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에서 3.3㎡당 평균 전셋값이 1억원을 넘는 아파트들이 잇달아 등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수영(가명·37)씨는 2018년 경기 수원의 한 아파트에 전세보증금 2억2천만원을 주고 입주했다. 여윳돈이 있었지만 일단 은행에서 전세자금대출을 최대한 받았다. 대출금이 1억7천만원 나와 본인 돈 5천만원을 보탰다. 남는 돈으로는 근처 다른 아파트를 갭투자했다. 3억3천만원짜리 집을 2억6천만원 전세 끼고 구매해, 실제 들어간 돈은 7천만원이었다.
김씨는 2013년부터 갭투자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은행 예금이자가 너무 낮으니 돈을 좀 불려보자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했다. 이후 문재인 정부가 민간임대사업자 등록을 장려하면서 서울 등지에서 빌라, 오피스텔 등 서너 채를 전세 끼고 샀다. 저금리가 계속되면서 김씨 부부는 전세로 살면서 꾸준히 부동산 투자를 해왔다.
하지만 최근 2년 새 다주택자 전세대출 규제가 강화되자 더는 전세대출 연장이 불가능해졌다. 김씨는 올해 말 근처 아파트 전세를 빼고 실거주할 계획이다. 세입자에게 돌려줄 전세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파트담보대출을 받으려고 하니 은행에서 자신이 받은 전세대출을 갚아야 가능하다고 했다. 신용대출 받아 전세대출을 갚으려고 하니 최근 한도 축소로 이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김씨는 “정부가 대출규제를 강화하는 건 이해하는데, 전세로 살면서도 집을 여러 채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가 급박하게 정책 방향을 바꿔 대출을 죄니 대처하기 어려워 난감하다”고 말했다.
김씨의 부동산 투자기는 박근혜·문재인 정부 8년간 부동산·금융정책의 롤러코스터를 보여주는 사례다. 8년 전 김씨 부부가 1억2천만원으로 부동산 투자를 시작해 최근까지 투자를 이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전세자금대출이다.
전세자금대출은 세입자의 주거안정을 위한 제도지만, 전세금을 끼고 집을 사는 이른바 ‘갭투자’에 활용돼 집값 상승을 부추기는 원인으로 지목돼왔다. 전세대출 이자가 신용대출보다 낮으니 일단 전세대출을 받고 여윳돈으로 주식 등 다른 자산에 투자하는 현상도 확산된다. 집값 상승, 가계부채 증가, 자산거품의 배경에 모두 전세대출 제도가 있는 것이다.
정부는 전체 금융권의 전세자금대출 잔액이 2015년 25조원에서 올해 8월 말 기준 150조원 수준으로 불어난 것으로 파악한다. 6년 새 500% 불어난 것이다. 정부가 주택담보대출을 강하게 죄는 동안 전세자금대출은 ‘실수요자 주거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규제가 느슨했다. 하지만 가계빚이 1700조원을 넘어서는 상황에서 전세자금대출이 더는 대출규제의 예외가 돼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세입자가 은행에서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때 정부가 대출금의 90% 이상 보증해준다. 전세보증은 공공기관인 한국주택금융공사와 주택도시보증공사, 민간회사인 에스지아이(SGI)서울보증 세 곳에서 한다. 민간회사를 제외한 정부의 공적보증 규모는 2014년 27조1857억원에서 지난해 111조4278억원으로 4배로 커졌다. 정부 교체기인 2017년을 기준으로, 박근혜 정부 때인 2014~2017년 3년간 증가율은 75%였지만,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증가율은 135%였다. 문재인 정부가 세입자의 주거안정 정책으로 전세자금대출 보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다.
은행 입장에서도 정부가 보증해주는 만큼 대출을 내주면 떼일 염려가 전혀 없어 ‘땅 짚고 헤엄치기’ 장사가 된다. 정부보증 덕에 전세자금대출 금리는 최저 2%대로, 주택담보대출이나 신용대출보다 이자가 싸다.
세입자 입장에서는 월세보다 낮은 이자비용만 내고 2억~3억원을 쉽게 조달할 수 있으니 ‘전세자금대출을 안 받으면 손해’라는 말이 나온다. 전세가격이 오르는 주요 이유는 수요보다 공급이 적은 것이지만 손쉬운 전세자금대출도 전세보증금 인상을 수월하게 만든다는 진단도 있다.
전세자금대출은 집을 사려는 사람의 ‘자금줄’ 역할도 한다. 정부의 연이은 규제 강화로 주택담보대출비율(LTV)은 집값의 40%까지 낮아졌다. 집을 살 때 집값의 40%만 주택담보대출로 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서울지역의 평균 전세가율(집값 대비 전세금의 비율)이 50%를 넘기 때문에 전세를 끼고 사면 집값의 절반 이상을 남의 돈(전세금)으로 조달할 수 있다. 전세가율이 엘티브이를 웃돌다보니 정부의 주택담보대출 규제가 무력화되는 셈이다. 실제 천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지난해 3월부터 올해 7월까지 서울 지역 자금조달계획서 19만3974건을 분석한 결과, 30대 이하 주택 매주자의 임대보증금 승계 비율이 52%로 절반 이상 ‘갭투자’로 집을 산 것으로 나타났다.
정준호 강원대 교수(부동산학)는 “박근혜 정부 때부터 완화된 전세대출을 문재인 정부가 2017년에 돌려놓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전세대출 수요가 크게 늘었고, 이제는 실수요자와 갭투자 수요를 제대로 가려낼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서영수 키움증권 연구원은 지난 7월 ‘집값 급등의 진원지는 무주택자의 갭투자’라는 보고서를 냈다. 그는 박근혜 정부 이후 갭투자가 활성화되면서 전세가격과 집값의 동조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다고 진단했다. 전세보증금을 이용한 갭투자가 주택담보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것보다 금리·규제·자금조달 면에서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전세가격을 올리면 주택담보대출비율을 상향하는 효과가 나므로 자금조달 여력도 늘어난다.
서 연구원은 “거래 대부분이 갭투자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는데도, 실거주하려는 주담대 수요자 중심으로 대출 규제를 해오면서 전세자금대출 등 투기 수요자의 핵심 레버리지 수단은 예외로 일관했다”며 “규제 기준을 다주택자로 한정하고 무주택자의 갭투자를 지원하는 정책을 지속하는 한 집값 상승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7월부터 시행하고 있는 개인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40% 규제를 단계적으로 시행하고 있지만, 전세자금대출은 실수요라는 이유로 제외했다. 신용상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 6월 보고서에서 “풍선효과 차단이라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 도입의 본래 취지와 달리 전세자금대출, 중도금대출, 개인사업자대출 등 가계대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핵심대출이 제외돼 대책의 실효성이 크게 희석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경제학)도 <한겨레>와 통화에서 “가계대출 규제는 소득에 기반하는 게 맞다”며 “전세대출도 결국 대출이니까 디에스아르 규제를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세보증금은 결국 임대인이 임차인에게 돈을 빌리는 것이므로 임대인의 디에스아르 규제에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전세대출은 세입자가 전세보증금을 은행에서 빌려 다시 임대인에게 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도 집주인의 부채가 맞다. 하지만 정부는 이렇게 될 경우 집주인이 대출 한도를 확보하기 위해 전세를 반전세나 월세로 돌릴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선뜻 정책에 반영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전세자금대출 보증한도를 줄이거나 금리를 인상하는 식으로 전세대출 조건을 더욱 까다롭게 하는 방법도 있다. 정부의 보증이 줄어들면 은행의 위험부담이 커지므로 자체 심사를 강화하고 금리가 오를 수 있다. 은행도 이익만 추구하는 대출행태에서 벗어나 갭투자자 대출 심사를 까다롭게 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하준경 교수는 “대출 위험을 평가하는 게 금융회사 고유의 기능”이라며 “전세자금은 집주인이 간접적으로 대출받는 것이어서 집주인의 위험 평가에 적절히 반영해 갭투자가 무분별하게 일어나는 걸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투기수요를 주택의 유무로만 판단하는 정책 기조를 바꿔야 한다고 조언한다. 신용상 선임연구위원은 “주택의 유무로 실수요자·투기수요자를 구분함으로써 무주택자 및 30대 이하 세대가 과도한 레버리지를 일으킬 수 있었다”며 “이런 정책 방향이 가계 및 부동산 관련 대출 급증과 부동산 시장 불안 확대에 일조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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