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학자들 사이에서는 최근 필립스 곡선이 논쟁 거리다. 실업률과 임금 상승률, 실업률과 물가 상승률 사이 역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필립스 곡선의 실용성이 타격을 받고 있다. 미국의 실업률이 최근 10년 이내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지만 임금과 물가 상승률은 여전히 기대치에 못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기대치는 임금 상승률은 3%, 물가 상승률은 2%이지만 최근 임금 상승률(시간당 임금 및 주간 소득 증가율의 평균)은 2.3%, 물가 상승률(개인소비지출 기준 헤드라인 및 핵심 물가 평균)은 1.5%에 그쳤다.
1987년 이후 30년간 실업률과 임금 상승률 간에는 -0.6의 상관계수가 존재해 실업률 하락이 임금 상승률로 연결되는 모습이 확인된다. 그런데 기간을 좁혀 최근 4년간만 보면 다르다. 둘 간 상관계수는 거의 0에 가깝다. 실업률 하락이 임금 상승으로 연결되고 있지 않다는 의미다. 필립스 곡선에 대한 신뢰가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림1> 미국 실업률과 임금/소득 상승률
그 이유는 두가지다. 우선 생산성 저하다. 근로자와 기업 간 임금 협상에서 임금 상승의 수치적 근거는 생산성과 물가 상승률이다. 대개 기업은 근로자에게 물가 상승률을 보전해주고 여기에 생산성 증대 부분을 얹어주게 돼 있다. 문제는 이 생산성을 측정하는 방법이 매우 모호하다는 점이다. 생산성과 관련해 정확한 계산기가 없기 때문에 총생산물을 총근로시간으로 나눠 측정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자본 생산성 등을 고려해야 하므로 노동의 생산성이 얼마인지는 정확한 계산이 사실상 힘들다. 노동부와 같은 국가 기관에서 제공해주는 데이터를 사용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유리하다. 미국 노동부에서 제공하는 데이터에 따르면 미국의 생산성은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1987~2007년의 평균인 2% 대비 훨씬 낮은 0.8%다. 2008년 이후 평균 1.2%와 견줘도 낮다.
생산성 증가세 둔화는 적정 임금 상승률 하락으로 연결된다. 기업 입장에서 중립적인 임금 상승률은 물가 상승률과 생산성 증가율의 합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가 상승률과 생산성 증가율의 합이 임금 상승률보다 높으면 노동자의 임금 협상력이 높아지고 반대이면 기업의 협상력이 높아진다. 지금은 후자다. 임금 상승률이 물가와 생산성 개선 속도에 견줘 빠르다. 임금 상승률이 더 빠르게 올라서기 힘들다는 점을 시사한다. 아래 그래프가 물가 상승률과 생산성 증가율의 합에서 임금 상승률을 뺀 수치다. 지금은 마이너스에 위치해 있다.
<그림2> 미국의 물가 상승률과 생산성 증가율 합에서 임금 상승률을 차감한 수치
0% 이하는 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과 생산성증가율보다 높음을 시사하며 임금 상승 압력이 크지 않음을 의미한 가지 긍정적 사실은 바닥 확인 후 반등세라는 점(시간을 두고 임금 상승 압력으로 연결) 자료: 톰슨로이터
둘째는 고령화다. 노동 인구의 고령화는 임금 상승률 저하로 연결되고 있다. 미국은 베이비붐 세대의 인구가 절정을 이뤘을 때 1억명에 육박한 바 있다. 이들이 지금 은퇴 세대가 됐다. 베이비붐 세대가 양질의 일자리에서 이탈해 저임금 비숙련 노동자가 되면서 임금 상승률이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은퇴한 자리를 대체하고 있는 자녀들인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 초년생으로 높은 임금을 못 받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면 직책이 부장인 고액 연봉의 부모가 은퇴하고 주임·대리급인 저액 연봉의 자녀가 취직하면서 전체적으로 임금 상승률이 둔화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앞서 언급했던 생산성 저하와도 일정 부분 관련 있다. 한 직종에 20~30년 근무한 베이비 부머가 은퇴하고 새내기들이 그 자리에 들어서면 당연히 생산성은 저하된다. 이 구도가 미국의 임금 상승률 저하로 연결돼 필립스 곡선의 배신(?)을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다.
미국 애틀랜타 연방준비제도(연준)에서는 이런 인구 구조의 변화에 따른 임금 상승률 왜곡 현상을 제어하기 위해 동일 직군의 동일인을 대상으로 임금 상승률을 추적하는 데이터를 발표한다. 흥미로운 점은 해당 임금 상승률과 실업률 간에는 여전히 높은 역의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애틀랜타 연준이 조사한 실업률과 임금 상승률 간에는 1997~2009년까지 상관계수가 -0.76이고 2010년부터 현재까지는 -0.93이다. 역의 상관계수가 오히려 높아졌다. 필립스 곡선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의 인구 구조 변화에 따른 임금 상승률 왜곡이 착시 효과를 일으킨 부분이 있다는 의미다.
<그림3> 실업률과 애틀랜타 연준의 임금 상승률 간 산포도
실업률 5%를 기준으로 임금 상승률이 1%p 가량 낮은 이유는 동 기간 물가 상승률이 0.5~1.0%p 낮아진 효과 감안. 자료: 톰슨로이터
필립스 곡선이 중요한 이유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준(Fed)의 정책 방향과 관련해 주요 참고 지표가 모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실업률과 임금 상승률(또는 물가 상승률) 사이의 트레이드-오프(하나가 상승하면 다른 하나는 하락하는)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연준의 물가 상승률 목표치는 높아질 수 있다. 이는 금리 인상 지연을 뜻한다. 실업률 하락에 따른 물가 상방 압력이 크지 않다면 연준이 굳이 금리를 빠르게 올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필립스 곡선이 제대로 작동해 둘 간의 트레이드 오프 관계가 성립한다면 최저 수준에 가까워지고 있는 실업률을 고려해 연준이 한 발 빠른 통화 정책 정상화를 가져갈 수 있다.
현재로서는 필립스 곡선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약화됐다고 보긴 힘들다. 무엇보다 생산성이 1%대를 회복하면서 적정 임금 상승률이 상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빠르면 4분기나 늦어도 내년에는 임금 상승률이 3%에 닿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고 있다.
투자자들은 필립스 곡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기를 바라며 이러한 현상이 연준에 닿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한 발 더딘 금리 인상을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립스 곡선은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인구 구조의 변화와 이로 인한 생산성의 일시적 둔화가 임금 상승을 가로막고 있지만 이러한 영향력은 점차 희석되고 있고 이를 제외한 실업률과 임금 상승률 사이 끈끈한 관계는 잘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리선물 시장에 나타난 연준의 12월 금리 인상 확률은 절반 이하이지만 이러한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상 확률은 절반 이상 쪽에 가까워 보인다.
신한금융투자 투자전략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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