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병사가 23일 친러시아 반군과 맞서는 동부 도네츠크 지방에 설치된 참호에서 잠망경으로 밖을 관찰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미국이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발트 3국 등 동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에 미군을 증강 배치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에 대응하려는 것으로, 미-러의 직접적 군사 대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22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회의에서 국방부 관리들이 조 바이든 대통령에게 동유럽에 미군 1천~5천명을 추가 배치하는 안을 보고했다고 전했다. 증파 병력 일부는 미국 본토에서 가고 나머지는 유럽의 다른 나토 회원국에서 이동하는 방안이 제시됐다고 한다. 이 신문은 미군 항공기와 함정 배치도 검토되고, 상황이 악화되면 파병 규모를 10배 늘리는 계획도 논의되고 있다고 했다.
미군의 동유럽 증파는 지난주 취임 1돌 기자회견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를 침공한다면 “미국은 폴란드, 루마니아, 기타 다른 나라에서 병력을 늘리겠다”고 경고했다고 밝혔다. 로이드 오스틴 미국 국방장관도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과의 통화에서 이런 의사를 전달했다.
특히 옛 소련 공화국들이었으나 지금은 나토와 유럽연합(EU) 회원국인 발트 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 미군을 배치할 수 있다는 말은 러시아에 대한 강도 높은 경고다. 러시아는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가능성을 이유로 침공 위협을 가하는데, 침공을 실행한다면 다른 쪽 국경에서 미군의 압박이 커지기 때문이다. 발트 3국 중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러시아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군사고문단을 파견한 미국은 22일에 이어 23일에도 탄약 등 무기를 공급했다. 또 우크라이나 상공에 정찰기를 띄워 국경에 배치된 약 10만명의 러시아군 동향을 감시하고 있다. 하지만 군사 원조는 한계가 있고, 나토 회원국이 아닌 우크라이나가 공격받을 경우 미국이 분쟁에 직접 개입하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발트 3국 미군 배치 검토는 러시아의 ‘형제국’ 벨라루스에 최근 러시아군이 배치된 것에 대한 맞대응 성격도 있다. 벨라루스는 남쪽으로 우크라이나, 서쪽으로는 나토 회원국인 폴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가 폴란드의 옆구리에 총구를 들이댄다면 미국도 발트 3국을 통해 같은 행동을 하겠다고 경고한 셈이다. 현재 폴란드에는 미군 약 4천여명이 있고, 발트 3국에는 나토 병력 4천여명이 주둔하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러시아에 대한 대응의 강조점이 외교에서 군사 측면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는 23일 방송된 <시비에스>(CBS) 인터뷰에서 “우리는 외교적 간여를 하고 있지만 방어력과 억지력 강화에도 아주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엔엔>(CNN)에 출연해서는 “한 명의 러시아군이라도 추가적으로 우크라이나에 침투한다면 우리와 유럽의 신속하고, 혹독하며, 단합된 대응을 촉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이 수출 통제라는 새 방식의 제재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공지능, 컴퓨터, 항공우주 산업에 필요한 반도체 등 첨단기술 관련 품목의 수출을 금지시켜 러시아의 산업 발전에 타격을 가한다는 구상인데, 유럽 및 아시아 동맹들과도 이를 논의하겠다는 것이다. 이 신문은 세계 1위 통신장비 업체 중국 화웨이를 곤경에 빠트린 것과 같은 방식의 수출 통제가 러시아에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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