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스 치프라스 그리스 총리가 5일(현지시각) 수도 아테네의 투표소에서 국제채권단의 구제금융 협상안에 대해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에 참가해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아테네/AP 연합뉴스
국제 채권단 긴축안 찬반 팽팽
“구 체제 회귀 땐 경제 혼란 극심”
“어두운 앞날, 더 나빠질 순 없다 ”
지지자들 갈려 서로 ‘승리’ 외쳐
“구 체제 회귀 땐 경제 혼란 극심”
“어두운 앞날, 더 나빠질 순 없다 ”
지지자들 갈려 서로 ‘승리’ 외쳐
오랜 군부독재와 민주화, 그리고 경제위기로 인한 구제금융 사태까지…. 굴곡 많은 현대사를 겪은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비극마저도 즐길 줄 알게 됐다”고 말할 만큼 낙천적이다. 그러나 5일 아침 투표소로 향하는 아테네 시민들의 굳은 얼굴은 좀체 펴지지 않았다. 유럽연합, 유럽중앙은행, 국제통화기금 등 이른바 ‘트로이카’가 제시한 협상안에 대한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삶이 또 한번 크게 출렁일 수 있기 때문인지 그들의 발걸음은 무거워 보였다. 찬성이 많든 반대가 많든, 이후의 생활이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는 탓일 수도 있다. 아니, 유럽 문명의 요람인 그리스가 유럽에서 떨어져나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투표를 한다는 것 자체가 비극처럼 느껴졌다.
5일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한국시각 5일 오후 1시부터 6일 새벽 1시) 12시간 동안 그리스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1974년 입헌군주제를 폐지할 때 실시한 이후 41년 만에 치른 국민투표다. 985만여명의 유권자에게 긴축과 연금 삭감 등을 요구하는 국제 채권단의 협상안에 대해 찬반 의견을 물었다.
이날 아네테 아크로폴리스 주변의 한 투표소로 향하는 길은 분주했다. 전날 밤 새로 붙인 듯한 ‘오히’(OXI·반대) 포스터와 전단지 사이로 걸음을 옮기는 아테네 시민들의 표정엔 그늘이 짙었다. 투표소에 배치된 경찰들은 투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취재진의 사진 촬영은 물론 투표소 주변 취재를 가로막았다. “지난 1월 총선 때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 한 현지인은 말했다. 그만큼 이번 투표를 둘러싼 긴장이 팽팽했다.
리키오 아티논 학교 투표소에서 투표를 마치고 나온 마리아(69)는 “연금이 깎이는 것은 싫지만 드라크마(그리스의 옛 통화)로 복귀해 경제가 더 어려워지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을 것 같아 찬성에 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변호사인 스테파노스(35)는 “치프라스 정권에 맞서기 위해 찬성에 투표했다”며 “국민투표 자체가 그리스의 미래보다는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 정부가 분위기 조성용으로 만든 일종의 쇼이고, 그들은 투표 결과와 무관하게 민간부문까지 통제하려 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신발 제조업에 종사하는 코스타스(33)는 “현재도 어려운데 여기서 더 졸라매라는 채권단의 요구는 받아들이기 힘들어 반대 쪽에 투표했다”며 “최악의 경우 유럽연합에서 쫓겨나 국가안보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지만 긴축안에 대한 내 생각에 기준을 두고 결정했다”고 밝혔다.
투표소 주변 카페에는 투표를 마친 시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진지한 토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40대 중반의 한 무리는 자신들이 투표한 ‘오히’ 쪽이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현 정부에 힘을 실어줘야 그리스에 유리한 쪽으로 재협상이 가능할 것”이라며 “저쪽(찬성)은 그리스가 유럽연합 밖으로 쫓겨날 것이라고 협박하지만 그럴 리 없고, 설령 그렇더라도 지금보다 더 나빠질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직 교사 출신이라고 밝힌 마리아(62)는 “반대 쪽으로 결정되면 우리의 삶이 파탄날 것이라고 은근히 협박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며 “채권단으로 표현되는 자본가들은 우리의 삶과 미래를 돈으로 사려고 하는데, 그 흐름을 지금 끊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를 제안한 이후 온 나라가 찬반 진영으로 갈려 논쟁해온 탓에 양쪽 지지자의 논리는 도식화돼 있다. 협상안에 찬성하는 진영은, 반대하는 쪽이 승리하게 되면 ‘유로존 탈퇴와 이로 인한 극심한 혼란’이 벌어질 것이라 강조한다. 반대 진영은 찬성 쪽이 승리할 경우 ‘미래 세대들도 평생 빚만 갚다 삶을 마감할 것’이라며, 투표 결과는 유럽연합 탈퇴 여부와 무관하다고 말한다.
그리스의 주요 정당들도 둘로 쪼개졌다. 집권 시리자(급진좌파연합)와 우파 민족주의 정당인 그리스독립당, 네오 나치당인 황금새벽당은 ‘반대’를 호소했고, 중도 우파 정당인 신민주당과 중도 좌파 정당인 그리스사회당(Pasok), 토포타미(To Potami·강)는 ‘찬성’을 호소했다. 소수세력으로 전락한 그리스공산당은 “협상안에도 반대하지만 치프라스에도 반대한다”며, 이날 투표소 주변에서 투표용지 대신 자신들이 만든 전단지를 투표함에 넣어달라고 했다.
치프라스 총리는 이날 오전 “오히”를 외치는 지지자들의 환호 속에 키피셀리 지역 투표소에 나타났다. 그는 투표를 마친 뒤에 “오늘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두려움을 이기는 날”이라며 “우리 운명을 우리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단지 유럽연합에 속하는 것만을 원하는 게 아니라 평등하게 존재하기를 원한다는 점을 널리 알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찬반 양쪽 지지자들은 투표 이후에도 아테네 시내 곳곳에서 “오히”와 “네”(NAI·찬성)를 외치고 다니며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여론조사 업체 입소스가 지난 30일부터 3일까지 진행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채권단의 협상안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44%, 반대가 43%였다. 그리스 일간 <아브기>의 여론조사에서는 찬성 42.5%, 반대 43%로 나타났다. 대부분 여론조사 결과가 오차범위 안에서 우열을 다툴 정도로 찬반이 팽팽하다. 그러나 응답자들의 75~76%는 유로를 사용하는 유로존에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으로 조사됐다.
결국 그리스 민심은 몇해 동안 계속된 채권단의 허리띠 조르기에 분노하면서도 유로존에서 이탈했을 때 닥칠 경제적 불안 등 두려움 사이에서 요동쳤던 것으로 보인다. 선택은 끝났다. 그리스가 떠안고 있는 빚은 변함없고, 그리스인들의 신산한 삶은 이어질 것이다. 그리스 비극이 언제 막을 내릴지 현재로선 알 수가 없다.
아테네/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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