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스타트업 기술탈취 예방 및 회복지원 민당정 협의회’에서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왼쪽 세번째)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가 중소기업 기술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기술침해 분쟁과 피해 회복을 지원하는 방안을 8일 내놨다. 기술침해를 둘러싼 분쟁에서 불리한 처지인 중소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범정부 차원의 종합 대책을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중기업계가 꾸준히 요구해 온 증거수집제도(디스커버리제도) 도입 방안은 이번 대책에선 빠졌다.
중소벤처기업부는 8일 기술침해(탈취·유용) 행위의 예방부터 분쟁 조정, 분쟁 후 회복 단계까지 주기별 지원 대책을 담은 ‘중소기업 기술보호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중기부는 “기존의 단편적 지원에 비해 유관 부처 협업을 바탕으로 지원사업을 연결·통합시켜 효과적인 대응 수단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우선 기술침해로 중소기업에 손해를 입힌 가해 기업에 대해서는 징벌적 손해배상 한도를 피해액의 3배에서 5배로 높일 계획이다. 손해액 산정 때 기술보증기금 및 변호사·변리사·회계사 등 외부 법률전문가를 통해 이를 지원한다. 또 기술자료 유용행위를 금지하고 해당 물건 폐기나 설비 제거를 법원에 청구할 수 있는 ‘금지청구권’ 제도를 새로 도입하기로 했다.
기술침해 분쟁 단계에선 피해 기업을 원스톱으로 지원하는 ‘범부처 기술보호 게이트웨이’를 구축한다. 내년 하반기부터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기술침해 피해 기업에는 경영 안정화를 위한 최대 10억원의 보증을 지원한다.
부처 간 협력도 강화된다. 중기부·국정원·경찰·특허청 4개 기관은 이날 업무협약(MOU)을 맺고 기술침해 공조체제를 운영하기로 했다. 이들 기관은 공동으로 행정조사에 나서는 한편, 시정권고를 이행하지 않는 가해 기업에 대한 수사 의뢰 등 공조를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상생협력법과 중소기업기술호법 개정 등 입법 사안은 올 하반기부터 추진할 계획이다.
정부는 손해배상 한도 상향과 금지청구권 도입 등 제재 강화가 대기업의 기술침해 위반 행위를 예방하는 효과를 낼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기술침해 피해액의 최대 3배까지 물어내도록 하는 징벌적 장치가 2011년 하도급법에 처음 도입된 뒤 지금까지 피해기업이 승소한 사례는 1건(상고심 계류중) 뿐이다. 우월적 지위를 가진 대기업들이 소송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다. 최소한 2~3년이 걸리는 소송 기간 중소기업은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므로 소송 자체를 꺼린다. 징벌적 손배제는 하도급법에 이어 특허법(2019년),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2021년), 상생협력법(2022년)에 잇따라 채택됐지만 거의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정부도 이번 대책에서 ‘기술분쟁 조정제도’를 활성화한다는 방침을 내놨다. 소송으로 가기 전에 양쪽의 합의로 조정이 성립되면 재판상 화해의 효력이 발생한다. 정부는 중장기적으로 분쟁 해결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조정·중재 전문기관 설립도 검토하기로 했다.
그러나 기술분쟁 조정제도 역시 성과는 미흡한 편이다. 기술분쟁 조정·중재 제도가 시행된 2015년 이후 지난해까지 접수된 조정신청 177건 중 실제 조정이 성립된 경우는 40건(22.6%)에 그쳤다. 나머지 89건은 가해 기업의 불응 등의 이유로 ‘조정 불가’ 판정이, 45건은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조정 불성립’ 결론이 났다.
이번 대책에선 그동안 중기업계가 꾸준히 요구해 온 증거수집제도(디스커버리제도) 도입안은 빠졌다. 이 제도는 분쟁 당사자가 확보한 모든 증거를 공개하는 것으로, 소송 상대방이 가진 증거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기술침해를 입증할 증거 대부분을 가해 기업이 확보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 제도다. 이 경우 소송으로 가기 전에 합의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아진다는 게 중기업계 주장이다. 주무 기관인 특허청이 지난 5월 디스커버리제도의 도입 필요성을 밝혔지만 이번 대책에 포함되진 않았다. 지난 2020년 의원 입법으로 발의됐으나 기업 부담을 우려한 산업통상자원부 쪽의 반대 등으로 폐기됐다.
중소기업의 기술침해 사건 등에서 무료 법률지원을 하는 재단법인 경청의 박성수 지원팀장은 “한국판 디스커버리제 도입과 함께 정부 부처의 행정조사 결과를 피해 기업이 소송에서 활용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회승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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