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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바흐도 한때 “그저 그런 음악가”란 평을 받았다

등록 2022-02-19 08:59수정 2022-02-19 11:09

[한겨레S] 임현정의 클래식 산책
예술과 경쟁

1순위 음악가들 안 와서 겨우 합격
교회와 다투고 당대 인기 없었지만
지금은 최고의 음악가로 사랑받아
경쟁보다는 자기 음악 세계 넓혀야
“친구들아, 음악은 부귀영화의 도구가 아니에요!” 파리국립고등음악원의 교수님은 콩쿠르를 갈망하는 학생들의 말을 이렇게 단칼에 잘랐다. 사진은 임현정씨가 2016년 프랑스의 소도시 릴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 다나기획사 제공
“친구들아, 음악은 부귀영화의 도구가 아니에요!” 파리국립고등음악원의 교수님은 콩쿠르를 갈망하는 학생들의 말을 이렇게 단칼에 잘랐다. 사진은 임현정씨가 2016년 프랑스의 소도시 릴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 다나기획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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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은 왜 국제콩쿠르의 심사위원을 안 하세요?”

“저는 콩쿠르에 최대한 많이 나가고 싶어요.”

“제가 월등히 잘했는데 입상을 못 했어요.… 속상해서 피아노를 못 치겠어요.”

콩쿠르에 모든 미래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파리국립고등음악원의 2003년 같은 반 학생들이 담당 교수에게 늘어놓은 넋두리다. 묵묵히 듣고 계시던 교수님은 한심하다는 듯 우리 말을 단칼에 자르셨다.

“친구들아, 음악은 부귀영화의 도구가 아니에요!”(La musique n’est pas un moyen pour la gloire!)

유명 콩쿠르에 입상해 멋진 커리어를 갖는 것이 현대 음악인의 길이라고 알고 있었던 우리에게 교수님의 말씀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디어에 많이 등장하며 명성을 날리는 음악인들 거의 모두가 그런 경로로 나타났으니 말이다.

바흐 칸타타 중 생전 한 곡만 출간

그러나 모차르트와 베토벤 중에 누가 더 뛰어난지 비교할 수 있을까? 로마상(우승자에게 로마 유학 기회를 주는 프랑스 학사원의 콩쿠르)을 타기 위하여 여러차례 지원했지만, 결국 모두 실패했던 모리스 라벨은 과연 실력이 없는 작곡가라서 떨어진 것일까? 그는 심지어 다섯번째 지원했을 때 “라벨씨는 면목도 없나요, 우리를 바보로 여기지 마세요”라는 심사위원들의 경고까지 받았다! 작곡가 벨러 버르토크는 ‘음악가가 경쟁하는 콩쿠르에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경쟁이란 것은 경마에서나 필요하다'고 말한 바 있다. 경쟁이 시스템화되어 콩쿠르만이 출세의 유일한 길로 음악가의 미래를 지배하고 있을 때, 과연 예술과 경쟁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까?

음악가로서 가장 성공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예로 들어보자. 337년 전에 태어난 바흐가 어떤 자세로 음악에 임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성공에 대한 사회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현대 음악인들에게 흥미로운 영감을 줄 수 있다. 10살에 고아가 된 바흐는 형 집에 얹혀살면서 힘들게 음악 공부를 이어나갔고, 15살인 1700년에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는 성 미하엘리스 교회 기숙사에 들어갔다.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음악 활동을 하는 대신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시스템인데, 아이들이 원하면 귀족들에게 고용되어 구두를 닦거나 각종 심부름을 하며 추가로 돈을 벌 수도 있었다.

독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 앞에 서 있는 바흐의 동상. 위키피디아
독일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 앞에 서 있는 바흐의 동상. 위키피디아

바흐는 1703년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처음 취직을 했는데, 여기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난다. 그 당시 디트리히 북스테후데라는 대단한 오르간 연주자가 있었는데, 바흐는 그의 연주를 들으러 한달 휴가를 허락받고 아른슈타트에서 뤼베크까지 약 500㎞나 되는 거리를 직접 걸어갔다가 온 일이 있었다. 바흐는 그 정도로 북스테후데의 광팬이었다. 바흐는 3개월 동안 무단결근을 하면서 뤼베크에서 4개월을 보냈다! 교회의 추기경단은 그런 바흐에게 경고를 내렸다. 추기경단은 이어 아른슈타트로 돌아온 바흐가 오르간을 연주할 때마다 이상한 화음을 사용하고 신기한 변주를 해서 청중을 혼란에 빠트린다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처럼 바흐는 아른슈타트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있었지만, 거장의 연주를 듣기 위해 왕복 1000㎞나 되는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걸었을 정도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넓히고 음악을 탐구하는 데 목말라했던 청년이었다.

바흐는 그 후 1707년 뮐하우젠의 오르간 연주자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했으며, 1708년 바이마르 궁정과 1717년 쾨텐 궁정의 음악 책임자로 일하면서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러던 중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과 뒤따른 재혼,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으로 인하여 1723년 라이프치히로 이사를 하게 되고, 저명한 성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합창장) 자리에 지원하게 된다. 하지만 바흐의 지원서는 게오르크 텔레만과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 등 여러 음악인에게 밀렸다. 텔레만과 그라우프너가 초청을 거절하는 바람에 비로소 바흐가 뽑히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성 토마스 교회 측에서는 “최고의 음악가들을 초청할 수가 없으니 그저 그런 음악가들로 만족해야 한다”라는, 지금 관점에서는 충격적인 기록을 남긴다. 그때부터 생을 마감한 1750년까지 모두 27년을 이 교회에서 일했던 바흐는 열악한 주거환경과 못된 상사들의 끊임없는 질책, 괴롭힘과 질투를 받으면서 고통스럽게 근무했다. 1730년에 일어난 성 토마스 교회 측과의 다툼으로 월급까지 깎이는 일을 당하자, 자신의 소꿉친구인 게오르게 에르트만에게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호소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바흐는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300여곡이 넘는 칸타타를 작곡했지만, 살아생전에는 단 한곡만 출판됐다.

전문가들에게는 존경과 칭송을 받았던 바흐지만, 동갑의 헨델이나 세살 어린 비발디처럼 당대의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바흐는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오페라나 굉장한 기교와 친근한 멜로디로 사람들의 청각을 자극하는 음악을 하지 않았으며, 학구적인 음악과 교회음악을 추구했다. 어떤 음악이 더 좋고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절대적 전설이 된 바흐의 음악이 그가 생존했을 당시에는 대중성도 없었고, 명성을 얻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전설적 예술가 탄생의 비결

천재 신동이라는 타이틀로 어릴 적 큰 명성을 얻었지만, 어렵고 힘든 말년을 보냈고 묘지 관리인만 지켜보는 가운데 쓸쓸히 묻혀 지금까지 유해조차 찾지 못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 어떤 존경이나 인정도 받지 못한 채 가난에 찌들어 죽음을 맞이했지만, 끊임없이 연민과 인류애의 예술을 추구했던 반 고흐. 생전에는 부귀영화와 너무나 거리가 멀었던 그들은 지금 최고의 전설이 되어 있다. 무엇이 어떤 이들은 ‘그저 그러한’ 예술인으로 만들고, 때로는 최고의 전설로 만드는 것일까?

그들이 남긴 편지나 기록들을 읽어보고 작품을 가까이하면 한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다. ‘최고의 전설’들은 자신의 주변 상황이 어떻든, 주위의 평이 어떻든, 그저 묵묵히 자신의 예술과 임무에 충실히 임했다는 점이다. 주변에서나 사회적으로 견딜 수 없는 모욕이 지속되더라도 말이다. 그들은 순수하게 예술을 위하여 임했고, 절대적으로 예술을 사랑하는 헌신적인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점이 바로 시간을 뛰어넘어, 그들의 작품이 내뿜는 아름다움에 우리가 지금 심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아닐까. 이들이 전설이 되기까지 약 1세기 이상이 걸렸다고 가정할 때 지금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전설들이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을까?

피아니스트, 서울대 산업수학센터(IMDARC) 자문위원. 프랑스 국립음악원 피아노과를 최연소 수석 졸업했으며, 영국의 음반회사 이엠아이(EMI)에서 2012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앨범을 내면서 데뷔했다. 독창적이고 대범한 곡 해석으로 유명하며, 음악에서 자유를 추구한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씨.
피아니스트 임현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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