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용병집단 ‘바그너그룹’ 대원들이 24일(현지시각)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나노두에서 전차에 오른 소녀와 사진을 찍고 있다. EPA 연합뉴스
러시아의 용병집단인 ‘바그너(와그너) 그룹’이 막판 모스크바 진격을 포기하고 철수함에 따라 쿠데타 시도가 하루만에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20년 넘게 러시아를 철권통치해온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리더십에 큰 상처를 남겼다.
바그너그룹의 최고책임자 예브게니 프리고진은 24일(현지시각) “유혈사태를 피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향하던 병력에 철수를 지시했다”고 텔레그램을 통해 밝혔다. 그는 이날 바그너그룹이 모스크바에서 200㎞ 떨어진 곳까지 접근했지만 “한쪽 러시아인이 피를 흘리는 데 따르는 책임을 이해하기 때문에 계획대로 병력을 되돌려 기지로 돌아간다”고 했다.
바그너그룹의 철군은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이 나서 협상을 주선한 데 따른 것이다. 양쪽은 푸틴 대통령이 프리고진과 바그너그룹의 안전을 보장하고 대신 바그너그룹은 즉각 철군하고 프리고진은 러시아를 떠나 벨라루스로 가기로 합의했다.
이번 사태는 전날 바그너그룹이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나도누의 군기지를 점령한 뒤 모스크바를 향해 북진하면서 촉발했다. 이들은 러시아 국방부가 자신들을 미사일로 공격했다며 군 지도부의 처벌을 요구했다. 이에 푸틴 대통령이 이번 사태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대테러작전 체제를 발령하는 등 강경 대응에 나서면서, 정국의 긴장이 한껏 고조됐었다.
이번 사태는 막판 극적 합의로 파국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과연 푸틴 대통령이 정국을 장악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전문가들은 1999년 12월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임명된 이래 23년 넘게 이어져온 푸틴의 장기 집권 체제가 최악의 도전에 직면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번 사태가 1991년 여름 실패한 옛 소련 보수파의 쿠데타 시도를 연상케 한다며 푸틴 체제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정치적 불안을 부추길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번에 반기를 든 프리고진은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 그룹에 속한 인물이다. 그는 그동안 사적 무력 집단인 바그너그룹을 이끌며 푸틴 체제가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이른바 ‘더러운 일’을 대신 해왔다. 2014년 우크라이나 내전에도 참전했고, 이후 시리아와 모잠비크, 리비아, 수단,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말리 등 아프리카의 내전에 개입하며 민간인 학살과 인권 침해로 악명을 떨쳤다. 푸틴 대통령이 이런 최측근의 반란을 미리 막지 못한 것은 내부 통제 실패라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프리고진은 그동안 러시아 국방부와 갈등을 겪어왔다. “국방부가 전투를 벌이는 바그너그룹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제대로 지원하지 않는다”고 공개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은 이런 갈등을 수습하기보다는 방관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왔다. 이에 대해 당시 전문가들 사이엔 푸틴이 지배 엘리트들 사이의 알력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이른바 ‘디바이드 앤드 룰’ (divide and rule)전략을 쓰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보면, 그가 프리고진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는 분석이 더 그럴듯해 보인다.
이번 사태는 국가의 무력 독점 원칙을 훼손한 푸틴 대통령의 자업자득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정치적 편의를 위해 바그너그룹이라는 사적 무력 집단을 용인함으로써, 기존 정규군과 별도의 사병 조직이 버젓이 활동하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카네기국제평화재단의 안드레이 콜레스니코프는 “국가가 (바그너그룹을 통해) 무력을 외주화한 것은 국가의 독점적 무력사용 원칙을 포기한 꼴이며 국가기구의 붕괴”라고 말했다.
이번 권력 내부의 균열이 향후 국내외 정세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당장 국내적으로 정치적 도전 세력이 눈에 띄는 건 아니다. 그러나 푸틴 대통령의 권위 실추는 피할 수 없으며, 이에 따라 예상되는 권력 공백을 메우기 위한 각 세력의 암중모색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프리고진과 바그너그룹에 면죄부를 줬다. 애초 푸틴 대통령은 “반란 가담자는 처벌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나,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를 철회한 것이다. 그만큼 사태가 급박했고 푸틴 대통령이 심각한 위기에 몰렸다는 방증이다. 러시아 대통령궁 대변인은 “유혈사태를 피하는 게 책임자 처벌보다 중요했다”고 해명했지만, 힘없는 권력자의 무능을 가리기 위한 궁색한 변명으로 들린다.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가 애초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이견과 갈등에서 불거졌다는 사실은, 푸틴 체제의 전쟁 수행에 부담이 될 수 있다. 프리고진은 23일 바그너그룹의 궐기를 선언하면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로부터 안보 위협이 없다”며 “러시아 군 지도부가 푸틴을 속여 전쟁을 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공개적으로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략 명분을 모두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전쟁 명분 논란은 러시아 군내 동요를 불러올 요인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아도 러시아 사회에 잠복해 있던 전쟁회의론에 힘을 실어줄 가능성도 있다.
당장 바그너그룹을 더는 전선에 투입하기 어려운 것도 러시아군의 전력에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영국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투입된 바그너그룹 병력이 5만명에 이른다고 추정한 바 있다. 실제 전투력은 러시아 정규군보다 앞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들의 전선 이탈은, 특히 최근 우크라이나가 대반격 작전에 나선 것과 시기적으로 맞물려 전세에 눈에 띄는 변화를 몰고 올 가능성도 있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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