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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경제일반

추정 수익 수천억, 과징금 8억…무게감 없는 “총수에게 지분 양보 말라” 경고

등록 2021-12-22 16:32수정 2021-12-23 02:37

국민연금 주주대표소송 나설까 주목
“민사소송으로 제재 실효성 보완 가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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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거래위원회가 22일 발표한 에스케이(SK)실트론 사건에 대한 결론은 시장에 던지는 경고장으로 읽힌다. 회사가 합리적인 근거 없이 좋은 사업기회를 총수에게 양보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만, 공정위의 메시지가 제기능을 할지는 미지수다. 공정위가 제도를 제때 마련하지 않은 탓에 솜방망이 제재에 그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주주대표소송 같은 민사적 절차가 함께 이뤄져야 유효한 선례로 남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사업기회 적극 인정 “시금석 역할 기대”

공정위의 이번 제재는 10년 가까이 사실상 사문화돼 있던 사업기회 규제를 되살린 것이다. 상법에는 2011년 회사기회 유용 조항이, 공정거래법에는 2013년 사업기회 제공 조항이 도입됐다. 다만, 국내에서는 주주대표소송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상법의 조항을 적용한 판례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공정위에서도 비교적 법리 적용이 쉬웠던 2019년 대림그룹 건을 제외하고는 이번이 첫 사례다.

특히 ‘사업기회’와 ‘제공’의 범위를 넓게 인정했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먼저 경영권과 관련이 없는 소수지분도 사업기회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위해 미국 판례법상의 ‘사업범위 기준’ 이론을 적용했다. 회사가 수행하는 사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합리적으로 이익을 기대할 만한 것이면 사업기회로 인정해야 한다는 학설이다. 또 에스케이㈜가 지분 인수를 포기한 것도 소극적 제공으로서 ‘제공’의 범위에 포함된다고 봤다. 부작위에 의한 제공도 위법성이 인정된다는 취지다.

에스케이실트론 사건은 일종의 시금석 역할을 할 전망이다. 공정위는 이례적으로 보도자료에 쟁점별 판단 기준을 별도로 첨부했다. 육성권 공정위 기업집단국장은 “사업기회 제공 사례 자체가 드문 경우이기도 하고, 또 소수지분 투자와 소극적 방식의 사업기회 제공이라는 특징이 있어서 (쟁점별로 설명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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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방망이 과징금, 왜?…9년째 제도 마련 안해

공정위 제재의 실효성은 물음표로 남았다. 공정위는 이번에 에스케이㈜와 최태원 회장에게 각각 정액 과징금 8억원을 부과했다. 원칙적으로는 최 회장이 부당하게 본 이득이나 위법행위와 관련된 매출액을 기준으로 정률 과징금을 산정했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이다. 최 회장이 실트론 주식으로 실현할 차익이 수천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점을 감안하면 ‘솜방망이’ 제재에 그친 셈이다.

공정위의 발목을 잡은 것은 두가지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이익인 만큼 부당이득을 계산할 수 없었고, 또 자연인에게 직접 제공된 이익이어서 관련 매출액도 산정하지 못했다. 문제는 사업기회 제공 행위의 특성상 이런 사태가 어느 정도 예견돼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사익편취 조항이 도입된 지 8년이 넘었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크다. 사익편취 조항은 회사가 총수 등 자연인에게 직접 이익을 제공하는 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도입됐다. 특성상 관련 매출액 산정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공정위는 과징금 고시 기준에 이런 점을 반영하지 않았다. 위반금액, 즉 부당이득 산정이 어려운 경우에는 ‘사업기회를 제공받은 특수관계인 또는 계열회사의 관련매출액’을 산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육 국장은 “이런 것까지 미처 저희가 생각하지 못하고 과징금 규정을 만든 것”이라며 “충분한 억제력을 발휘하는 수준의 과징금이 산정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주주소송 나설까

이날 공정위는 기자회견에서 ‘상법’을 29번 언급했다. 상법상 회사기회 유용 조항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탓에 공정위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민사소송이 발달하지 않은 국내 환경상 상법의 영역을 공정위가 일부 다뤄온 데 대한 고민도 담겨 있다.

공정위의 제재만으로는 최 회장이 본 이득을 회사와 주주에게 되돌려주는 효과를 내지 못한다. 공정위는 가능한 시정조치 중에서 재발방지 명령만 내리고 주식 처분 명령은 하지 않았다. 최 회장이 총수익스와프(TRS) 계약을 맺은 만큼 에스케이㈜에 지분 매수권을 넘기도록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공정위 내부에서는 주식 처분 명령이 행정 처분으로서는 지나친 조처라고 보는 분위기다.

공은 국민연금 쪽으로 넘어간 모양새다. 상법상 주주대표소송은 1% 이상 지분을 가진 주주가 회사에 대한 이사의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제도다. 국민연금은 에스케이㈜의 지분 8.16%(보통주 기준)를 들고 있어 요건을 충족한다. 국민연금이 소송을 통해 에스케이㈜가 최 회장에게 지분을 양보하면서 본 손해를 돌려받게끔 할 수 있다. 공정위 조사를 통해 물증이 확보된 만큼 일반적인 소송보다는 원활하게 진행될 가능성도 높다.

공정위도 민사소송으로 이번 제재의 실효성이 보완되기를 기대하는 모양새다. 육 국장은 “배상금액이 주주가 아닌 회사 자체에 귀속되기는 하지만, 이번 사안에 주주대표소송이 적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연 기자 ja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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