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은행들에 공공성 ‘옷’ 입히니 수익성 ‘날개’
지난달 초 미국 뉴욕 맨해튼의 HSBC은행, 씨티은행 등 은행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에서 시민들이 거리를 지나가고 있다.
소득수준보다 빚갚을 의지·능력 심사해 대출
신용평가기법 향상된 은행들 “좋은 사업 기회” 15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 은행에서 모기지론(주택담보대출)을 받으려면 집값의 20%를 미리 내야 했다. 같은 직장에서 2년 이상 근무하고, 은행과 거래한 실적(신용기록)도 있어야 했다. 지금은 일정한 직업이 있고 집세나 가스세 등 공과금을 제 때 꼬박꼬박 냈다는 기록이 있으면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알리 야히야는 2000년 수단에서 미국 워싱턴으로 건너온 난민이다. 화물차 운전사 자격증을 땄지만 돈이 없었던 알리는 마이크로크레딧(저소득층 대상 무담보 소액대출) 단체에서 3만5천달러를 대출받아 자신의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 단체는 워싱턴에 있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A) 지점으로부터 연 2~3%의 낮은 이자율로 장기자금을 조달한다. 브라이언 트레이시 뱅크오브아메리카 지역개발담당 이사는 “우리는 간접적으로 마이크로크레딧 활동을 하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지난 2003년 홍콩상하이은행(HSBC)은 뉴욕주 버팔로시 저소득층 지역에 있는 두 지점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서부뉴욕법률센터라는 시민단체와 주민들은 “지점 폐쇄로 이 지역 주민들은 은행 서비스에서 더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항의했다. 결국 HSBC는 한 지점은 영업을 계속하고 나머지 한 개는 폐쇄하되 일부 서비스는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수익 극대화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주주자본주의 사회, 미국에서 미국 은행들은 얼핏 보기에 자신들의 수익성에 배치되는 이런 일들을 왜 하고 있을까? 위 세가지 사례는 모두 지역재투자법(Community Reinvestment Act, 이하 CRA)이라는 강력한 은행 공공성 법률 때문에 일어난 일들이다.
■ CRA란 무엇인가=1970년대 은행들은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이 모여사는 지역에 대출을 해주지 않는 ‘레드라이닝’(지도에 빨간 줄로 구분)이라는 관행이 있었다. CRA는 이 관행을 근절시키기 위해 1977년 제정됐고 1990년대 들어 실질적인 규제로 자리잡았다. 연방준비은행, 통화감독청 등 네 개의 감독기관이 전국 1800개의 은행들을 2년에 한차례 정도씩 검사해 등급(5개 중 하나)을 매긴다. 낮은 등급을 받은 은행은 국민들과 언론, 시민단체의 비난을 받게 되고 새로운 지점을 개설하거나 인수합병을 할 때 불이익을 받는다. ‘대출 테스트’는 총 대출의 어느 정도를 저소득층(평균 소득의 80% 이하 소득 계층)에게 해주었는지 보는 것이다. ‘투자 테스트’는 저소득층이 밀집한 지역에 주거시설이나, 공공시설, 학교 등을 짓는 사업에 얼마나 투자했는지를 평가한다. 마이크로크레딧기관, 비영리 개발단체 등 지역개발금융기관(CDFIs)에 대출을 해주거나 투자를 한 경우도 실적으로 인정받는다. ‘서비스 테스트’는 은행들이 저소득층 지역에 제대로 지점을 개설하고 있는지, 지역주민을 위한 금융교육이나 자원봉사를 얼마나 하고 있는지 등을 심사한다.
미 은행들에 공공성 ‘옷’ 입히니 수익성 ‘날개’
“은행접근권은 경제 정의” 전국지역재투자연합, 은행·당국 감시 “한 지역사회(community)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에 뭐가 있나요?” 워싱턴의 금융기관 감시 시민단체인 전국지역재투자연합(NCRC)의 데이비드 베렌바움 이사는 지난달 26일 사무실을 방문한 기자에게 하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려가며 이렇게 물었다. 일자리, 병원, 학교, 주거시설, 대중교통 시설 등이 하나씩 그려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은행을 그렸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각종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는 교육, 일자리, 의료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처럼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은 ‘경제적 정의’입니다.” 1990년에 만들어진 이 단체는 전국 600여개 지역시민단체의 연합회다. 만약 어떤 은행이 지역재투자법(CRA)을 제대로 지키고 있지 않다든가, 감독당국이 CRA를 약화시키는 법을 추진하고 있으면 당장 이들의 ‘표적’이 된다. 의회, 정부, 은행에 항의편지를 보내고 언론에 알리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압박을 가한다. 2005년에는 CRA 규제를 완화하려는 미국 저축기관감독청(OTS)의 시도를 막아내기도 했다. 이들은 이런 활동을 위해 평소 각 은행들의 영업행태에 관한 자료들을 꼼꼼하게 축적해놓는다. 이 단체의 제이미 울프 수석연구원은 “은행들의 행태는 만천하에 공개된다”고 말했다. 해마다 최고 은행과 최악 은행을 선정해 발표하기도 한다. “10여년 전의 일입니다. 컨트리와이드라는 모기지론 회사 대표와 우리 대표가 만나기로 했는데 하필 그 날이 이 순위를 발표하는 날이었죠. 컨트리와이드가 최악의 회사로 뽑혔습니다. 두 대표가 만나는 테이블 위에 그 리스트가 놓여 있었죠. 그쪽 회장은 ‘다시는 이 리스트에 우리 회사가 오르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고 이후 3년 동안 저소득층 지역에 지점을 12개나 더 열었습니다.” 이들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한 일화다. 이들은 뱅크오브아메리카, 씨티, 체이스, 와코비아, 웰스파고 등 미국의 12개 대형은행 대표와 매년 네 차례씩 회동을 갖고 의견을 교환한다. 미 연방준비은행, 통화감독청 등 감독당국들도 은행들을 평가하거나 제도를 바꿀 때 이들의 의견을 청취한다. 최근에는 CRA를 단지 은행뿐 아니라 보험회사, 증권회사에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CRA 현대화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또 현재 미국에만 있는 CRA를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려는 운동(‘글로벌공정은행운동’)을 펼치고 있다. 베렌바움 이사는 “꼭 미국같은 형태일 필요는 없고 각 나라의 사정에 맞게 법을 만들면 된다”며 “중요한 건 CRA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지난 4년 동안 브라질, 멕시코, 인도, 일본, 독일, 영국 등 79개 나라와 협력관계를 맺었고 지난해에는 ‘글로벌지역재투자연합’을 결성했다. “개인의 신용등급과 이자율은 그 사람이 사는 지역, 소득 수준, 인종 등에 따라 정해져서는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돈을 더 많이 버는가가 아니라 당신이 제 때 빚을 갚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대출이 더 위험하다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편견입니다. 미국 중산층들은 사치품을 사느라 오히려 더 빚이 많습니다. 저소득층 대출 시장은 은행들에게 좋은 사업 기회입니다.” 베렌바움 이사의 말이다. 워싱턴/안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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