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식품의약품안전처 ‘백신 보관 및 수송관리 가이드라인’
제약회사 ㄱ사는 획기적인 종양치료약을 개발해 미국의 한 유통센터에 200만유로(27억3천만원) 납품계약을 맺었다. 환자에 투약해야하는 이 치료제는 생산단계부터 소비자에 전달될 때까지 빈틈없이 섭씨 2~8℃ 사이를 유지해야 했다. 배송업체가 애초 배송시간을 96시간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는 39시간이나 더 걸리면서 사달이 났다. 늘어난 배송시간 탓에 유통센터 도착때까지 적정온도를 유지할 수 없었고, 치료제 효능에도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ㄱ사는 납품대금을 한푼도 건지지 못했고, 기업가치에도 큰 타격을 입었다.
글로벌배송업체 디에이치엘(DHL)은 ‘콜드체인’의 중요성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콜드체인은 의약품이나 음식물처럼 온도에 따라 손상되기 쉬운 제품을 생산부터 최종 소비단계까지 저온상태(콜드)로 전달하는 유통망(체인)을 일컫는다. 신선식품을 냉장·냉동상태로 소비자에게 전달해 곧바로 냉장고에 저장하는 장면이나, 수혈에 필요한 혈액배송을 떠올리면 쉽다. 최근에는 코로나19와 독감 백신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의약품 콜드체인’이 주목받고 있다.
22일 국내 일부 독감 백신이 유통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된 문제에 대해 관련 업계에서는 “백신 유통과정에서 ‘콜드체인’ 문제로 변질 가능성이 제기된 건 국내에서는 알려진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을 만큼 이례적인 사건”이라고 설명한다. ‘콜드체인’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부 당국과 관련업계가 이면에서 그만큼 의약품 저온유통망을 엄격히 관리해온 것이다.
백신 변질은 온도가 올라가면 음식이 쉽게 상하는 원리와 같다.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질병관리본부는 지난 7월 내놓은 ‘백신 보관 및 수송관리 가이드라인’ 개정안에서 “백신 콜드체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조·수입업체에서 생산·수입된 백신을 유통업체를 거쳐 접종이 이뤄질 때까지 적정온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특히 일반적인 백신의 경우, 접종 전 단계까지 빈틈없이 2~8℃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이 때문에 가이드라인은 백신을 담아 옮기는 용기는 가~다형으로 구분해 적게는 5시간부터 최대 24시간까지 10℃ 이하 온도가 유지되도록 하고 있다. 콜드체인 장비가 과도하게 작동해서 백신을 얼게 해서도 안된다. 또 백신용기에 내부 유지온도와 시간, 목적지, 배송시간 등을 적도록 하고 있다. 아울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차량에도 자체전력을 가진 냉동장치를 가동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번 독감 백신 변질 논란도 유통과정에서 이같은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아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자료: 식품의약품안전처 ‘백신 보관 및 수송관리 가이드라인’
늦어도 내년안에 코로나19 백신 개발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콜드체인 업계에서도 각종 백신 유통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물류산업진흥재단이 펴낸 ‘콜드체인 물류편람’을 보면, 국내 바이오의약품 물류업체인 지시(GC)녹십자랩셀은 제품의 온도를 실시간 확인할 수 있도록 자체 개발한 운송박스를 이용하고 있다. 씨제이(CJ)대한통운이 사용하는 저온용품 배송용 차량통합관제시스템 ‘에코가디언’으로 백신 배송차량의 운행기록과 백신용기의 실시간 온도·습도를 관리하는 시스템 등을 이용하고 있다.
국내외로 옮기는 일부 특수한 백신은 -15℃ 이하를 유지하며 며칠씩 항공배송을 해야하거나, 일부 생물학적 물질들을 -190℃로 장기보관하는 경우도 있다. 액화천연가스(LNG)를 이용해 의약품 보관장비와 차량 이동 시설을 영하 100℃ 이하로 유지하거나, 고체 이산화탄소, 액체질소 등 첨단기술이 이용되기도 한다. 업계에서는 “상용화된 백신 뿐 아니라 임상제품의 경우, 작은 샘플처럼 보여도 운송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위중한 환자의 치료가 지연될 뿐더러 업체에 천문학적 손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홍석재 기자
forchi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