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일간지들은 지난주 1면에 독일 나치의 십자문양과 아테네의 거리에 나붙은 “오히”(OXI·아니오), 그리고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의 사진을 나란히 함께 실었다. 아테네 길거리에는 쇼이블레의 사진 아래 “그는 5년 동안 당신의 피를 빨아왔다. 이제 그에게 ‘아니오’라고 말하자”는 포스터가 나붙었다. 많은 그리스인들에게 쇼이블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보다 더 증오의 대상이 됐다고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4일 전했다. 그리스인들은 쇼이블레가 2010년 이후 그리스의 연금 삭감 등 사회안전망에 깊은 상처를 냈다고 비난한다. 쇼이블레는 그리스 채권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독일이 보여온 강경한 태도의 상징이 됐다.
그런 그가 막상 그리스 국민투표를 앞두고는 전보다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는 3일 독일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채권단의 요구사항은 변함이 없다”며 “(그리스) 국민투표에서 찬성이 나와도 전적으로 새로운 기반 위에서, 또한 악화한 경제환경 속에서 협상해야 하기 때문에 구제금융 협상이 지연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받으려면 자구 노력을 해야 하며, 그리스가 투표 이후 먼저 지원을 신청하면 유로존 재무장관들이 협상을 개시할지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쇼이블레는 “이번 투표는 그리스가 유로를 갖고 살 것이냐, 일시적으로 유로 없이 살 것이냐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이전까지 “채권단 협상안에 대한 반대는 ‘그리스의 유로존 탈퇴’(그렉시트)를 뜻한다”며 그리스인들을 압박하던 때와 사뭇 달랐다. 또 그는 “그리스가 유럽연합의 일원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리스가 요동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가디언>은 이런 그의 발언을 두고 ‘반대표가 그렉시트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그리스 정부 쪽 주장과 가깝다고 지적했다. 유로존의 미래가 달린 국민투표가 임박하자, 독일이 ‘그렉시트(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를 방지하고 그리스인들을 달래기 위한 유화적 메시지를 던진 것으로 해석된다.
박영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