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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미국·중남미

부자 향한 ‘증오의 묵시록’…자기파탄이 공동체를 쐈다

등록 2007-04-19 18:08수정 2007-04-20 08:58

조승희씨가 지난 16일 1차 범행 직후 NBC방송에 보낸 소포 속에 들어있는 조씨 사진들. NBC가 18일 자사 인터넷사이트에 공개했다. 연합뉴스
조승희씨가 지난 16일 1차 범행 직후 NBC방송에 보낸 소포 속에 들어있는 조씨 사진들. NBC가 18일 자사 인터넷사이트에 공개했다. 연합뉴스
‘속물’‘너희들’… 조씨 육성에 담긴 의미는?
NBC에 보낸 영상물에 ‘범죄 동기’ 풀 실마리
조씨, 영상물로 뭘 말하려했나
<엔비시>(NBC) 방송에 보낸 조승희씨의 비디오 영상물은 증오와 경멸, 자기희생에 대한 언급으로 가득 차 있다. 망상과 자기 합리화로 일관한 육성은 끔찍한 범죄를 어느정도나 설명해 줄까?

모든 것 가진 사람들 속물문화에 적대감
육성에 담긴 가장 뚜렷한 증오 대상은 “메르세데스(벤츠)”와 “금목걸이”를 지닌 부자 내지는 “속물”이다. “평생 조금의 고통도 느껴본 적”이 없고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을 한계 상황으로 몰고갔다고 주장한다. 상대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자신과 대비되는 부유층을 원망하는 듯하다.

부자 일반이 아니라 주변에서 속물적 습성을 보이며 자신을 무시한 이들만을 지칭했을 수도 있다. 경찰은 그의 기숙사 방에서 “부잣집 애들”, “방탕”, “기만적 사기꾼”이라는 글이 적힌 메모들을 발견했다. 비디오에서도 “너희는 그 모든 방탕한 것들로도 만족하지 못했다”며 자신이 지켜본 행동들을 가리키는 듯한 표현을 남겼다. 여덟살에 미국에 간 조씨한테 경제적·인종적 열등의식이 위험한 수준으로 치달았을 것이라는 짐작도 해 볼 만하다.


NBC방송 홈페이지에 공개된 조승희씨 동영상 일부

‘You’는 여자친구 아닌 상처 안긴 사람들
애초 조씨의 기숙사 방에서 “너(너희) 때문에 이 일을 한다”는 메모가 발견됐을 때는 “You”가 그의 여자친구를 뜻한다는 관측이 많았다. 그러나 그가 증오의 대상으로 삼은 여자친구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조씨의 ‘비디오 선언’에도 ‘너희(You)’가 자주 나온다. 특정인이나 집단을 구체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맥락상 일단 부자나 속물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아니라, 주변인들을 지칭했을 수도 있다. “너희는 누군가 너희 얼굴에 침을 뱉고 쓰레기를 처넣은 기분을 아는가?” “너희의 유희를 위해 조롱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혀 …” 등의 표현을 보면 그렇다. ‘너희’한테서 괴롭힘을 당했다는 표현도 자신이 경험한 특정한 사건이나 상황을 묘사했을 개연성도 있다. 스스로 지어낸 신이나 악마 등 초월적인 존재를 가리킬 수도 있다.


예수처럼…순교자인양…구세주인양…
조씨는 묵시록적인 서술로 예수처럼 ‘순교’할 것임을 밝힌다. “예수가 나를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했다”며 “너희 덕분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죽는다”고 했다. 조씨의 의식 속에 증오의 대상인 ‘너희’는 예수를 핍박한 세력이고, 자신은 예수처럼 그들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양이라는 논리가 존재한 셈이다. 많은 이를 한꺼번에 ‘심판’한 다음 ‘순교’하는 시나리오를 짠 것이다. 자신을 모세와 동일시한 점까지 보면, 자신이 구세주이거나 그 대리인이라는 착각에 빠진 성격이다.

조씨가 <엔비시>에 보낸 사진 중에는 양손에 권총을 쥐고 치켜든 장면이 있다. 무슬림 지하드(성전) ‘순교자’들이 거사 전에 기관총을 들거나 양옆에 세워놓고 사진을 찍고 비디오 촬영을 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이 신을 찬양하며 순교를 맹세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선언’을 읽어내려간 것도 지하드 전사들의 ‘유언 비디오’와 비슷하다.

조씨는 “에릭과 딜런과 같은 순교자”라는 표현도 썼다. 미국 콜로라도주 콜럼바인 고교에서 1999년 4월20일 총을 난사해 교사와 학생 13명을 사살하고 목숨을 끊은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레볼드를 가리킨다. 콜럼바인 고교의 두 학생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아 앙갚음하려고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조씨도 자신이 소외됐다는 점을 알리기 위해 이런 표현을 썼을 가능성에 무게를 더한다.

‘비장한 동기’…구체적인 계기는 안 드러나
조씨가 비장한 어조로 ‘거사’ 동기를 밝혔지만, 구체적인 이유를 대지 않아 이번에 공개된 비디오가 사건 전모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비디오에 보이는 망상적 표현들이 그가 실제 처했던 현실과 얼마나 연결되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미국의 정신병리 전문가들은 과거에 발생한 여러 집단살해 사건과 이번 사건의 유사성을 비교하면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은 여러 의문점을 제기한다. 애초 조씨의 여자친구로 알려졌던 에밀리 제인 힐셔가 1차 범행 희생자가 된 이유가 짐작하기 어렵다. 힐셔는 그의 여자친구가 아닌 것으로 밝혀졌고, 희생자들 중에는 그가 2005년에 괴롭혔다는 여학생 두 명이 빠져 있다. 조씨가 자신의 기숙사가 아닌 옆 동에서 1차 범행을 저지른 이유도 모호하다. 1차 범행 전에 소포를 부치는 게 ‘자연스러워’ 보이는데도 1·2차 범행 중간에 학교 밖 우체국으로 가 소포를 보냈다. 이제까지 집단 살해범들은 한 번에 한 장소에서 여러 사람을 희생시켰지만, 다른 장소에서 연거푸 범행을 실행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비슷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이본영 기자 e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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