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으로 흐르는 나랏돈 ⑥ 재벌과 관료의 밀월
힘있는 부처 출신 ‘재벌행’ 10년간 778명
힘있는 부처 출신 ‘재벌행’ 10년간 778명
12년간 고위공무원 182명 삼성행…정부의 기업 정책에 ‘입김’ 2012년 12월 조달청에서 퇴직한 남아무개씨는 아홉달 뒤인 2013년 9월 삼성에버랜드에 입사했다. 그는 ‘고문’이라는 새 명함을 받았다. 남씨는 “친구가 (회사에) 추천을 해줬다. 에버랜드에 가려고 퇴직한 것은 아니고, 퇴직 뒤 한참 동안 일을 찾다가 오게 됐다”고 했다. 그는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에서 취업 승인을 받았다. 에버랜드는 일반인에게 ‘놀이동산’으로 알려져 있지만, 건설·부동산업을 하는 회사다. 이건희 회장의 두 딸인 이부진·이서현씨가 사장으로 있으며,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핵심고리인 곳이다. 지난해부턴 삼성물산 대신 삼성그룹 계열사의 공사 물량을 많이 가져가고 있다. 건설부문 주력 계열사였던 삼성물산은 국외 시장으로 빠졌다. 에버랜드는 그룹 내부거래 비중이 높아 ‘일감 몰아주기’에 따른 세금을 적게 내려면 그룹 외 공사를 많이 수주해야 한다. 나랏돈을 많이 받는 ‘덩치가 큰’ 공공부문 공사는 놓칠 수 없는 시장이다. 남씨의 역할은 이와 관련이 있다. 남씨는 “조달 제도나 내 경험을 (에버랜드에) 컨설팅해주기 위해서 들어왔다. 에버랜드가 공공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기반을 닦아야 하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남씨는 공직에서 물러나기 전 기술형 입찰로 집행하는 대형공사 설계심의를 전담하는 조달청 설계자문위원회 분과위원 가운데 한명이었다. 남씨는 “조달청 기획과장으로서 당연직 분과위원장을 맡았을 뿐”이라고 했지만, 그가 가진 경험은 대기업이 탐낼 만하다. 에버랜드가 성공적으로 공공시장에 들어간다면, 퇴직 공무원은 의도가 있건 없건 간에 재벌이 지배구조 체제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 셈이 된다. 조달청 출신 퇴직 공무원이 삼성에만 인기가 좋은 것은 아니다. 김현미 의원(민주당)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조달청에서 퇴직한 공무원(2008~2012년) 가운데 서기관급 이상 14명은 모두 현대건설·대우건설 등 대기업 건설사에서 고문·자문역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또 조달청 출신만 삼성에 간 것은 아니다. 참여연대가 2001년부터 2013년 5월까지 공무원 재취업 현황을 집계한 결과를 보면, 삼성으로 향한 고위 공무원은 경찰청(42명)과 국방부(26명) 출신이 가장 많다. 다음은 국세청(17명)과 검찰(15명) 출신이 뒤를 이었다. 감사원(10명)과 국가정보원(9명), 공정거래위원회(7명) 출신도 삼성행을 택했다. 이른바 ‘사정기관’ 등 정부 내에서 힘깨나 쓰는 기관 출신이 많은 게 눈에 띈다. 이들의 힘은 세금·조달·정책자금 등에 걸쳐 있다. ‘삼성 지배구조 핵심’ 에버랜드
덩치 큰 공공부문 공사 수주 위해
조달청 퇴직 고위공무원 영입
대기업 ‘대관 조직’에 모셔와
국회·부처 ‘로비전’ 벌여
재벌 세제혜택·이권 지켜내 대기업행 역사는 이미 오래됐다. 행정부 최고위급인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1986년 삼성물산 회장에 영입된 바 있다. 신 회장은 이병철 삼성 회장에게 허리를 숙였다. 다른 공무원들도 재벌이 제공하는 자리와 돈을 찾아 이동했다. 삼성으로 간 공무원(정부공직자윤리위 심사를 거친 경우)은 2001년부터 182명에 이른다. 기업 고문이 된 이들은 승용차와 자신의 방과 비서를 받았다. 그러나 재벌에게 ‘공짜 점심’은 없다. 한 기업 대관(관청 상대) 업무 담당자는 퇴직 공무원의 영향력에 대해 설명하며 삼성자산운용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삼성자산운용이 13년째 연기금 투자풀을 주관하는 것을 보면 대단하다. 국토부에서도 국민주택기금 운용을 증권사 5곳에 나누던 것에서 주관사 1곳에 맡기는 것으로 바꾸려는데 삼성 쪽이 침 발라놨다는 얘기가 많다”고 전했다. 삼성자산운용은 지난해 조아무개 감사원 국장을 감사로, 손아무개 공정위 부위원장을 사외이사로 영입했다. 기획재정부의 세제실장을 지낸 윤아무개 전 관세청장도 삼성자산운용의 사외이사다. 지난해 12월 기획재정부 투자풀위원회는 13조원을 주무르는 연기금 투자풀 주관운용사로 삼성자산운용과 한국투자신탁운용 두 곳을 선정했다. 직접 보조금과 세액 공제 등 나랏돈 지원에 이어 연기금을 둘러싼 이익마저 대기업으로 흐르고 있다. 삼성그룹의 한 대관 관계자는 “(대관 업무를 하지 않으면) 가만있다가 어떤 회사는 유리하게 되게, 어떤 회사는 불리한 상황을 맞게 된다. 제도 한번 바뀌면 1000억원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그러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대기업으로 간 퇴직 공무원들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금융감독원 생명보험서비스국장을 한 바 있는 조아무개 삼성화재 감사위원은 ‘금감원 후배들에게 연락하지 않냐’는 질문에 “업무와 관련해서 통화도 하고 필요하면 가서 우리 이야기를 전하기도 한다”고 했다. 감사원에서 퇴직한 뒤 삼성물산 고문으로 간 박아무개씨도 “(퇴직 공무원을 쓰는 게) 기업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효율적이다. 많은 정보를 빨리 접할 수 있다”고 했다. 박씨는 “현대나 엘지도 쓸 만한 사람을 다 데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퇴직 공무원들은 2001년부터 따지면 에스케이(SK)그룹에 53명이 갔다. 현대자동차 그룹에는 45명이 입사했다. 한화그룹엔 국방부 출신 14명 등 40명이 간 것으로 집계됐다. 이들은 빙산의 일각이다. 퇴직한 고위 공무원을 비싼 몸값을 주고 스카우트하는 건 대기업이 공적 자원 쟁탈전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여러 방법 가운데 하나다. 또 다른 방법은 기업의 대관 업무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대기업은 직접 국회와 정부 부처를 출입하는 이른바 ‘대관’ 조직과 인력을 운용한다.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삼성그룹은 많게는 30명이 넘는 국회 담당 대관 조직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주로 국회 보좌관 등을 통해 기업의 입장을 전달하는 전령사들이다. 2년 전 정부가 설탕 수입 관세를 낮추려 하자, 값싼 설탕의 수입 증가로 독과점 시장이 깨질 것을 우려한 씨제이(CJ)의 국회 담당 직원들은 몇달 동안 국회에 살다시피 하면서 로비전을 펼쳤다. 통신업계 등 규제 내용에 따라 이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곳에선 아예 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건네기도 한다. 대기업이 전면에 나서기 부담스럽거나 여러 기업의 이해가 걸려 있을 땐 경제단체나 협회를 내세우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재벌 면세점의 독과점을 규제하려고 홍종학 민주당 의원이 법률 개정안을 냈을 때, 대기업은 면세점협회를 앞세워 자신들의 이권을 지켜냈다. 협회는 업계 선두주자인 대기업의 입김이 세다. 한 삼성 계열사 관계자는 “정부가 정책을 마련할 때 협회에서 의견을 모아 전달하는데, 이때 사실상 ‘리딩 컴퍼니’(선두 기업)의 얘기가 주로 반영된다”고 말했다. 이런 협회 및 연합회로 옮긴 공직자는 지난 12년 동안 90명이 넘는다.
정기국회가 열린 2013년 11월26일 국회 상임위원회 회의실 주변에서 관계부처 공무원들이 예산심의 관련 답변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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