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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금융 소외를 넘자 ④] 독일, ‘3중 안전망’으로 막는다

등록 2007-08-01 20:41수정 2007-08-01 20:51

독일 베를린 시내에 있는 저축은행 ‘베를리너 슈파르카세’ 본사 전경. 베를린/최우성 기자
독일 베를린 시내에 있는 저축은행 ‘베를리너 슈파르카세’ 본사 전경. 베를린/최우성 기자
‘협동조합-저축은행-상업은행’ 3중버팀목
“금융부문은 공공산업” 사회적 합의 전통 튼튼
협동조합은 대부업 가는 길 막는 마지막 보루
대형 은행들도 소액대출 상품 적극 개발 나서

올해 나이 마흔여덟인 크리스티안. 그는 몇 달째 실업자 신세다. 서서히 생활비 부담을 느끼기 시작한 그는 얼마 전 노동자복지조합이라는 한 지역 구호단체에서 생활자금으로 3천유로(350만원)를 지원받았다. 그곳이 은행 등 여느 금융기관보다도 훨씬 친숙하게만 느껴지는 게 솔직한 그의 심정이다. 저소득층의 생활 보장 해결책으로, 금융기관을 통한 ‘대출’보다는 사회보장제도나 복지단체의 ‘지원’이 언제나 우선 순위에 놓였던 독일 사회의 오랜 전통이 어렴풋하게라도 남아 있는 탓이다.

물론 이런 ‘금융기관 바깥’의 주머니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세상이 팍팍해졌다고 그는 자주 투덜댄다. 이제 돈이 필요하면, 영락없이 ‘대출’을 받으러 은행 문을 두드려야 할 판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아직 독일에선 은행 문턱이 턱없이 높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많이 들리지는 않는다. 서른을 갓 넘긴 동독 출신의 꿈 많은 청년 하인리히도 최근 은행 덕을 봤다. 작은 이삿짐센터 창업을 준비하던 그는 2만유로 가까운 돈을 빌려 초기 창업자금에 보탤 수 있었다.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준 은행은 우리에겐 이름도 낯선 ‘베를리너 슈파르카세’, 베를린 지역의 저축은행이다. 이렇다할 신용을 증명할 수 없었던 그에게 대출 심사는 깐깐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그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베를리너 슈파르카세의 콘스탄츠 슈템펠 팀장은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은행으로서 지역주민의 성공을 도와주는 게 우선”이라며 “대출 심사 과정에서도 사업의 성공에 필요한 구체적 도움이나 조언에 치중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금전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찾을 수 있는 정식 은행의 가짓수가 많다는 게 독일 사회의 큰 특징이다. 은행이라고 할 때 으레 떠올리기 쉬운 민간 상업은행의 위세는 오히려 변변찮다. 하인리히가 이용한 저축은행 말고도, 협동조합(은행)을 찾는 이들도 꽤 많다. 소액의 자금을 안정적으로 빌려주는 협동조합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저소득층이 대출 조건이 그보다 월등하게 나쁜 대부업 시장으로 발을 들여놓는 걸 막아주는 마지막 보루 노릇을 톡톡히 한다. 5월 말 현재 저축은행 448곳, 협동조합 1258곳이 독일 전역에서 ‘성업 중’이다.

더 중요한 건 이들 ‘마이너리그’ 은행의 영향력. 저축은행과 협동조합의 총자산 규모는 각각 1조116억유로와 8571억유로나 된다. 이 둘을 합치면 민간 상업은행 전체 자산 규모(2조2211억유로)에 거의 버금가는 규모다. 2005년 말 기준으로 독일 전체 은행계좌 수는 1억2천만개. 이 가운데 저축은행 계좌는 4천만개, 협동조합 계좌는 3천만개에 이른다.

독일 정부는 오래 전부터 이들 은행을 버팀목 삼아 금융의 공공성이 훼손되는 것을 막아 왔다. 금융서비스연구소의 우도 라이프너 연구원은 “금융부문은 민간 상업은행의 이윤 논리에만 내맡길 수 없는 공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회적 합의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는 직접 이들 은행의 대주주로 나서기도 하고, 보증을 서 이들 은행이 싼값에 자금을 조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지역사회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최소 대출 기준을 아예 못박기도 했다. 대신, 정부는 만에 하나라도 이들 은행이 파산했을 때 모든 채무관계를 끌어안는다. 이처럼 지역사회와 저소득층의 확실한 돈줄 역할을 떠안을수록, 사람들은 이들 은행을 더욱 친숙하게 여긴다. 상업은행에 결코 밀리지 않는 경쟁력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독일 금융기관별 시장점유율 / 독일 은행 제도를 이루는 3개의 축
독일 금융기관별 시장점유율 / 독일 은행 제도를 이루는 3개의 축
물론, 2000년대 들어 독일 사회에서도 금융소외는 여지없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이체 수수료가 아까워 집값을 내거나 월급을 받는 데 쓰이는 계좌 개설을 포기한 사람이 100만명이나 된다는 통계도 나왔다. 이쯤 되자, 이번엔 민간 상업은행들도 발벗고 뛰어들었다. 이들의 무기는 개별 저축은행이나 협동조합에 견줘 월등한 자본력. 이를 발판 삼아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소액 대출 상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마이크로크레디트 등 은행 테두리 바깥의 금융 활동에 대한 지원도 크게 늘렸다. 대형 상업은행들은 또 저소득층에게는 수수료 일체를 면제하기도 했다. 독일 은행협회의 토마스 슐뤼터는 “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건 사실 영미식 전통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면서도 “독일의 민간 대형은행들 역시 시장 자체가 더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금융소외 문제를 서둘러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고 말했다.

대형 상업은행들의 움직임엔 특히 시민단체와 소비자단체의 노력도 한몫했다. 독일과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은행 감시 시민단체 ‘뱅크트랙’의 요한 프레인스는 “은행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그에 걸맞은 책임도 많아진다”며, “대출과 투자 등 금융기관의 활동 하나하나가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쪽으로 진행되도록 압력도 넣고 감시의 눈초리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대형 은행들의 영업활동을 꼼꼼히 분석해 대출 과정에서 과도한 차별은 없었는지, 반사회적인 프로젝트에 투자한 적은 없는지 등을 낱낱이 공개하기도 한다.

독일 사회는 작지만 당찬 풀뿌리 금융기관인 협동조합과 저축은행이 앞장서 막고, 대형 상업은행이 그 뒤를 떠받치는 두터운 수비벽으로 밀려오는 금융소외 파고에 맞서오고 있다. “민간 상업은행-저축은행-협동조합으로 이어지는 삼중 안전망, 삼각 편대야말로 금융의 공공성을 유지해온 독일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죠.” 라이프너 연구원의 이야기다.

베를린·프랑크푸르트/

글·사진 최우성 기자 morgen@hani.co.kr


“공공성 얻고 경쟁력 내줬다” 불만도

소규모 금융기관 난립으로 수익성은 뒤떨어져
유럽연합, 기본권 차원서 ‘금융차별’ 접근 시작

‘은행 과잉(overbanking)!’

금융소외에 맞서는 독일의 수비 전술을 놓고선 뜻밖에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다. 독일의 삼중 수비망을 바라보는 바깥의 시선은 오히려 냉담한 편이다. 조금씩 내부의 불만 섞인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저축은행과 협동조합의 ‘난립’ 때문이다. 덩치를 키워 세계시장을 무대로 경쟁에 뛰어들 대형 은행이 등장하기 힘든 구조다. 지난해 말 현재 독일 전역의 은행 지점 수는 대략 2만개가 채 못 된다. 이 중 저축은행과 협동조합 지점 수는 1만5천개 수준. 주위에 있는 은행 지점 5곳 가운데 4곳은 모두 이들 ‘난쟁이 은행’ 간판을 달고 있다는 얘기다. 두 은행의 전체 자산을 합치면, 독일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3분의 2에 버금간다. 민간 상업은행은 고작 전체 시장의 30%선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주요 선진국치고는 지극히 특이한 현상이다.

때문에 금융의 공공성을 지켜내는 데는 보탬이 되지만,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재무 실적만 놓고 봤을 때, 사실 독일 은행의 성적표는 보잘것없다. 독일 은행의 평균 자기자본수익률(ROE)은 1%선. 유럽연합 평균치 (6%)를 크게 밑도는 것은 물론이고, 두 자릿수인 영국과 미국에 한참 뒤진다.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 건물 전경. 프랑크푸르트/AP 연합
프랑크푸르트에 위치한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 건물 전경. 프랑크푸르트/AP 연합
게다가 남다른 고민도 늘어간다. 유럽이 하나의 지붕 아래 합쳐지면서 독일만의 오랜 전통을 고수하기가 점점 힘들어진 탓이다. 실례로, 지난 2005년 유럽연합은 역내 국가의 금융기관이 자금을 조달할 때 정부나 공공단체가 지급보증을 서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을 마련했다. 민간은행과의 불공정한 경쟁이 벌어진다는 이유에서다. 독일 정부의 보증 아래 싼값으로 자금을 조달하던 저축은행과 협동조합에는 극히 불리한 내용뿐이다.

하지만, 독일식 제도의 장점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사그라들지 않는다. 금융기관 평가를 담당하는 리서치기관 외콤리서치의 마티아스 뵈닝 팀장은 “민간 상업은행과 저축은행, 협동조합이 나란히 공존하는 3층 구조는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독일식 금융문화”라며 “하루아침에 바뀔 수도 없고, 바뀌어서도 안된다”고 말했다. 라이프너 연구원은 “저소득층이나 중소기업 등 특정 집단에 한정된 효과를 기대한다는 점에선 독일식 금융제도의 장점을 지켜나가는 쪽으로 고민해야 한다”며 “저소득층에 대한 대출 최저 한도 지정 등은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럽연합 차원에서 금융소외 해소를 위한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지난 6월 유럽연합 경제사회위원회는 금융소외 해소를 위한 초안을 마련했다. 이 초안은 금융기관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기본적 사회권의 하나로 명시하고, 금융 차별을 없애기 위한 금융기관의 의무도 담고 있다.

베를린·프랑크푸르트/최우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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