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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금융·증권

Fed 성공과 실패의 역사

등록 2019-05-10 16:23수정 2019-05-10 16:28

Weconomy | 곽현수의 '차 한 잔'
그래픽_김승미
그래픽_김승미

Fed, 달러 통화량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누굴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기자로부터 질문을 듣자마자 곁에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그린스펀 전 Fed(미국중앙은행) 의장이다. 대통령이 Fed 독립성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나타낸 일화다.

Fed는 세계에서 가장 힘 센 기관이다. 기준금리 결정을 통해 세계 곳곳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가장 우수한 두뇌 집단이기도 하다. Fed에서 일하고 있는 경제학 박사는 300명 이상으로 미국 기관 중 가장 많다. 비상한 두뇌를 활용해 통화정책을 구사하고 금융위기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Fed가 옳은 결정만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가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곤 했다. 대공황 때 통화 긴축으로 불황을 장기화했고 금융위기 초입에서 기준금리 인하를 주저했다. 금융시장 변동성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해 경제 주체들에게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기도 했다. 의장들은 실수에 가까운 언행으로 금융시장 변동성을 키우기 일쑤다. Fed는 1914년 출범 이후 100여 년 역사 중 성공과 실패를 반복 중이다. Fed가 그럼에도 영향력을 유지한 이유는 달러 통화량을 조절하는 유일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 중앙은행과 다른 독특한 구조

Fed 구조는 미국 역사만큼 독특하다. Fed는 다른 나라 중앙은행과 달리 민간에서 파생했다. 이유는 출범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은 1800년대부터 중앙은행 설립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의회는 중앙은행 존속을 시한부 허가했다. 미국은 각 주 독립성을 보장한 연방정부 형태인 관계로 중앙은행 설립 의견을 일치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농민 등 국민 다수는 중앙은행이 뉴욕과 필라델피아 지역 재계 이익만을 대변할까 우려했다. 중앙은행이 출범에 어려움을 겪는 동안 민간이 역할을 대신했다. 뉴욕어음교환소다.

민간 차원 은행 안정화 노력에도 이익 상충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윌슨 당시 미국 대통령은 공공이 신뢰할 수 있는 중앙은행을 설립하고자 했다. 과거 실패를 거울 삼아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를 워싱턴에 설치하되 12개 주요 도시에 지역 은행을 설립하는 아이디어다. 미국 전역 요구사항을 취합할 수 있었다. 각 지역 은행들은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제공하기로 했다. Fed에 민간 성격이 남아 있는 이유다.

이사회는 지역 연방준비은행 감독 지위를 가졌다. 지역 연방준비은행은 통화정책회의에서 워싱턴에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Fed는 의회 승인을 얻어 1914년 출범했다. 대공황을 맞기 전까지 별다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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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통화긴축이 침체 장기화

대공황은 Fed가 겪은 첫 시련이자 쓰라린 실패다. 통화정책을 중시하는 통화주의 학파는 대공황이 10년 이상 장기화한 원인을 Fed의 잘못된 통화정책에서 찾는다. 1976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이 대표 학자다. 버냉키 전 Fed 의장은 대공황 당시 통화정책이 지나치게 소극적이었다고 비판했다. Fed가 현대 중앙은행들과 달리 침체 국면에서 소극적이었던 원인을 당시 경제 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청산주의다. 청산주의는 1920년대 쌓인 경제적 과잉을 짜내야한다는 이론이다. Fed 내 다수 인사들은 디플레이션과 경기 침체를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과정이라 생각했다. 대공황 초기 은행 도산과 물가 하락을 방치한 이유다. Fed가 청산주의로 기울자 루즈벨트 행정부는 적극적 재정정책으로 총수요를 진작하고자 노력했다. 경제는 1933년부터 회복 조짐을 보였다.

물가는 1933년 금본위제 포기에 따른 통화량 증가로 상승했다. 디플레이션에서 탈피하려는 조짐이 나타나자 산업생산과 주요 경제지표 개선이 나타났다. 미국 경제는 회복하는 듯했다. 반전이 나타났다. 미국 경제는 1937년 다시 침체에 빠졌다. 대공황은 1937년 두 번째 침체(더블딥) 탓에 10년 이상 장기화했다. 두 번째 침체 원인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있으나 섣부른 통화긴축 탓이라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Fed가 시중에 공급하는 통화량인 본원통화는 1937~1938년 전년 대비 감소했다. 통화정책 긴축을 의미한다. 인플레이션 통제력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때 이른 통화긴축으로 이어졌다. 미국 경제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전까지 회복에 어려움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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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무부와 Fed의 동상이몽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뒤늦게 참전했다. 파병 시기는 1942년으로 전쟁 발발 후 3년 가까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지출은 가장 컸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지출한 전비는 참전국 전체 26.2%다. 소련과 영국을 합친 규모보다 크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 공장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재정적자는 최악이었다. GDP(국내총생산)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1943년 -26.9%에 달했다. 재무부는 안정적 전비 조달을 위해 Fed를 활용했다. 국채 발행 증가에 따른 금리 상승을 막기 위해 국채 매입 압력을 가했다. Fed 보유 정부 증권 규모는 1941년 말 22.2억달러에서 1945년 말 240.9억달러로 983% 증가했다. 재무부는 3개월 단기금리를 0.375%로 고정했고 장기금리는 2.5%를 하회하도록 제한했다.

재무부와 Fed는 전후 경제에 대한 견해 차를 겪었다. 재무부는 전쟁 종료에 따른 수요 감소로 1930년대 겪었던 불황 재발을 걱정했다. 실업률은 전쟁 기간 중 0%에 가깝게 하락한 상황이었다. 많은 제대 군인들이 고용 시장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할 경우 대공황 재림을 걱정할 수 있었다.

Fed는 반면 인플레이션을 걱정했다. 전쟁 중 막대한 규모의 국채를 매입한 탓에 본원통화가 급증한 상황이었다. 물가 걱정은 당연했다. 행정부가 전쟁 기간 중 물가 통제 정책을 썼다가 1948년 해제한 점도 물가 폭등을 촉발할 수 있었다. 상황은 Fed 손을 들어줬다. 물가는 급등한 반면 실업률은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미국은 냉전 기간 중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원하지 않았지만 실업률을 낮게 억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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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d는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독립성에 심각한 상처를 입었다. 1951년 의장 자리에 오른 윌리엄 마틴은 재무부로부터 독립을 원했다. 의회는 1951년 3월 4일 자유화 법 제정을 통해 통화정책 독립성을 법으로 보장했다. 대통령이 Fed 이사회 건물인 에클리스 빌딩에 방문조차 않는 전통도 이때부터다. 통화정책 독립성에 대해 시대마다 논란이 일지만 형식으로나마 독립을 보장한 조치는 주목할 만하다.

마틴 의장은 통화정책에만 너무 많은 짐이 몰리는 상황을 우려했다. 재정정책과 공조하지 않은 완화적 통화정책 요구를 묵살했다. 대쪽 같은 자세가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1969년 백악관에 입성한 닉슨 대통령은 부통령 시절 자신의 경기 부양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던 마틴 의장 교체를 원했다. 대통령에게 Fed 의장을 해임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마틴 의장 임기가 끝날 1970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마틴 의장 후임 아서 번즈는 최초 경제학 박사 출신 의장이다. NBER(전미경제연구소)에서 오랫동안 경기 사이클을 연구했다. Fed 의장에 오르기 전 아이젠하워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CEA) 의장을 역임했다.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은 Fed 의장이 되기 전 거치는 중요한 자리 중 하나다. 이 코스를 밟은 의장은 번즈 외에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 재닛 옐런이 있다.

번즈 의장 취임 당시 경제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1965년부터 1982년까지는 대인플레이션 시대(The Great Inflation)였다. 시대 한 가운데서 의장직을 수행해야 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65년 1%에서 1980년 3월 13.6%로 상승했다. Fed는 번즈 의장 임기 하에서 물가 제어에 실패했다. 물가 관리에 어려움을 겪기 시작한 때는 1960년대부터다. 당시 경제 사조와 관련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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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는 케인즈학파 전성시대였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는 케인즈학파 경제학자들로 잔치를 벌였다. 케네디 대통령 사후 임기를 계승한 린드 B. 존슨 대통령도 재정정책 예찬론자였다. 존슨 대통령은 경기 침체 시 추산한 재정승수를 적극 활용해 총수요 부족분을 미세조정 하려 했다.

정부는 케인즈 주장대로 침체 시 재정적자를 줄이지 않고 경기 회복 후 적자를 줄이겠다는 입장이었다.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1965년 존슨 대통령이 공개한 위대한 사회 정책으로 상승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쟁 수렁에 빠진 점도 재정적자 증가로 이어졌다.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존슨 대통령 임기 마지막 해인 1969년 -2.7%까지 늘었다.

적자를 용인한 재정정책은 물가를 자극했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케네디와 존슨 대통령 임기를 지나며 5%를 상회했다. 공화당 출신 닉슨 대통령 집권에도 재정적자를 용인하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1976년 GDP 대비 재정적자 비율은 -3.9%까지 상승했다.

물가가 1970년대 더욱 심각해진 이유

인플레이션은 1970년대 절정이었다. 케인즈가 실패한 이유는 수요 쪽 충격이 아닌 공급 쪽 충격이었다.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오일 쇼크다. 1973년과 1979년 두 차례 있었다. 유가가 물가 전반에 미치는 파급력은 컸고 휘발유, 경유뿐 아니라 음식료 등 필수품 가격 상승률도 높였다.

둘째 임금 상승률 폭등이다. 미국은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거치며 노동조합이 사회적 지지와 힘을 얻었다. 노동조합은 임금 상승률에 물가 상률을 즉시 반영할 수 있는 고용계약을 맺었다. 기업들은 임금 인상분을 가격 인상에 반영하면서 물가 상승 순환 고리에 빠졌다.

셋째 달러 평가 절하다.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개편했으나 1971년과 1973년 큰 변화를 겪었다. 미국은 재정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로 적정 보유 금의 1/3 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닉슨 행정부는 금 가격 상승 압력(달러 약세 압력)을 이기지 못해 1971년과 1973년 각각 8.6%, 10.0% 달러 평가 절하를 감행했다. 세계 각국은 달러에 대한 고정환율제를 포기했다. 달러 평가 절하는 물가 상승을 자극했다.

행정부 물가 정책은 실패했다. 닉슨 행정부는 물가 안정을 위해 물가통제를 택했다. 전쟁 상황에서나 있었던 물가통제는 억눌린 물가를 통제 후 폭등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물가 안정은 통화정책을 구사할 Fed 몫이었다. Fed는 물가보다 성장률 개선에 더 관심을 가졌다. 미국은 물가 상승에도 GDP 증가율 하락을 겪었다. Fed는 성장률을 택했다.

카터 대통령은 임기가 끝난 번즈 의장을 교체했다. 물가 관리 실패에 대한 문책성 인사는 아니었을 듯하다. 후임 윌리엄 밀러 의장도 물가 관리에 실패했다. 물가에 관심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밀러 의장은 물가보다 경기 침체 가능성을 더 두려워했다. 의장으로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두 가지나 남겼다.

첫째 최초 FOMC 소수파 의장이라는 불명예다. 밀러가 경제학 석학이 아닌 기업 CEO 출신이라는 배경으로 Fed 내 신임을 얻지 못했다. 금리 결정에서도 발언을 금지했다. 금리 결정에서 ‘예’ 또는 ‘아니오’로만 답해야 했다.

밀러는 FOMC에서 최초로 반대표를 던진 의장이다. 인플레이션이 두 자릿수였는데도 금리 인상에 반대했다. FOMC는 사법부나 의회와 다르게 만장일치를 추구하는 전통을 가졌다. 다른 목소리를 내면 정책 일관성이 떨어져 효과도 감소하기 때문이다. 많은 의장들이 FOMC 구성원들로부터 지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밀러 의장과 구성원이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 정책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둘째 최단임 의장이라는 점이다. 밀러 재임 기간은 1978년 3월 8일부터 1979년 8월 6일로 17개월에 불과하다. 카터는 밀러를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다. 금리 인상에 반대했다는 언론 보도가 결정적이었다. 카터는 재선을 위해 물가를 억제하려는 자세를 보여야 했다. 의장 임기는 법으로 보호하기 때문에 사임밖에 방법이 없었다. 카터는 밀러를 재무장관으로 지명해 자연스러운 사임을 유도했다. Fed는 밀러 시대에 혼란스러웠다. 카터 대통령은 Fed 구성원들과 뉴욕 은행 업계 인사들에게 두루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을 의장으로 지명하기를 원했다. 물가 관리에서는 매파를 물색했다. 적임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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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6일, 토요일 밤의 학살

폴 볼커 의장은 경제학 박사 출신 석학은 아니었으나 Fed 내에서 리더십을 가졌다. 화려한 경력 덕이다. 뉴욕 Fed 이코노미스트로 경력을 시작해 월스트리트와 재무부에서 경력을 이어갔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 공화당 행정부에서 재무부 국제 통화정책 담당 차관을 지냈다. 1975년부터 4년간 뉴욕 Fed 총재를 역임했고 1979년 8월 의장 자리에 올랐다.

볼커 의장은 인플레이션 파이터로 유명하다. 난세가 영웅을 만들 듯 시대가 인플레이션 파이터를 만들었다. 1979년 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1.4%였다. 1980년 초 13.6%까지 상승했다. 볼커는 전임과 달리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1979년 8월과 9월 FOMC에서 연방기금금리를 각각 50bp 인상했다. FOMC 인사들은 목표금리 인상에 동의했으나 점차 반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볼커는 리더십 손상을 입으면 FOMC를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볼커는 1979년 10월 6일 토요일 밤 통화정책 목표 변경을 기습 발표했다. 연방기금금리가 아닌 M1(협의의 통화) 증가율을 통화정책 수단 목표로 제어하기로 했다. 재할인율은 12%로 100bp 인상했다. 연방기금금리 목표를 제시하지 않고 통화량만 제어한다는 정책은 은행 간 익일물 대출 금리 인상을 얼마든 용인하겠다는 의미다. 금융시장은 경악했다. 연방기금금리는 볼커 의장 취임 전 10.5%에서 1981년 7월 20% 이상으로 상승했다. 이자율을 무시하고 통화량만 정책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는 통화주의학파 견해를 전격 수용한 결과다.

볼커를 통화주의학파로 분류하려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통화주의를 지지하려는 듯한 저술이나 발언도 없었다. 통화량 목표제를 1982년 10월 3년 만에 사실상 종료했다. 볼커는 통화주의학파가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끝내기 위해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잠깐 빌려 쓴 것에 불과하다. 효과는 컸다. Fed는 마침내 인플레이션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볼커는 인플레이션과 싸움에서 승리했으나 첫 임기 4년간 두 차례 침체를 겪는 등 상처도 컸다. Fed는 침체에도 불구하고 볼커 시대 8년을 거치며 인플레이션을 확실하게 관리한다는 이미지를 굳혔다. 볼커가 남긴 유산은 다음 시대에서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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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는 그린스펀 시대에서 안정적으로 성장 구가

그린스펀은 Fed 의장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눈부신 성공을 거뒀고 임기도 길었다. 1987년 8월 11일부터 2006년 1월 31일까지 18년 반 동안 의장 자리에 있었다. 마에스트로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단원들은 FOMC 구성원이다. Fed 의장에게 중요한 덕목은 리더십이기 때문에 별명이 거장이라면 더 이상 칭찬은 없을 듯하다. 의장이 리더십을 잃을 때 통화정책도 신뢰를 잃는다. 그린스펀이 FOMC에서 보인 모습은 거장에 견줄 만했다. 중요하게 여긴 사안은 확실하게 정책으로 구현했다. 본인이 얻은 명성과 의장 뜻을 존중하는 이사회 전통 덕이다.

기자회견 및 의회 증언에서 모호한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통화정책 관련 지나치게 자세한 언급은 피했다. 차기 의장들이 실수에 가까운 언행으로 금융시장 변동성을 키웠던 점을 떠올리면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금융위기는 그런스펀에 대한 평가를 크게 바꿨다. 버냉키가 금융위기를 극복한 현자라면 그린스펀은 위기를 간과했던 의장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금융위기는 대공황 이후 가장 큰 위기였다. 공과가 명확하다.

가장 큰 공은 경기 진폭을 낮추고 물가를 낮게 유지했다는 점이다. 미국 실질 GDP 증가율 표준편차는 1950~1986년 4.5%를 기록했다. 의장 취임 이후에는 2.3%로 하락했다. 그린스펀 시대 경기 진폭은 대체로 ±1 표준편차 내에서 등락했다. Fed는 거시경제 안정이라는 중앙은행 제1 목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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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를 최우선 한다는 Fed 전통 확립

개인 자질도 뛰어났다. 그린스펀이 거장 칭호를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기준금리 결정에서 능력을 유감 없이 발휘했기 때문이다. 연방기금금리를 중요 정책 수단으로 여겼다. Fed는 통화량 목표제를 1993년까지 유지했다. 통화량을 실질적 목표로 삼았던 기간은 1979년 10월부터 1982년 10월까지 3년에 불과하다.

나머지 기간은 연방기금금리를 중시했다. Fed는 1993년 7월 더 이상 통화량 목표제를 운영하지 않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Fed가 통화 관리 목표를 1987년 1월 기존 M1에서 M2로 목표를 변경했으나 여전히 통화량이 급격히 변동했기 때문이다.

그린스펀은 금리 정책에 있어 미세 조정을 선호했다. 이른바 그린스펀의 아기 걸음마(Greenspan’s baby step)다. 긴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기준금리 변동폭을 25bp 또는 50bp로 줄여 최신 경제 지표를 확인한 뒤 정책을 신중하게 구사했다.

9·11 테러와 같은 경제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사건이나 신용 위기 가능성을 포착할 경우 기준금리 인하 폭을 크게 해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자산 버블 대응을 위한 통화정책 구사에 반대했으나 일단 버블이 붕괴하면 수습을 위해 기준금리를 빠르게 인하했다.

그린스펀은 금리 결정에 테일러 준칙 활용을 선호했다. 테일러 준칙을 따를 경우 인플레이션에 직접 대응하게 된다. 테일러 금리는 GDP가 잠재 수준일 때 인플레이션 2%를 상회하는 백분율에 대해 0.5%씩 상승한다. 리치몬드 Fed는 2007년 보고서에서 그린스펀 시대 선호 물가가 핵심 소비자물가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Fed는 테일러 준칙 활용으로 전대에 이어 물가 제어를 가장 우선한다는 전통을 만들었다. 그린스펀 재임 기간 물가 상승률 진폭이 줄어들면서 기대 인플레이션 안정화에 영향을 줬다. 가계와 기업은 공급 불안에 따른 유가 상승에도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크게 높이지 않았다. Fed가 좌시하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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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스펀 과오는 자산 버블을 방치했다는 점이다. 버블과 Fed 역할에 대해 다양한 시각이 있다. 한 축은 자산 버블을 꺼트리는 건 Fed 몫이 아니라는 시각이다. 다른 한 축은 통화정책 목표가 거시경제 안정에 있는 만큼 금리를 통한 버블 방지가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매파와 비둘기파는 자산 버블에 대한 시각도 다르다.

그린스펀은 버블 대응이 Fed 몫은 아니라는 전자에 해당한다. 버블을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은 다른 경제 주체에 피해를 줄 수 있다. 기준금리가 사회 각 부문에 미치는 영향이 광범위하기 때문이다. 버냉키 등 후임 의장들도 공통적으로 견지했다. 그린스펀은 버블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이들에게 억울함을 느꼈을 듯하다.

매파는 그린스펀이 장기금리를 지나치게 오랜 기간 낮게 가져갔다고 비판한다. 장기간 낮은 금리는 투자자들에게 더 높은 위험을 감수하도록 만든다. 금리는 차입자에게 비용이지만 투자자에게 수익률이다. 투자자들은 장기간 낮은 수익률 탓에 안전 자산 외 다른 자산으로 시각을 돌린다. 자산 버블이 시작하는 순간이다. 적정 저금리 기간이란 존재하지 않지만 결과만 보면 버블이 있었다. 주식과 부동산이다.

장기금리가 낮았던 이유가 Fed 탓 만은 아니다. 그린스펀은 낮은 장기금리를 수수께끼 같다고 말했다. Fed는 장기금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책 수단을 갖고 있으나 사용한 바 없다. 그린스펀을 향한 책임 소지는 투자자들이 과도하게 위험을 감수하고 있음에도 은행 감독을 충분히 이행하지 않았던 점에 국한한다.

그린스펀 시대 Fed와 금융시장 간 관계는 볼커 때와 크게 달랐다. 볼커는 인플레이션을 통제하기 위해 통화량 목표제를 실시하며 금융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월스트리트 경력이 길었지만 금융시장 가격 하락에 크게 관심 두지 않았다. 그린스펀은 반대였다. 금융자산 대표 격인 주가 하락에 민감했다. 주가 하락이 의미하는 금융회사 자산 감소나 가계 부 감소가 경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항상 고민했다.

1930년대 청산이론을 견지했던 Fed 인사들이 대공황 장기화에 일조했다면 그린스펀은 신용위기 조짐조차 지우고 싶어했다. Fed가 금융시장 반응을 중시하면서 금융안정에 일조했으나 투자자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다. Fed가 주가 하락을 방어하리라는 믿음이다. 잘못된 믿음은 블랙 먼데이부터 시작했다.

그린스펀 풋과 대마불사

블랙 먼데이는 그린스펀 취임 후 두 달 만에 발생했다. S&P 500은 1987년 10월 19일 하루 동안 20.5% 하락했다. 그린스펀은 긴급 유동성 지원을 밝혔다. 실효금리는 10월 19일 7.61%에서 11월 4일 5.69%로 192bp 하락했다.

뉴욕 연준은 관할 은행들에게 마진 콜에 대응할 수 있도록 증권사 대상 대출 두 배 증액을 주문했다. 그린스펀과 Fed 대응은 적절했다. 주식시장에서 갑자기 발생한 위기가 실물로 번지는걸 막았기 때문이다. Fed는 한편으로 주식시장에 과민 반응한다는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실물위기가 아닌 파생계약이나 알고리즘 매매 증가에 따른 주가 하락이 블랙 먼데이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Fed가 증시 안정을 위해 개입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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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9월 발생한 LTCM(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 파산 사건도 투자자들에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LTCM은 1998년 8월 러시아 모라토리엄으로 파생 포지션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문제는 대부분의 월스트리트 투자은행이 LTCM에 레버리지를 제공했고 일부는 포지션까지 열었다는 점이다. LTCM이 파산할 경우 투자은행 자본이 부실화할 우려가 있었다. 실제로 당시 세인트루이스 연준 금융스트레스 지수는 급등하며 유동성 경색 조짐을 보였다. S&P 500은 위기 중 19.3% 하락했다.

Fed는 연방기금금리를 1998년 9월 28일 5.50%에서 11월 17일 4.75%까지 세 차례에 걸쳐 75bp 인하했다. 뉴욕 Fed는 LTCM 위험 노출 은행을 대상으로 36.3억달러 규모 펀드를 조성해 대응했다. LTCM은 주식 매수 기회였다. S&P 500은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투자자들은 증시 위기 때마다 Fed 개입을 확신했다.

LTCM은 높은 수익을 위해 레버리지를 일으켰고 대규모 손실을 본 사건이지만 투자자들은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대공황 때 청산이론은 극단적이었기 때문에 문제였지만 LTCM 투자자 구제는 도덕적 해이를 키울 수 있었다. 경제에 미칠 영향이 클수록 파산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 선례도 남겼다. 그린스펀은 이후에도 규제에 소극적이었다. 장기 저금리와 미진했던 규제가 금융위기로 번졌다.

버냉키의 세 가지 독특한 견해

버냉키는 금융위기를 이겨낸 의장으로서 세 가지 중요한 견해를 가졌다. 경제사와 대공황을 전공하면서 중앙은행 본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첫째 최종 대부자로서 Fed 역할을 강조했다. 버냉키는 여러 차례 강연과 저술 활동을 통해 중앙은행은 최종 대부자로서 존재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은행이 위기 상황에서 우량한 담보만 제시할 수 있다면 대출을 아낌없이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공황이 단순한 주가 하락이 아닌 전례 없는 장기 불황으로 이어졌던 원인을 은행 연쇄 도산을 방치했기 때문으로 여겼다.

버냉키 견해에 따르면 Fed 역할은 최종 대부자로서 유동성 제공과 적절한 통화량 공급이다. 버냉키는 대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정책으로 금본위제 포기를 꼽았다. 미국은 1933년 금본위제 포기로 달러 가치를 40% 가까이 절하하며 통화를 공급한 바 있다. 버냉키는 리먼 사태를 겪으며 최종 대부자와 통화량 공급을 정책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둘째 비전통적 통화정책 구사를 선호했다. 버냉키는 2002년 강연을 통해 중앙은행 정책금리가 제로로 떨어져도 통화정책 수단 고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중앙은행은 정책금리를 통해 단기금리를 조절하지만 중요한 금리는 장기금리이며 여전히 장기금리를 조절할 수단이 있다는 견해를 드러냈다. 자산 매입 프로그램을 예로 들었다. 중앙은행이 자산 매입으로 시중에 통화를 공급할 수 있으며 장기금리를 떨어트려 투자와 소비를 촉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셋째 물가안정목표제다. 버냉키는 중앙은행이 인플레이션 목표를 설정하는 것으로도 인플레이션 기대를 자극할 수 있다고 믿었다. 중앙은행이 물가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경제 주체들에게 통화정책을 빠르게 변경하지 않고 장기간 유지하겠다는 신호를 전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목표 인플레이션으로 1~3%를 선호했다.

금융위기를 대공황 이후 최악의 침체로 만든 원인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화에 따른 부동산 금융시장 붕괴가 아니다. 투자은행이 과도하게 복잡한 파생상품을 개발하고 연기금, 은행 등 투자자들이 큰 경계심 없이 투자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신용평가 기관들은 파생상품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고 보험사는 파생 계약을 기초로 상품을 팔았다. 각 단계 시장 참여자들이 위험을 과도하게 떠안았던 배경은 장기 저금리 탓일 가능성이 높다.

부동산은 실물자산과 투자 대상 중 하나로서 수요 공급과 모기지 금리, 인구 구조 등에 영향을 받는다. 부동산 가격은 오를 수도 내릴 수도 있다. Case-Shiller 미국 주택 가격은 1998년부터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하락을 시작한 시점은 버냉키가 의장에 오른 직후인 2006년 4월이었다. 주택 가격은 이후 몇 달간 상승하기도 했으나 2007년 3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연속 하락했다. 부동산 가격 하락에 따라 신용상태가 우량 하지 않은 대출부터 부실화했고 연계한 파생상품이 손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위기가 수면위로 드러났다.

2007년 8월 9일 프랑스 은행 BNP 파리바가 미국 서브프라임 MBS를 보유한 투자 펀드 중 세 곳에서 현금 인출을 금지했다. MBS 잠재 매입자들이 나타나지 않아 유동성을 측정할 수 없으므로 자산 가격을 평가할 수 없었다.

파리바 조치 이후 MBS를 보유한 투자자들이 일시에 자산을 매각했다. MBS 가치는 순식간에 급락했고 비우량 대출뿐 아니라 프라임 대출도 적절한 평가를 받을 수 없었다. Fed는 서브프라임 대출 규모가 전체에 비해 작고 은행 자본 규모가 손실을 상쇄할 만큼 크며 연방예금공사가 위험을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1920년대 초 자주 겪던 뱅크런 가능성을 낮게 봤다는 의미다. 실상은 달랐다.

1930년대 미국은 예금자보호 제도를 통해 뱅크런을 막았으나 2007년 금융시장은 예금자보호 없이 은행 자금 조달용 시장이 성행했다. 단기 금융시장이다.

금융회사나 기업들은 과거와 달리 단기 금융시장에서 자금조달을 늘렸다. 레포(환매조건부 채권 매매), MMF(단기자금시장펀드), ABCP(자산담보부기업어음) 등이다. 기업은 레포를 통해 만기가 최단 하룻밤으로 짧은 담보대출을 이용할 수 있었다. 레포에서 담보는 국채, MBS, 회사채 등 금융자산이다.

단기 금융시장에서 담보 역할이 중요하다. 단기 자금 공급자들은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지 않아도 담보를 통해 보호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자금 공급자들은 담보 중 하나인 MBS가 서브프라임 부실화에 따른 가치 하락을 겪으면서 위험을 인식했다. 지급 기일이 짧아지고 요구 담보가 커졌다. 단기 금융시장에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재무 상태가 나쁜 기업들이 징벌적으로 높은 금리를 감당해야 했다. 연방기금금리가 FOMC 목표 금리를 상회하기 시작했다. Fed는 유동성 주입을 위해 8월 17일 재할인율 25bp 인하와 투자은행 대상 유동성 대출 창구를 열었다.

Fed 조치에 금융시장은 회복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주가는 다시 상승했고 실물 지표들이 나빠지려는 조짐은 없었다. 문제는 투자은행들이 CDO 등 문제가 된 파생상품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터다. 대규모 손실을 기록할 경우 자본잠식에 빠져 도산할 우려가 있었다.

단기 금융시장이 다시 경색 조짐을 보였고 투자은행들이 보유한 자산 가치는 폭락했다. Fed는 최종 대부자 원칙에 따라 회수할 자산이 있다고 평가한 베어스턴스를 2008년 3월 JP모건에 매각 주선하고 290억달러 대출했다. 리먼 파생 계약 규모는 베어스턴스보다 두 배 컸으나 담보가 충분하지 않아 9월 15일 도산을 방치했다. 리먼 파산으로 MMF 시장에서 자금이 급격하게 유출됐다.

금융회사들은 단기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웠다. 유동성 경색 정도를 나타내는 Ted 스프레드(3개월 리보 - 3개월 국채 금리)는 324bp까지 상승하는 등 유동성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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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냉키의 대응 1) 최종 대부자 역할과 제로 금리

Fed 대응은 단기 금융시장 지원부터 시작했다. 리먼브라더스 파산으로 21세기형 뱅크런이 나타났다. 투자자들은 유동성 경색 위험이 커지면서 자신들이 투자한 단기자금 펀드부터 자금을 인출했으나 그 후 모든 MMF로 확산했다. 상대가 은행만 아니었을 뿐 뱅크런과 속성이 같았다. 펀드 회사들은 평소에 자산이 충분했으나 시스템 우려가 커진 상황이기 때문에 자산을 적정하게 평가받지 못했다.

Fed와 재무부는 단기 금융시장 재건을 위해 빠르게 협업했다. 재무부는 MMF에 대해 한시적 지급보증을 결정했다. MMF는 수익 배당형 상품으로 예금자 보호 대상이 아니었으나 재무부는 단기 금융시장 재건 필요성을 인식했다. Fed는 유동성 보장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Fed가 은행들에 자금을 대출하면 은행들이 이 자금을 활용해 MMF 내 자산을 매입하는 조치다. 펀드사들은 유동성 보장 프로그램을 활용해 투자자들 환매 요구에 맞춰 자금을 상환할 수 있었다. 자금 상환 우려가 줄자 하루 천억달러 내외였던 자금 유출이 10% 수준으로 감소했다.

버냉키의 대응 2) QE1, QE2

버냉키 의장은 평소 갖고 있던 소신을 현실에 접목할 기회를 얻었다. 연방기금금리가 제로 수준인 관계로 비전통적 통화정책 수단을 떠올렸다. 시장에 직접적으로 유동성을 주입하는 양적완화 조치다.

양적완화 목표는 장기금리 하락이다. Fed는 단기금리를 조절하지만 투자와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 금리는 장기금리다. 단기금리를 장기간 낮게 유지하겠다는 말로도 장기금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나 기다릴 시간은 많지 않았다. 금융위기는 실물 경제위기로 확산하는 중이었다. 비농가고용자 수는 2008년 2월부터 감소하기 시작해 12월까지 356만5천명이 직장을 잃었다. 2008년 12월 실업률은 7.3%였다.

Fed는 2008월 11월 25일 6천억달러 규모 MBS와 정부 보증 기관 채권 매입 계획을 발표했다. MBS를 매입하기로 한 이유는 직접적으로 부동산 경기를 부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Fed는 2009년 3월 16일 MBS 매입 규모를 7500억달러로 확대했다. 국채도 향후 6개월간 3천억달러를 매입하기로 했다. Fed는 QE1 기간 동안 주택 기관 회사채와 MBS 1조2500억달러, 국채 3천억달러를 매입했다.

QE2는 2010년 11월 3일 공개했다. 2010년 11월부터 2011년 6월까지 8개월 동안 매당 750억달러 국채를 매입하는 계획이다. Fed는 QE2를 통해 6천억달러 국채를 추가 보유하게 됐다. QE2는 MBS 매입을 배제한 관계로 순수 장기금리 인하를 목적으로 한 조치다. QE2를 실시한 배경은 실물 경제 회복 속도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0년 11월 실업률은 9.8%로 개선 기미가 없었고 핵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7%로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판이었다. 이에 앞서 유로존이 재정 위기를 보이면서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QE2 필요성은 충분했으나 Fed는 안팎에서 비판에 시달렸다. 미국 내부에서는 Fed가 양적완화로 비대해진 대차대조표를 통제하지 못해 인플레이션 위기를 겪을 수 있다고 했다. 외부에서는 Fed가 인위적 달러 평가절하에 나섰다고 공격했다.

버냉키의 대응 3) 오퍼레이션 트위스트

Fed 대차대조표는 두 차례 양적완화를 통해 2조달러 증가했다. 미국 경제는 양적완화 조치에도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11년 8월 신용등급 강등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유럽에서는 재정위기가 시작했다. 주택 가격은 여전히 낮았다. 버냉키 의장은 2011년 4월 조심스레 경기 낙관론을 펴기도 했으나 QE2 종료와 함께 성장 기대도 시들었다. 추가 부양이 필요했다.

Fed는 QE3를 섣불리 시작할 수 없었다. QE2 발표로 역풍을 맞았고 FOMC 내부에서도 비대한 대차대조표 통제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인사들이 있었다. 버냉키는 FOMC와 이사회에서 지지받지 못할 정책을 강행할 수 없었다.

버냉키 의장은 명목 GDP 목표제 도입을 검토했다. 성장률과 물가가 목표치를 미달한다면 단기금리를 장기간 낮게 가져가겠다는 신호를 시장에 줄 수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 프레임 워크를 바꾸는데 부담을 느껴 정책으로 구현하지 않았다. 명목 GDP 목표제는 인플레이션 통제를 최우선 한다는 Fed 전통을 흔들 수 있었다.

버냉키는 결국 OT(오퍼레이션 트위스트)를 선택했다. 2011년 9월 FOMC에서 발표했다. OT는 장기금리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만기 6~30년 국채를 4천억달러 매입하고 같은 규모 단기 국채를 매도해 재원을 마련하는 정책이다. 대차대조표 규모를 키우지 않고 자산 구성만 바꿔 장기금리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Fed는 만기일 연장 프로그램(Maturity Extension Program)이라는 용어를 선호했으나 모두가 OT로 불렀다. 단기채 매도로 단기금리가 오를 가능성도 있었으나 상당 기간 제로 금리를 유지하겠다는 성명서 내용을 통해 금리 상승을 억제했다. 실제로 OT를 실시했던 2011년 9월부터 2012년 6월 말까지 단기금리 변동은 미미했다. Fed는 2012년 1월 FOMC에서 저금리를 최소 2014년 후반까지 유지하겠다는 내용으로 단기금리를 낮게 가져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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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냉키의 대응 4) 물가안정목표제

버냉키 의장은 자신의 오랜 꿈을 현실화했다. 물가안정목표제다. Fed 이사 자리에 오른 2002년부터 물가목표제 주장을 펼쳤으니 10년 만에 현실화한 셈이다. 그린스펀 의장 설득에는 실패했으나 자신이 직접 의장 자리에 올라 뜻을 관철했다.

버냉키는 물가안정목표제 도입으로 통화정책 투명성을 제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금융위기 이후 회복 과정에서 물가 기대가 낮았기 때문에 정책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다. 경제 주체들은 물가가 Fed 목표치에 도달하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의회에서 일부 반대 의견이 있었다. 근거는 Fed가 물가 목표를 제시할 경우 다른 한 축인 고용을 신경 쓰지 않겠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Fed는 물가안정목표제를 발표하는 성명서에 고용 극대화를 함께 추구하기로 하며 반대 측을 잠재웠다. 물가안정목표제는 2012년 1월 FOMC에서 공개했다.

중앙은행이 물가안정목표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 물가 목표 공표다. Fed는 PCE(개인소비지출) 물가를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고 버냉키 의장은 물가안정목표로 2%를 제시한 바 있다. 경제 참여자들은 물가 목표 공표로 통화정책 불확실성을 덜 수 있었다.

둘째 목표 인플레이션을 이행하리라는 믿음이다. Fed는 이미 볼커와 그린스펀 의장을 거치며 인플레이션을 우선으로 한다는 믿음을 경제 주체들에게 심었다. Fed는 또한 법적으로 행정부로부터 독립한 상태이기 때문에 물가 목표를 이행하기 위해 외압에 굴하지 않으리라는 기대도 받았다.

셋째 미래 인플레이션율 예측이다. 중앙은행은 다양한 정보를 종합해 미래 인플레이션율을 예측하고 목표치에 부합하도록 통화정책을 구사한다. 경제 주체들에게 미래 인플레이션율 예측치를 공개해 통화정책에 대비하도록 하는 효과도 있다. Fed는 2012년부터 점 도표(Dot plot) 공개를 통해 PCE 물가, 실업률, GDP 증가율, 연방기금금리 예측치를 1년에 네 차례 공표하고 있다.

버냉키의 대응 5) QE3

미국 경제는 회복기 진입 후 3년이 지난 2012년에도 부진했다. Fed는 당시 완전 고용 실업률을 5.5%로 추산했으나 2012년 1월 실업률은 8.3%로 괴리가 컸다. 당시 점 도표에 따르면 2014년까지도 실업률은 6.7~7.6%를 등락하리라 예상했다. PCE 물가는 2014년에도 2%를 하회하리라 전망했다.

전망은 6월 FOMC에서 더 악화했다. 2014년 실업률을 7.0~7.7% 등락을 전망했고 PCE 물가도 여전히 2%를 하회하리라 예상했다. 무언가 대책을 필요로 했다. Fed는 2012년 6월 만료 예정이던 OT를 연말까지 연장했다. OT 연장으로 장기국채를 2670억달러 추가 매입할 수 있었다. Fed는 보유 단기국채를 거의 소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OT를 더 연장할 수 없었다.

8월 실업률은 8.1%였다. 버냉키는 잭슨 홀 미팅에서 고용 상황이 심각한 우려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고 강한 어조로 설명했다. 투자자들은 QE3가 임박했음을 짐작했다. 반대파 명분은 충분치 않았다. Fed는 9월 FOMC에서 QE3를 발표했다. 매월 MBS 400억달러 매입을 결정했다. OT로는 매월 국채 450억달러를 매입했다.

QE3가 앞선 두 차례 QE와 달랐던 점은 종료 시점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QE3를 무제한 양적완화로 부르던 이유다. 버냉키는 고용 전망이 뚜렷하게 개선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증권을 매입하고 추가 정책까지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QE3는 실패할 경우 통화정책 신뢰성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Fed는 OT 종료 후 국채를 매월 450억달러 매입하겠다고 발표했다. Fed 대차대조표는 매월 850달러씩 늘어날 예정이었다. 다행히 효과가 있었다.

QE3는 부동산 경기 회복과 고용 시장 회복에 기여했다. 2013년 말 실업률은 6.7%까지 하락했다. 2013년 한 해 동안 일자리 230만개가 새로 생겼다. 2013년 말 점 도표에서는 3년 후에도 물가는 목표 수준에 미달하리라 봤지만 실업률은 5%대 초반을 등락하리라 예상했다. 버냉키는 QE3를 정상화할 때 흔들림은 있었으나 2013년 9월부터 완만하게 자산 매입 속도를 줄일 수 있었다.

버냉키와 미국은 성공했을까

버냉키가 Fed 의장 자리에서 보였던 정책은 대공황과 달랐다. Fed는 과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최종 대부자 역할로 단기 금융시장 경색을 빠르게 완화했고 온갖 비판에도 통화 공급을 위해 세 차례 양적완화를 시행했다. 버냉키 의장이 금융위기를 잘 극복했는지에 대해서 각자 시각 차가 존재하지만 투자자 입장에서는 금융위기를 잘 극복한 의장으로 기억할 듯하다.

S&P 500 흐름은 금융위기 발생 이후 20개월 간 주가 흐름이 대공황 당시와 비슷했다. 주가는 20개월 만에 고점 대비 60% 내외 하락했다. 이후 행보는 달랐다. S&P 500은 대공황 이전 주가 고점을 회복하는데 25년을 소요했다. 대공황 이전 주식을 산 사람들은 1954년 8월에야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다. S&P 500은 금융위기 때 67개월 만에 이전 고점을 회복했다. Fed가 대공황과 달리 금융위기 때 통화정책을 포기하지 않은 덕에 침체가 장기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화정책이 달랐던 결과다.

실물 경제 회복도 증시 패턴과 유사했다. 산업생산 지수는 금융위기 당시 18개월 만에 고점 대비 17.3% 하락했으나 이후 완만하게 상승해 78개월 만에 고점을 회복했다. 대공황 당시에는 89개월 만에 이전 고점을 회복했으나 감소 폭이 고점 대비 53.6%로 컸다.

Fed 통화정책은 금융위기 대응 과정에서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도 우수했다. 미국 실질 GDP는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회복이 빨랐다. 2018년 미국 실질 GDP는 2007년 4분기와 비교했을 때 19.1% 증가했다. 11년 동안 19% 성장하는데 그쳤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괄목할 만하다.

같은 기간 영국과 유럽 실질 GDP 증가율은 각각 12.2%, 7.8%였다. 일본은 5.9%로 주요 선진국 중 가장 낮았다. 국가마다 잠재성장률과 인구 구조, 생산성 등 장기 요소 차이를 무시할 수 없으나 통화정책 차이도 컸다. 유럽과 일본도 양적완화 조치를 시행했으나 2008년 시작한 미국보다 5~6년 늦었다. Fed는 대공황 때와 달리 금융위기에서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신한금융투자 투자전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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