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8일(현지 시각) 백악관 루스벨트룸에서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제재의 하나로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8일(현지 시각) 미국의 러시아산 원유·가스 수입 금지 발표는 국내외 에너지시장에서 상정하고 있던 최악의 시나리오에 근접하는 수준이다.
일단은 미국 독자적인 제재 모양새를 띠고 있지만, 동맹국들도 잇따라 동참에 나설 수 있다. 미국 단독 제재만으로도 석유시장을 비롯한 국제 에너지시장에 심리적으로 작지 않은 충격파를 던지고 있다. 원유 가격 상승은 전반적인 원자잿값 상승으로 이어지며 실물경제 전반에 원가 상승 부담을 가중시키는 요인이다. 미국의 조처에 맞서 러시아 쪽이 곡물과 광석 등 원자재 수출을 차단하겠다고 경고하고 나서면서 에너지 시장의 혼돈 양상이 원자재 시장 전반으로 번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부문 담당자는 9일 “미국의 조치(러시아산 원유 수입 금지)는 유가에 상당한 충격이 될 것”이라며 “(배럴당) 150달러 돌파는 쉽게 이뤄질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뒤 급등세를 탄 국제유가는 현재 120~130달러대를 형성하고 있다. 두바이유 기준 1월 평균치 83달러, 2월 92달러에서 대폭 오른 수준이다. 산업부 담당자는 “미국 외 다른 나라들의 참여 범위가 중요할 텐데, (우리 쪽은) 정무적이랄까 외교적 판단을 해야 하는 사항이라 조심스럽고 지켜봐야 할 것 같다”며 “4대 정유사와 연락망을 유지하며 사태를 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의 수입 원유 중 러시아산 비중은 지난해 기준 3% 정도로 크지 않다. 휘발유와 디젤 생산에 필요한 연료유 등 석유제품까지 포함해도 8% 수준이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미국이 러시아에서 들여오는 원유 수입 물량은 하루 60만 배럴 규모다. 전 세계에서 하루 공급되는 물량 1억배럴에 견주면 미미하다. 동맹국들의 참여 없이 미국만의 독자적인 러시아산 수입 금지만으로는 시장 전반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다. 한국의 러시아산 수입 의존도는 원유 5.6%, 천연가스 6.2% 수준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추가적인 유가 폭등에 대한 우려가 나오는 것은, 우선은 원유 거래의 속성 때문이다. 원유는 일반 상품과 달리 선물로도 거래되고 금융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다. 따라서 심리적인 영향을 크게 받고 돌발 악재에 단기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해 움직인다. 산업부 관계자는 “원유 가격은 시장이 조금만 불안하면 확 오르고 내려 들쑥날쑥하다”며 “(미국의 이번 조치는) 유가에 굉장히 많은 영향을 주는 쪽으로 반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천연가스에 견줘 원유 도입에서는 장기계약 물량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도 있다. 산업부에 따르면, 국내에서 천연가스는 전체 물량의 80%를 장기계약 형태로 들여오는데 비해 원유 도입에선 이 비중이 50% 수준이다. 조달 통로가 막히지 않더라도 가격 급등에 따른 충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조상현 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그동안(우크라이나 사태 이전) 국제유가가 크게 떨어지고 하향 안정될 것이란 전망이 많아 (국내 에너지 업체들이) 원유를 현물시장에서 구매하는 비중을 높여오던 터였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가격 상승에 따른 원가 상승 부담이 커졌다는 설명이다.
동맹국들이 미국의 제재에 동참하고 나설 경우 파장은 더 넓게 퍼지게 된다. 영국은 이미 올해 말까지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단계적으로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러시아 제재에 따라 시장에 나오지 못하고 잠기는 원유 물량이 더 많아질 수 있다. 석유 수출 2위 국인 러시아가 수출하는 원유 물량은 하루 기준 450만 배럴 수준이다. 유럽연합(EU)의 러시아산 원유 수입 의존도는 미국보다 훨씬 높아 25% 수준에 이른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이달석 명예선임연구위원은 “러시아 에너지에 대한 미국의 공식 제재는 이미 (유가가 급등세 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흐름을 가속화시키는 것”이라며 “동맹국들이 동참하면 영향은 더 크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가격 수준이 일부 투자은행들에서 전망한 것처럼 극단적인 수준(180~200달러)까지 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민간 부문에서 우크라이나 사태 뒤 러시아산 비중을 줄여 일정부분 가격 상승에 반영됐고, 재고 물량을 꺼내 쓰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이 위원은 “에너지 정보 업체들 추정치를 보면, 전 세계 민간 부문에서 지난주 기준 러시아 에너지 도입량을 (평소 대비) 3분의 1가량 줄인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김영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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