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엔지니어링은 사명 변경 검토가 한창이다. 1991년 현재의 사명을 얻은 지 32년 만이다. 그 전에는 ‘코리아엔지니어링’란 이름을 설립 당시(1970년)부터 20여년간 써왔다. 방향은 대략 정했다. ‘엔지니어링’은 빼고 ‘인스파이어’(INSPIRE, 새로운 미래의 창조적 영감)·‘퍼스티브’(FIRST+-IVE, 최초·최고의 의미)·‘어헤드’(AHEAD, 앞선 기술력과 수행) 등의 영어 단어나 조합어를 섞는 방식을 검토하고 있다.
이 회사의 주력이자 매출 비중 100%인 ‘플랜트’ 기업 이미지를 빼는 모양새다. 실제 이 회사가 사명 변경 논의에 착수한 건 수소 등 ‘친환경 에너지’ 분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려는 상황과 맞닿아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11일 <한겨레>에 “미래 비전과 신사업 구상 과정에서 사명 변경도 함께 검토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수년 새 사명을 바꾸는 회사가 부쩍 늘었다. 한국예탁결제원 자료를 보면, 2021·2022년 두 해 동안 사명 변경은 매우 활발했다. 지난해 사명을 변경한 상장사는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21개사 포함 모두 104곳이며, 2021년에는 122곳이다. 2018년(80곳)과 2019년(95곳)에는 사명을 바꾼 상장사는 100곳을 밑돌았다.
박종호 숭실대 경영학과 교수는 “사명 변경의 목적과 동기는 다양하지만 내재된 궁극적 목적은 이윤, 매출액, 주주가치로 평가되는 경영성과 극대화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최근 부쩍 많은 사명 변경은 좀더 공통적인 배경이나 의도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룹 정체성·ESG 강조, 사업 다각화까지
산업 환경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겠다는 의지를 강조할 때 사명 변경은 손쉬운 선택지다. 기아의 사례를 보자. 이 회사는 2021년 ‘기아자동차’(또는 기아차)에서 현재의 사명으로 갈아탔다. ‘자동차’ 혹은 ‘차’란 음절을 떼어낸 모양새다.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사명 변경인 셈이다. 자동차를 뛰어넘어 도심내항공교통(UAM)과 같은 미래형 이동수단을 포괄하는 ‘모빌리티 기업’으로의 전환이란 꿈을 사명에 담아낸 모양새다. 더 이상 기아를 완성차 제조사로만 좁게 여기지 말라는 얘기다.
에스케이(SK)는 이에스지(ESG, 환경·사회책임·지배구조)를 전면에 앞세워 이미지 쇄신을 노린 경우다. 최태원 에스케이그룹 회장은 2019년 한 포럼에서 “기업 이름에 에너지나 케미칼이 들어간 회사가 우리에게 많다. 환경 파괴나 사회적 비판 대상인 기업으로 여겨지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후 에스케이 계열사들의 이름 바꾸기는 본격화됐다. 2021~2022년 에스케이건설 → 에스케이에코플랜트, 에스케이종합화학 → 에스케이지오센트릭, 에스케이루브리컨츠 → 에스케이엔무브로 잇따라 간판을 바꿔 달았다.
‘지향’을 넘어 이미 바뀐 사업 포트폴리오를 뒤늦게 사명에 반영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지주사 체제로 지배구조를 바꾸며 철강업에서 친환경 소재 그룹으로 거듭난다고 선언한 포스코그룹의 계열사인 포스코케미칼의 사명 변경에서 이런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이 회사가 지난 3월 새로 얻은 사명 ‘포스코퓨처엠’은 미래(Future)와 소재(Materials)·변화와 움직임(Movement)·경영(Management)의 이니셜 엠(M)을 결합한 것이다. 사명을 바꾸기 전에 이 회사는 이미 ‘에너지소재’(양극재·음극재등배터리소재) 부문 매출 비중이 절반(58.7%·2022년 기준)을 웃돌았다. 다만, 변경된 사명을 해외에서 등록하는 데 고민이 있다. 캐나다의 경우 사명에 사업 내용이 들어가도록 하는데 ‘퓨처엠’에는 사업 내용이 드러나지 않아서다. 게다가 프랑스어를 쓰는 캐나다 퀘벡주의 경우 영어 사명과 프랑스어 사명이 함께 들어가야 한다. 포스코퓨처엠은 “혼동의 여지를 줄이기 위해 여러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2022년 두산중공업이 두산에너빌리티로 사명을 바꾼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발전설비 제작·시공에서 가스터빈, 풍력, 태양광, 수소 등 친환경 에너지 분야 쪽으로 매출이 서서히 늘어나는 와중에 사명 변경이 이뤄졌다. 이 회사 관계자는 “‘무거울 중’ 글자 하나로는 우리 회사의 방향성은 물론 현주소를 다 담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정체성 강화’나 ‘새 리더십’을 강조하기 위해 사명을 바꾸기도 한다. 에이치디(HD)현대그룹은 지난해 3월 현대중공업지주의 사명을 에이치디(HD)현대로 변경한 뒤 HD한국조선해양, HD현대오일뱅크, HD현대인프라코어 등 계열사 사명 앞에 마치 ‘성’을 달아주듯 ‘HD’를 붙이는 작업을 단행했다. 공교롭게도 이런 변경은 HD현대의 대주주인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의 아들 정기선씨가 대표로 취임하면서 이뤄졌다.
2023년 1월 4일 ‘시이에스(CES) 2023’이 열리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에이치디(HD)현대 프레스컨퍼런스에서 정기선 에이치디현대 사장이 그룹 비전인 ‘오션 트랜스포메이션’(Ocean Transformation)을 소개하고 있다. HD현대 제공
장기적으로 기업 가치에 긍정적… 실질적 변화 뒤따르는지 지켜봐야
사명 변경에는 적지 않은 돈이 든다. 사내 의견 수렴은 물론, 외부 컨설팅 등의 절차를 거쳐야 하고 사명 후보군이 해외 시장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도 자문을 구해야 해서다. 시아이(CI·Corporate Identity), 간판, 직원 명함이나 서류 양식 교체, 미디어 광고에도 적지 않은 지출이 든다.
사명 변경 작업에 참여한 한 대기업 관계자는 “오래 일한 임원부터 일반 직원들까지 ‘우리 회사의 지향점은 뭔지’ ‘우리 회사 하면 생각나는 게 무엇인지’ 등을 조사했고, 영문 조합어가 외국에서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질까봐 외부 컨설팅회사에서 자문을 받았다. 수십개의 후보군을 추리고 추려 최종 결정을 하는 데 1년여가 걸렸다”고 말했다. 2005년 엘지(LG)유통이 계열분리로 지에스(GS)리테일로 이름을 바꿀 때 1800여개 편의점 간판을 바꿔 달고 내부 인테리어를 다시 하는 데만 약 100억원이 들었다는 언론 보도도 나온 바 있다. 기업분석기관 한국시엑스오(CXO)연구소의 오일선 소장은 “사명 변경에 따른 비용은 몇십억에서 몇백억까지 대중없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광고 효과도 발생하기 때문에 그 비용을 무조건 마이너스라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여러 의미를 부여하고 비용도 드는 사명 변경의 결과는 어땠을까. 기업 가치가 투영되는 주가 변화를 통해 사명 변경의 효과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해당 연구들을 보면 적어도 장기적으로는 주가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듯하다. 2010~2020년 사명을 변경한 215개 기업의 재무 흐름을 분석한 박정미 원광대 경영학과 교수는 상호 변경을 통해 주식시장에서의 자금 조달이 원활해져 기업들의 재무 안정성이 긍정적으로 변한 사례들을 확인했다. 이런 경향은 코스닥 시장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한다. 박 교수는 “2~3년 안에 상장 폐지 기미가 있는 기업이나, 인수·합병을 동반하는 기업의 사명 변경 경우를 제외하고, 사명 변경은 통상 기업이 뭔가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보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신호로 시장은 받아들인다. 해당 기업의 주가는 사명 변경 이후 그전보다 올라가 있었으며 시장 평균보다도 높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패만 바꾸고 내용물을 바꾸지 않는 경우도 있어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지적도 물론 있다. 2000~2016년 코스닥 기업 중 11개 기업이 6차례 이상 상호를 변경했는데, 그중 4개 기업은 상장폐지됐다(2018년 기준)는 분석 결과가 있다. 김종대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바이오’가 한창 뜰 때 이 업종을 추가해 공시하고는 주가만 올린 기업들의 사례도 목격됐다. 사명 변경을 했다고 무조건 투자해서는 안 되고 그에 맞는 혁신이 뒤따르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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