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부인 질 바이든 여사가 26일(현지시각) 워싱턴 디시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음력설 축하행사(Lunar New Year Reception) 공연을 보고 있다. 백악관 차원에서 음력설 행사를 개최한 것은 처음이다. AP 연합뉴스
지난주 여성 아이돌그룹 ‘뉴진스’의 멤버가 설 명절을 맞아 온라인에 새해 인사를 올렸다가 곤욕을 치렀다. 영어로 설날을 ‘Chinese New Year’(중국설)이라고 썼다가 ‘음력설’(Lunar New Year)이라고 해야 한다는 질타가 쏟아진 것이다. 그는 “앞으로 신중하게” 행동하겠다며 사과해야 했다.
설날의 영어 명칭이 음력설이냐, 중국설이냐를 둘러싼 해묵은 논란이 최근 다시 불붙으며 많은 이들이 선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미국 <시엔엔>(CNN)이 29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음력설을 써야 한다는 이들은 설이 중국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각자 독특한 관례에 따라 치러지고 있다는 점을 꼽고 있다. 설을 가리키는 표현부터 국가별로 다르다. 중국은 춘절, 한국에선 설, 베트남에선 뗏이라고 부른다. 중국설이라는 표현은 이런 다양성을 지워버리는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중국설 표현으로 입방아에 올랐던 뉴진스 멤버도 사과문에서 “음력설이 우리 나라를 포함한 여러 국가 및 지역에서 기념하는 명절이기 때문에 나의 표현은 부적절했다”고 적었다. 많은 영어권 언론사에서 기사 작성할 때 참조하는 <에이피>(AP) 통신의 스타일북을 비롯해 많은 기관에서도 이런 이유로 대체로 음력설이란 표현 사용을 권고한다.
중국은 설이 자신들이 개발한 태음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중국의 춘절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설도 영어로 표기할 땐 중국설로 기원을 밝혀 써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제 중국의 국영 통신사 <신화>는 미얀마·말레이시아·일본이 ‘중국 음력설’(Chinese Lunar New Year)을 축하했다는 식으로 표기했다.
이런 정서는 중국 당국의 엄격한 통제를 받는 소셜 미디어에서도 넘쳐난다. 중국 누리꾼들은 중국판 트위터로 불리는 ‘웨이보’에 “한국이 이끄는 ‘음력설’ 표현은 중국 문화에 대한 서구의 이데올로기 공격”이라고 썼다.
설 명절과 무관한 사람들도 관련 논란을 피해가가 어렵다. 예컨대 영국박물관은 트위터에 한국 전통음악 공연을 소개하며 “한국의 음력설(Korean Lunar New Year)을 마법 같은 공연과 함께 축하하러 오라”고 홍보했다. 이에 대해 “중국설이라고 해야 한다”는 반발이 쇄도하자 부랴부랴 트위터 글을 지웠다.
이 논란에 대해 매기 잉 장 서부오스트레일리아 대학 교수는 중국과 주변국들 사이의 문화 충돌과 지정학적 갈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음력설’ 주장에는 중국 주변국들이 자신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세우고 알리려는 노력이 깔려 있는 반면, 중국은 이들이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빼앗아가려 한다고 의심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한·중이 최근 정치경제적으로 갈등하는 상황이 겹치며 논란이 커지고 있다는 게 장 교수의 지적이다.
나아가 그는 중국의 격한 반응의 배경엔 갈수록 힘을 얻어가는 중국 민족주의가 깔려있다고 지적했다. 시진핑 국가 주석 집권 이후 중국의 온라인은 민족주의 담론으로 가득 들어찬 상황이다. 이에 대해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많은 학자·지식인·여성운동가들이 “비애국적”라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다. 장 교수는 청나라 말부터 외세에 짓밟혔던 이른바 ‘굴욕의 세기’가 중화 민족주의가 사회에 깊게 뿌리내릴 토양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병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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