이나 미래도 암울하다. 유엔개발계획(UNDP), 유니세프, 국제이주기구(IOM) 등 12개 유엔기구는 지난 12일 내놓은 우크라이나 전쟁 ‘인간 충격 보고서’에서 많은 주민이 한계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보고서는 “주민들이 저축해둔 돈이나 인도주의 지원금, 빚 등으로 버티면서 생필품 구입을 위해 의료비 지출까지 최소화했으나 이제는 더 버티기 어렵다고 호소한다”고 전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전국 24개 주에서 3239가구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이고 10차례의 포커스 그룹 토론과 23번의 전문가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뒤 과거 자료와 비교해 내놓은 것이다.

■ 위기에 빠진 미래세대

러시아가 지난해 2월24일 침공하기 전부터 우크라이나 내에 존재하던 도시와 농촌의 빈부 격차는 1년여 사이에 더 커졌다. 특히 주요 전투지역인 북부·남부의 농촌은 폐허로 변하고 있다. 전쟁 전인 2021년 말에는 인도주의 지원이 필요한 인구가 동부 분쟁지역 주민 등 모두 290만명이었으나 지난해 말에는 1760만명으로 다섯배 넘게 늘었다.

더 걱정되는 것은 지원이 필요한 주민 가운데 아동의 비중이 10%에서 23%로 폭증했다는 점이다. 인구 노령화와 젊은층의 국외 이주 등으로 앞으로 30년 사이 인구가 3분의 1까지 감소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을 고려할 때 아이들이 겪고 있는 현재 위기는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만든다.

교육 위기도 어두운 미래를 예고한다. 보고서는 “우크라이나 서부 일부 지역만 대면 수업이 온전히 이뤄지고 나머지 지역은 온라인 수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며 “자포리자, 헤르손, 도네츠크주에서는 인터넷 접속이 어려워 온라인 수업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헤르손과 도네츠크는 교사의 77%가 다른 지역으로 피란을 떠나면서 ‘교육 불모지’로 전락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미래 세대의 건강에도 심각한 적신호가 켜졌다. 보고서는 구호단체 월드비전의 자료를 인용해 “중남부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북동부 하르키우, 남부 헤르손에서 어린이 돌봄 상황을 평가한 결과, 이들이 아주 어린 나이부터 흡연, 중독, 물리적 폭력에 노출될 위험이 큰 것으로 지적됐다”고 밝혔다.

월드비전의 자료를 보면 청소년들이 느끼는 불안과 스트레스가 커지면서 9~13살 소년과 소녀의 각각 39%와 44%가 담배 같은 중독성 물질에 손대는 것으로 나타났다. 14~17살 소년과 소녀는 이 비율이 각각 78%와 55%에 달했다. 학교 수업을 빼먹는 청소년의 비율도 36~50%로 조사됐다.

러시아의 드론 공격으로 무너져 내린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아파트 건물. 키이우/AP 연합뉴스
러시아의 드론 공격으로 무너져 내린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의 아파트 건물. 키이우/AP 연합뉴스

■ 추락하는 삶의 질

1년 이상 이어지는 전쟁으로 조사 대상 가구의 13%가 폭격·전투로 인해 집이 부서지는 경험을 했다. 지난 1년 새 전국에서 손상된 가옥은 140만채 정도로 추산된다. 이렇게 삶의 터전을 잃은 주민 다수가 피란길에 올라, 1월 현재 고향을 등진 채 사는 이들은 전체의 15% 수준인 540만명에 달했다.

지난해 가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발전소 등 사회기반시설을 집중 공격한 뒤 식수·난방 등 기본 공공서비스마저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이들 역시 급증했다. 특히 북부·남동부 주민의 77%가 식수 중단 등으로 혹독한 겨울을 겪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서부도 전쟁 전에는 겪지 않던 식수난으로 고생하는 등 기반시설 부족이 전국적인 현상이라고 보고서는 지적했다.

조사 대상 가구의 22%는 소득의 25% 이상을 보건·의료비로 쓰고 있다고 답한 반면, 가족이 아파도 의료기관을 찾지 않는다고 답한 가구도 38%에 이르렀다. 전반적인 보건 위기 속에 계층별 의료 격차도 커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자립 불능 인구 눈덩이

우크라이나 경제는 전쟁 탓에 지난해 -29.2%의 역성장을 기록했다. 그로 인해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갈 여력을 잃은 가구가 급증했다. 보고서는 주요 수입원이 ‘유급 노동’인 가구가 전체의 67%에서 53%로 크게 줄었다고 밝혔다. 일거리가 있는 가구원이 단 한 명도 없는 가구도 26%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인도주의 지원금이 주요 소득원인 가구가 전쟁 이전인 1%에서 1년여 만에 21%로 크게 늘었다. 또 전체 가구의 13%는 친척이나 친구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비율은 전쟁 전보다 8%포인트나 늘어난 것이다. 생활이 어려워 정부로부터 일정한 소득 지원을 받는 가구의 비중도 1년 사이 53%에서 60%로 높아졌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우크라이나 경제 성장률을 -3~1% 정도로 예상하고 있다. 가구 소득이 빠르게 늘어나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 6일 헤르손주 카호우카댐이 붕괴돼 물난리가 나면서 주요 산업인 농업 생산이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되는 것도 향후 경제 전망을 어둡게 한다. 보고서는 “우크라이나는 농산물 수출 대국이어서 그동안 식량 안보 문제가 거의 없었지만, 전쟁으로 식량을 충분히 소비하지 못하는 가구가 전체의 10분의 1 수준에서 3분의 1까지 늘었다”고 밝혔다. 전쟁이 더 길어지면 식량 문제가 주민들의 새로운 걱정거리로 떠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 크라마토르스크의 한 교회에서 음식을 배급받기 위해 몰여든 주민들. 크라마토르스크/EPA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주 크라마토르스크의 한 교회에서 음식을 배급받기 위해 몰여든 주민들. 크라마토르스크/EPA 연합뉴스

■ 대책 없이 내몰리는 취약 계층

한부모 가정, 노인, 장애인, 성소수자, 흔히 집시로 불리는 롬 민족 같은 소수 민족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정착하려 애쓰는 ‘국내 이주민’의 처지도 이들과 별로 다르지 않다. 보고서는 “취약 계층에 속하는 인구가 1년 사이 전체 국민의 34%에서 45%로 늘었다”며 “이들 중에서도 국내 이주민이 가장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다. 540만명 정도의 국내 이주민들은 노인·장애인과 함께 가장 소득이 낮은 계층을 형성하고 있고, 새로 정착하려는 지역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일도 많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드니프로 지역에 머물고 있는 한 이주민은 유엔 조사관들에게 “내 이력서에는 국내 이주민이라는 표시가 있다. (그래서 일을 구하지 못한다)”며 “금전 관련 책임이 따르는 업무는 아예 (지역) 영주 허가증을 필수로 요구한다”고 전했다. 흑해 서부 연안 오데사 지역의 한 사회 활동가도 “지역 사회에 일자리가 있지만 국내 이주민이 일자리를 얻는 건 아주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여성과 소수 민족 출신자들도 불이익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서남부 지역 빈니차의 성평등 활동가는 “여성들이 남성보다 일을 더 열심히 찾고 임금이 낮은 일자리도 기꺼이 받아들인다”고 전했다. 하르키우의 여성 인권 운동가는 “아이와 노인을 돌봐야 하는 부담 때문에 바깥 활동을 전혀 못 하는 여성도 많다”며 “이 때문에 인도주의적 지원조차 받지 못하는 일도 벌어진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남부에 주로 모여 사는 롬 민족에 대한 차별도 더 심해졌다. 오데사 지역에 사는 한 롬 민족 주민은 “전쟁 전에도 아이들을 유치원이나 학교에 보내기 어려웠는데 이젠 더 어려워졌다”며 “결국 뇌물을 주고 아이를 학교에 등록시켰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롬 민족 여성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전쟁 이후 훨씬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에는 5만~26만명의 롬 민족이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고서는 전쟁 충격에 시달리는 모든 계층이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도록 국제사회의 지원을 촉구했다. 특히 교육 투자와 농업 생산력 회복을 위한 개입, 여성과 국내 이주민의 노동 기회 확대를 위한 여건 마련을 강조했다. 하지만 전쟁을 끝낼 길을 찾지 못하는 한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어려움을 획기적으로 개선시키기 어렵다는 게 가장 근본적인 고민거리다.

신기섭 선임기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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