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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음악으로 뻣뻣한 프랑스 공직자들을 꺾다

등록 2022-01-30 15:54수정 2022-01-30 16:28

[한겨레S] 임현정의 클래식 산책
유니버설 언어

모두 동등한 ‘음악 언어’ 배우려 유학
체류증 갱신 공무원의 인종차별에
“내 미래 망하면 책임질 건가” 항의
음악 이야기에 그들 마음도 움직여
“클래식은 엘리트의 음악이라고 생각하거나 사전에 교육을 받아야만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오히려 백지상태에서 클래식 음악을 접할 때 편견 없이 감정적으로 있는 그대로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다.” 2014년 일본 오사카 심포니홀에서 협연 중인 임현정씨. 사진 다나기획 제공
“클래식은 엘리트의 음악이라고 생각하거나 사전에 교육을 받아야만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오히려 백지상태에서 클래식 음악을 접할 때 편견 없이 감정적으로 있는 그대로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다.” 2014년 일본 오사카 심포니홀에서 협연 중인 임현정씨. 사진 다나기획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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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내 나이 만 13살.

프랑스에 온 지 1년이 지나 루앙 국립음악원 입학을 앞두고 체류증을 신청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관련 기관으로 발을 향한다. 오전만 운영하는 기관이라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결석하고 일찍 도착했지만, 로비는 번호표를 받기 위해 줄 서 있는 외국인들로 꽉 차서 발을 디디기도 힘들다. 닫혀 있는 창구들 뒤에는 우리들의 기다림은 아랑곳없이 음료를 마시며 떠들기 바쁜 직원들이 보이고, 열려 있는 창구들 뒤에는 불어를 못하는 외국인들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는 직원이 보인다. 세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내 차례는 오지 않는다. 곧 점심시간이 되면 오전만 일하는 이 기관은 문을 닫아버릴 것이다. 그러면 다음날 또 와서 같은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이곳의 외국인들은 매년 이런 고생을 감수하면서 체류증 갱신을 해야 하고, 나 역시 프랑스에서 공부하려면 매년 같은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러다간 공부도 못하고 큰일 나겠다 싶은 생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된 나는 벌떡 일어나 닫힌 창구 앞으로 갔다. 웃으며 떠들고 있는 직원 앞에 산더미처럼 준비해 간 나의 서류들을 쿵! 내려놓았다. “당신이 이렇게 떠들고 있는 시간은 제가 학교에서 공부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걸 지금 뺏고 있는 거예요. 제가 맨날 여기 오느라 학교를 계속 결석해서 제 미래가 망하게 되면 책임지실 건가요? 당신은 저의 미래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게 소리치자, 직원은 창구를 열었고 나는 가까스로 서류를 제출할 수 있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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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세계인권선언 구절

언어, 국경, 인종, 종교 등을 초월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소통하는 유니버설한 언어인 음악, 그 언어를 배우려고 프랑스에 간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특히 내 주변의 또래 친구들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필요도 없이 편안하게 학교 다니고 있는데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고귀한 나의 기본권을 침해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런 상황이 부당하게 느껴졌다.

물론 체류증 관련 업무를 맡은 직원들의 삶을 상상해보면 그들의 마음도 헤아려진다. 말도 안 통하는 수많은 외국인의 요청을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리고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듯이 체류증을 제출하고 비자를 신청해야 하는 것, 옳고도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지구 반대편에서 홀로 인종차별을 당하는 부당한 일을 겪었던 나로서는 인간의 기본권에 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마리의 지렁이도 비자 없이 국경을 지나다니고, 하늘의 새들도 여권 없이 자유롭게 국경을 왔다 갔다 하는데, 만물의 왕이라고 하는 인간들이 지구 땅에 존재하기 위하여 이토록 힘들게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인간의 기본 권리를 누리기 위하여 이토록 많은 과정을 거치고 고생을 해야 한다는 현실이 꿈으로 가득 찬 어린 마음을 억울함과 서러움으로 채웠다.

강자들의 마음이 굳게 닫혀 있을 때마다 나는 피아노와 음악 이야기를 했다. 내가 왜 당신들 나라에 와서 이 고생을 하면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하고 있는지, 음악이야말로 유니버설한 언어이며 음악 앞에서는 모두가 동등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이렇게 체류증 갱신을 신청한다고 말했다.

9000㎞나 떨어진 땅에서 태어난 내가 수백년 전에 태어난 그들 나라의 작곡가들을 이해하고 연주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시공간과 국경을 초월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를 모두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그 위대한 힘, 그것이 음악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세계인권선언의 조항들이다.

제1조. 모든 사람은 자유로운 존재로 태어났고, 똑같은 존엄과 권리를 가진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타고났으므로 서로를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 한다.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견해 또는 그 밖의 견해, 출신 민족 또는 사회적 신분, 재산의 많고 적음, 출생 또는 그 밖의 지위에 따른 그 어떤 구분도 없이, 이 선언에 나와 있는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제3조. 모든 사람은 생명을 가질 권리, 자유를 누릴 권리, 그리고 자기 몸의 안전을 지킬 권리가 있다.

제13조2. 모든 사람은 자기 나라를 포함한 어떤 나라로부터도 출국할 권리가 있으며, 또한 자기 나라로 다시 돌아올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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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클래식

만약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지구인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국적이라면 어떤 느낌일까? 아니, 그냥 한 지구인이라는 것 자체만으로 형제애가 형성된다면 어떨까? 나는 상상하곤 한다. 갑자기 모든 지구인의 언어가 다 이해되고 다를 것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 강렬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라는 말이 실감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모두 하나고 똑같다.

1. 배고플 때 먹을 수 있어야 하고 2. 추울 때 따듯하게 해야 하며 3. 목마를 때 마셔야 하고 4. 안전하게 잠을 잘 장소가 필요하고 5.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의 인생이 펼쳐져 나간다. 심지어 이 다섯 가지 점들은 동물들도 하나도 다르지 않고 똑같다. 이렇게 필수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똑같이 필요로 하는 우리들끼리 서로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굳이 어려운 일일까?

나에게 인간은 모두 동등하다는 것을 가장 잘 알려주는 것은 바로 음악이다. 수준 높다고 생각하는 클래식 음악도 대통령이든 무직자든 누구든지 들을 수 있고, 깊은 울림을 받을 수 있다. 클래식은 엘리트의 음악이라고 생각하거나 사전에 교육을 받아야만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물론 지식과 함께 들을 때 더 흥미진진한 부분도 있겠지만, 오히려 백지상태에서 클래식 음악을 접할 때 편견 없이 감정적으로 있는 그대로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나라는 도시마다 아주 아름다운 장소에 공연장을 만들어 놓아서 그곳에 가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수 있다. 특히 저렴한 티켓 가격으로 볼 수 있는 공연이 너무도 많다. 내가 기획하는 공연들만 해도 파격적인 할인을 제공하는 것이 많다. 우리가 서로 긴밀히 연결된 공동체라는 것과 우리의 숭고한 본질을 일깨워주는 클래식 음악을 공연장에서 맛보는 것은 어떨까. 새해를 맞이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근사한 선물이 아닐지.

피아니스트, 서울대 산업수학센터(IMDARC) 자문위원. 프랑스 국립음악원 피아노과를 최연소 수석 졸업했으며, 영국의 음반회사 이엠아이(EMI)에서 2012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앨범을 내면서 데뷔했다. 독창적이고 대범한 곡 해석으로 유명하며, 음악에서 자유를 추구한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씨.
피아니스트 임현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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