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독일, 라이프치히 민주화시위 현장
② 폴란드, 연대노조의 터전 그단스크 레닌조선소
③ 보스니아, 내전 상처 속 공존의 사라예보
④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처형 현장
⑤ 체코, 사라진 벨벳혁명의 프라하
② 폴란드, 연대노조의 터전 그단스크 레닌조선소
③ 보스니아, 내전 상처 속 공존의 사라예보
④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처형 현장
⑤ 체코, 사라진 벨벳혁명의 프라하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① 독일, 라이프치히 민주화시위 현장
니콜라이 교회에 10만여명 모여 ‘월요기도회’ 기념
산증인 퓌러 목사 “자유 얻었지만 분배문제 박탈감”
니콜라이 교회에 10만여명 모여 ‘월요기도회’ 기념
산증인 퓌러 목사 “자유 얻었지만 분배문제 박탈감”
“나는 독일의 통일에 대해 날마다 감사하고 기쁘게 생각한다. 동독 시민들의 용기가 대단하다. 내가 당시 현장에 있었다면 시위에 참여할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 당신들의 용기에, 그리고 폭력 없이 하나가 된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마르틴, 26살, 하이델베르크에서.” 서독 지역의 한 젊은이가 이달 초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의 방명록에 남긴 글이다. 12세기 중반에 창건된 고딕 양식의 니콜라이 교회는 1989년 동독 민주화 시위의 진앙지다.
2009년 10월 라이프치히는 지금부터 꼭 20년 전의 일을 나지막이 증언하고 있었다. 거리 곳곳엔 ‘1989년 가을 라이프치히’란 이름 아래 수만명 시민의 평화시위 사진을 실은 기념 포스터들이 눈에 띄었다. 니콜라이 교회엔 쉴 새 없이 방문객이 찾아들었다. 관광객이라기보다 순례자 같았다. 지금도 니콜라이 교회를 지키고 있는 크리스티안 퓌러(66) 목사는 1989년 동독 민주화 시위의 기폭제가 됐던 월요기도회를 이끈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당시 평화기도회는 금기시되는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정보를 얻는 해방구였다”고 돌이켰다. “정권과 슈타지(비밀경찰)의 위협이 컸는데도 참여자가 갈수록 늘었습니다. 촛불집회 시민들이 체포되는 장면이 서독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자 이것을 본 시민들이 더 많이 거리로 나왔지요.”
1989년 동독 민주화 시위의 진앙지였던 니콜라이 교회. 이곳에서는 지난 9일 10만여명이 참가해 월요시위 20돌 기념식이 열렸다.
앞서 지난 9일 라이프치히 아우구스투스 광장 옆 게반트하우스에서는 호르스트 쾰러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총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월요시위 20돌 기념식이 열렸다. 공식행사는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독일 시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니콜라이 교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녁 무렵 10만명으로 불어난 시민들은 숙연한 마음으로 아우구스투스 광장까지 가득 채운 채 촛불집회를 재현했다. 퓌러 목사는 “동독인들은 그토록 원하던 사상의 자유와 민주적인 선거를 얻었고 경제 규모도 커졌지만, 분배 문제로 박탈감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동독지역의 50대 이상 장년층에는 ‘옛날이 더 살기 좋았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실업이 없고, 여가를 누릴 수 있고, 공동체 정서가 있고,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독 출신으로 라이프치히대 대학원에 재학중인 마르틴 로스(26)는 “아직은 계급적 차이나 갈등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을 바꾸기를 원한다”며 “진정한 통일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말했다.
퓌러 목사도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금은 용기와 인내심이 필요한 때지요. 89년 혁명은 시민들의 힘으로 이룬 겁니다. 거기에 대한 책임도, 더 나은 변화를 이뤄가는 것도 우리의 몫이지요.” 퓌러 목사는 이달 초 ‘레볼루션 재단’(혁명재단)을 설립했다. “우린 아직 모든 것을 이룬 게 아닙니다. 독일뿐 아니라 세계의 평화와 혁명적 변화를 위한 일들을 계속해나갈 겁니다.” 라이프치히/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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