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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국제일반

피셔 이사장 “장벽은 높은 게 아니라 깊었다”

등록 2009-10-30 02:04수정 2009-10-30 16:34

만프레드 피셔(MANFRED FISHER) 이사장. 사진 조일준 기자.
만프레드 피셔(MANFRED FISHER) 이사장. 사진 조일준 기자.
[만프레드 피셔 베를린장벽기념재단 이사장 인터뷰]
“후대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건 파괴된 삶과 상처가 있기 때문”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① 독일, 라이프치히 민주화시위 현장
 

 베를린장벽은 1989년 11월9일 대부분 걷어치워졌지만, 일부는 역사적 기념의 현장으로 보존되고 있다. 장벽기념재단이 관리하는 장벽기념관도 그 일부의 앞에 있다. 이 재단의 만프레드 피셔(MANFRED FISHER) 이사장은 베를린 장벽이 동서를 가르고 있던 시절, 장벽 바로 앞의 동독 땅이었던 동베를린 베르나워 거리에 자리잡은 ‘화해의 교회’의 목사이기도 하다. 지난 15일 만프레드 피셔 이사장을 장벽기념관에서 만났다. 

 -기념재단 이사진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재단이사는 모두 6명이다. 독일 연방정부 1명, 베를린시 1명, 학계 1명, 교회(종교계) 1명 등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최근 들어 장벽기념관 방문객이 늘고 있는가?

 =베를린장벽 기념관을 찾은 방문객은 2007년 26만5000명, 2008년 30만5000명이었고, 올해 들어선 10월 중순 현재에만 40만명에 육박해 지난해 보다 30%이상 늘었다. 

 -장벽기념재단의 예산은 어느 정도인가?

 =올해 예산은 140만 유로(약 25억원)로 지난해 100만 유로보다 크게 늘려잡았다. 예산은 독일연방정부와 베를린시, 그리고 유럽연합(EU)이 지원한다.  

 -방문객들이 방명록에 남기는 문구에 어떤 특징이 있나?

 =독일인들은 장벽에 얽힌 기억과 경험 등 자기 주변의 구체적 이야기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 반면 외국인들은 현장 자체가 주는 깊은 인상과 감명을 남긴다. 올해 들어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 젊은이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방문객들은 베를린장벽 붕괴의 현장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방문객 대다수는 어떤 신화적 이미지나 상상을 갖고 이 곳을 찾는다. 권력, 동독 공산정권, 폭력, 살인, 분단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갖고 물결처럼 휩쓸려 온다. 영화나 포스터, 사진으로만 봤던 극적인 장면만 머릿속에 담고 왔다가, 정작 이곳 현장을 보고 실망한다. 아니 장벽이랄 것도 없잖아, 이렇게 작은 것은 것이 우리를, 동서독을 가르고 있었던 거야? 한다.

 장벽은 높았던 게 아니라 깊었던 것이다. 위험하고 두려웠던 것은 장벽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1961년 처음 세워진 장벽은 해가 바뀔때마다 두터워졌고 경비도 삼엄해졌다. 장벽 자체가 하나의 과정이었다. 장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공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독 정권의 문제는 인민들이 더 이상 그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선거권도, 자유도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 생기기 이전에는 동-서독 간에 왕래가 가능했다. 동독 정권은 장벽을 세우고 인민을 가둬두면 억압적 지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장벽은 사람들이 동독을 빠져나가려 했던 이유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문제를 더욱 선명하게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만프레드 피셔(MANFRED FISHER) 이사장. 사진 조일준 기자.
만프레드 피셔(MANFRED FISHER) 이사장. 사진 조일준 기자.

 -하지만, 현실적으로 장벽의 위력과 단절감은 대단히 크지 않았나?

 =장벽이 공고하면 할수록 저항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장벽을 평화적으로 극복할 세력이 동독 지역에서 생겼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드문 일이다. 1989년 가을에 수천, 수만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서서 “우리가 인민이다”라고 외치며 행진했다. 시위는 평화적이었고, 군대와 경찰의 총격은 없었다. 시위대 중에는 공산당 간부들의 자녀도 있었다. 권력이 내부에서 스스로 무너졌다. 사람들의 공포심이 바로 권력의 도구이자 무기다. 그러나 당시 시위에 나선 시민들에게는 공포심보다 용기가 더 컸다.    

 -장벽기념관의 교육적 효과도 클 것으로 보인다.

 =모든 기념시설은 정치교육의 현장이다. 가장 좋은 것은 부모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와서 당시의 일과 교훈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것이 산교육이다. 이 곳에선 방문객들을 위한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독일인 뿐 아니라 외국인을 위해 여러나라 언어로 설명한다. 베를린 장벽 밑으로 터널을 만들어 탈출을 돕던 서독인, 동독에서 민주화 시위를 이끌었던 반체제 인사 등 당시를 직접 겪었던 사람들의 증언도 이해를 돕는다. 

 -장벽기념재단이 과거의 아픈 기억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후대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 곳에 파괴된 삶과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다. 동독 시절엔 우등생이라 할지라도 냉전과 대립을 반대한다는 뜻의 평화 상징마크를 달고 다녔던 학생들은 퇴학을 당했고, 대학 진학의 길이 막혀 직업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한마디로 사회적 출세의 길이 막혔다. 왜그랬던가,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이룬 것은 당시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1961과 1987이라는 두 개의 숫자, 2개의 메시지를 가르친다. 그 메시지는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해인 1961은 “결코 망각하지 말자”는 다짐의 숫자다. 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7은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는 뜻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상처를 채 치유하기도 전에, 옛동독과 서독간의 지역격차와 네오나치즘의 등장 같은 또다른 갈등과 상처가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이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20년전 그들이 해냈다면, 지금 우리도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베를린/글·사진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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