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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삼성 자회사 상대로…‘다윗의 소송’

등록 2012-10-04 20:19수정 2012-10-05 08:45

세크론이 장비 특허기술 침해
납품받던 삼성, 자회사와 거래
고심끝에 법적다툼…1심 승소
“지금처럼 대기업이 마음놓고 중소기업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계속되어선 국가경제에 미래가 없다.”

한근섭 한미반도체 경영지원본부장(상무)은 “기업 하는 사람 입장에서 정치권의 논의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면서도 사회적인 쟁점으로 떠오른 경제민주화에 대한 소신을 밝히는 데는 주저하지 않았다. 지난달 25일 인천 서구 가좌동에 있는 한미반도체 본사에서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였다.

반도체 장비를 제조하는 중견기업 한미반도체는 삼성전자 자회사인 세크론을 상대로 특허침해 금지 소송을 벌여 지난 8월 말 어렵사리 승소(1심)를 이끌어냈다. 담당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은 “세크론이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해 한미반도체의 특허권을 침해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손실액 218억원의 10%인 21억8000만여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소송 상대편인 세크론의 지분 78.1%는 삼성전자 몫으로 돼 있다.

문제의 장비는 반도체 칩을 최종 제품화하는 공정에서 쓰이는 ‘소잉 앤 플레이스먼트’라는 패키징 장비다. 이 장비는 반도체 집합체(반도체 스트립)를 각각의 제품으로 자른(소잉·sawing) 뒤, 불량 여부를 검사해 최종 사용을 위한 트랙에 놓아주는(플레이스먼트·placement) 설비다. 이번에 법원은 이 장비의 작업 처리 순서와 중간에 반도체를 한번 뒤집어주는 과정에 관련된 한미반도체의 특허기술을 세크론 쪽에서 침해했다고 인정했다.

거대 기업의 자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는 결정을 내리기까지 한미반도체 쪽의 고심은 컸다. 2000년부터 삼성전자에 이 장비를 납품해온 한미반도체는 2006년 한해에만 28대를 팔았다. 기류가 달라지기 시작한 건 이듬해부터였다. 주문량이 9대로 급감하더니 2008~2012년 사이에는 고작 1대를 주문받는 데 그쳤다. 반면 세크론은 2006년부터 삼성전자에 같은 기능의 장비를 납품하기 시작해 올해까지 158대를 공급했다. 특허 탈취 혐의가 있는 자회사 쪽으로 삼성전자가 거래처를 옮긴 것이었다.

대기업-로펌 한통속…중소기업 “소송 비용만 날린다” 체념
“대기업서 단가 후려쳐도 거래 끊길까봐 입 닫고
공정위에 부당행위 제소해도 쉽게 노출돼 꺼려
공정한 룰 지키고 공생환경 만드는게 경제민주화”

인천시 서구 가좌동에 있는 한미반도체 공장 전경. 한미반도체는 삼성전자 자회사를 상대로 특허 침해 관련 소송을 벌여 1심에서 승소를 거둔 상태이다.   인천/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인천시 서구 가좌동에 있는 한미반도체 공장 전경. 한미반도체는 삼성전자 자회사를 상대로 특허 침해 관련 소송을 벌여 1심에서 승소를 거둔 상태이다. 인천/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한근섭 상무는 “2007년부터 낌새를 채고 구두로 항의도 해봤지만 아무 변화가 없었다”며 “오히려 세크론이 문제의 장비로 세계 시장까지 넘보기 시작해 ‘생존’을 위해선 소송밖에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소잉 앤 플레이스먼트’는 이 회사 매출의 60%를 차지하는 주력 장비로, 세계 시장에서 70%가량의 점유율을 갖고 있다고 한미 쪽은 설명했다.

소송전까지 불사한 한미의 사례는 사실 매우 이례적인 경우다. 기술을 탈취당하는 등의 부당한 상황에서도 법적 다툼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지레 포기하는 수가 많다. 대기업 의존도가 워낙 높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중앙회의 ‘2011 중소기업 실태조사’를 보면, 전체 중소제조업체 11만2424곳 가운데 대기업 또는 중소기업에 위탁을 받아 납품하는 업체 비율은 45.5%였다. 이들 수탁업체의 위탁기업 의존도(수급기업의 매출액 대비 납품액 비율)는 81.2%에 이른다.

전기분야 중소업체 대표 ㄱ씨는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유리알 보듯 들여다보고 있다. 계약 때부터 제품당 니켈이 몇 그램, 구리가 몇 그램 들어갔는지, 직원들의 학력이 어떻게 되는지까지 요구해 파악한다”며 “아무리 가혹하게 단가를 책정하더라도 거래를 끊겠다고 하면 당장 버틸 여력이 없기 때문에 항의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하는 방법도 있지만 제소한 상대가 어디인지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역시 꺼리는 경우가 많다. 중기중앙회의 한 관계자는 “익명의 사례라도 언론 등을 통해 외부에 알려지는 순간 문제의 대기업이 끝까지 추적해 응징한 전례도 있다”고 말했다.

최후의 수단은 법에 호소하는 것이지만, 그 역시 쉽지 않다. 8년째 엘지(LG)유플러스를 상대로 특허침해 관련 소송 중인 서오텔레콤의 김성수 사장은 “대형 로펌들과 관계가 돈독한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에서) 이기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서오텔레콤은 소송 비용만 80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한미의 경우 재판 과정에서 눈에 띄는 부당한 외압을 느낀 것은 아니지만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면 서로 어렵고 경비만 드는 것 아니냐’는 주변의 압박이 있었다고 한다. 김 사장은 “중소기업의 기술은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이라는 대기업의 인식이 문제”라며 “전체 경제활동의 활동성을 저해하는 이런 인식은 결국 대기업에도 이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연매출 2000억원대의 규모를 갖춘 한미반도체 같은 중견기업은 그나마 법적인 판단을 받아볼 ‘여유’라도 있는 편이지만, 영세한 중소업체엔 그 자체가 ‘사치’에 가깝다. 공구 관련 중소기업 ㅅ사의 ㅌ대표는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의뢰를 받아 어렵게 개발한 제품을 다른 회사가 (가로채) 납품하는 경우가 있다”며 “법적 대응을 하고 싶어도 막대한 소송비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단념하게 된다”고 말했다.

경제민주화 쟁점이 불거지면서 이런 상황에도 미약하게나마 변화의 기류는 감지되고 있다. 김성수 사장은 “중소기업이 생각하는 경제민주화란 공정한 룰을 지키면서 승자독식이 아닌 공생의 경제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라며 “그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이뤄지고 있다고 본다”고 기대감을 표시했다. 지난달 김동수 공정거래위원장의 지방 소재 중소 납품업체 간담회에 동행했던 한 공정위 관계자는 “정보기술(IT)과 유통업계에선 부당거래 개선이 아직 미흡한 게 사실이지만 제조·건설업에서는 단가 후려치기 등의 관행이 완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근섭 상무는 “1983년 삼성이 처음 64k 디램 개발에 성공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열었을 때 한미반도체는 기술 중소기업으로 제조 장비 국산화로 협업했다”며 “규모를 갖추지 못한 중소기업이 진출하기 어려운 분야를 대기업이 선도하고 중소기업은 맡은 분야에서 기술 혁신을 이루는 공생의 정신이 절실한 때”라고 말했다.

권오성 기자 sage5t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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