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미국 워싱턴주 애나코티스 근해에서 유조선이 정유시설 입항을 기다리고 있다. 애나코티스/AFP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8일(현지시각) 러시아산 석유, 천연가스, 석탄의 수입 중단을 발표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강력한 타격”을 가했다고 강조했다. 냉전 때도 서방에 석유를 팔아온 러시아(당시 소련)를 상대로 일종의 극약처방을 한 것이다.
석유를 비롯한 화석연료는 세입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러시아에는 절대적 존재다. 러시아가 1990년대의 경제 붕괴에서 벗어나는 데 고유가가 큰 몫을 했고, 러시아군을 현대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주변국들을 위협할 수 있게 만든 것도 석유라고 할 수 있다. 석유가 러시아의 ‘전쟁 금고’를 채운 셈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인들은 푸틴의 전쟁에 보조금을 댈 수 없다”고 한 것도 이를 말한 것이다. 백악관은 수입 중단 조처가 액수로는 연간 수십억달러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석유 금수는 미국이 독자적으로 시행하고, 영국이 연말까지 러시아산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이전 제재들에 비해 유럽 동맹국들과 공조 수준이 낮다. 미국의 총수입량 가운데 러시아산 원유와 정유제품 비중은 7~8% 수준이다. 사우디아라비아와 1·2위를 다투는 석유 수출국인 러시아에는 미국으로의 판로가 막혔다는 사실 자체가 결정적이지는 않다.
문제는 흐름이다. 유럽연합(EU)은 러시아산 석유(25%)와 천연가스(40%) 의존율이 높아 금수에 동참하지 못하지만 올해 안으로 러시아산 화석연료 수입을 3분의 2 감축하고 2030년이 되기 전에 완전한 ‘에너지 독립’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석유 메이저들도 잇따라 러시아에서 떠나고 있다. 유럽 최대 석유업체 셸은 원유 매입을 당장 중단하는 것을 비롯해 “모든 러시아산 화석연료 사업에서 철수하겠다”고 선언했다. 러시아 주유소들도 문을 닫겠다고 했다. 미국 엑손모빌과 영국 비피(BP)도 러시아와의 관계를 끊고 수입량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미국은 러시아에 대한 첨단 정유 기술 이전을 금지시켰다.
미국 상무부 잠정 집계를 보면, 러시아산 원유의 미국 수입은 최근 이미 전무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석유 대금=전쟁 자금’이라는 공식이 퍼져 불매운동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흐름이 국제적으로 확산된다면 석유를 기반으로 정치·경제·군사적 영향력을 키운 러시아에는 결정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미국에는 40년 만의 최악의 인플레이션에 대처하기 위해 산유국들을 설득해야 하는 숙제도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산 석유 금수를 발표한 8일 미국의 보통휘발유 평균가는 갤런당 4.17달러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적성국이라고 할 수 있는 베네수엘라에까지 사절단을 보내 증산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드러난 성과는 없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바이든 대통령이 사우디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나 아랍에미리트연합 왕세제 무함마드 빈자이드와 통화하려고 했지만 이들이 연결을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사우디를 설득하려면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방문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온다. 하지만, 2018년 비판적 언론인 자말 카쇼기의 암살을 지시한 것으로 지목된 빈살만과 악수를 할 수는 없다는 시각이 많다. 또다른 변수는 중국이다. 중국이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 수입을 대폭 늘리면, 이번 조처의 효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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