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곡가의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존재의 모든 측면을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우리 자신의 진실에 빛을 비추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씨가 지난 5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리스트의 초절기교 에튀드 전곡 연주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박상윤, 다나 기획 제공
연주자는 작곡가 심부름꾼 아냐연주자 자신의 내면에 솔직하면작곡가 의도와 나의 개성이 일치맘껏 개성 펼친 베토벤에게 배워야
살면서 한 번쯤은 개성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을 것이다. 예술인들에게는 특히 무시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개성인데, 개인적으로 나는 십대 때 작곡가의 본래 의도와 그것을 나만의 개성으로 연주하는 데에서 큰 혼란을 겪은 경험이 있다. 음악에는 두 학파가 존재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쪽은 작곡가의 심부름꾼이 되어서 자신의 개성은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작곡가의 의도만 전달하는 ‘고결한 연주’(주로 바흐, 베토벤, 슈베르트 음악을 통하여)를 지지하는 부류이고, 반대쪽은 프란츠 리스트같이 찬란한 스타성을 발휘하여 음악이 자신의 개성을 빛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비르투오소적인 연주’(주로 낭만파 음악을 통하여)를 지지하는 부류가 있다.
이 사이에서 전자를 선택하면 작곡가의 의도는 살릴 수 있지만 나의 개성을 억제하게 돼 고민이고, 후자를 택하면 나는 자유로워지지만 작곡가에 대한 존중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서 브레이크가 걸리게 된다. 결국, 그 둘 사이에 갇혀서 헤어나오기 힘든 상황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깨달은 점이 있다. 주로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탐구하며 깨달은 바인데, 그의 음악을 연주하면 할수록 그의 작품들은 내면적, 외면적, 영적인 삶을 닮아 있는 하나의 일기장이라는 것이다. 그의 음악은 그의 삶에서 일어났던(낭만적, 비극적, 정치·사회적, 때로는 영적인) 사건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고, 내면적인 심리 상태나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이 있으며 여기에는 우정, 감사, 명예, 심지어 상징적인 요소마저 있었다. 그런 면에서 작곡가를 둘러싼 편지나 개인적인 기록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한 부분이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베토벤이 느꼈던 사랑과 분노, 희로애락 등 모든 감정을 나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베토벤의 가슴속에 뛰고 있는 그 심장은 결국 내 안에 뛰고 있는 심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과연 음악은 마음의 소리라는 점에서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 모두를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위대한 매체다.
그러므로 한 치의 위선 없이 진정으로 작곡한 베토벤의 음악을 두고 굳이 작곡가의 의도와 나의 개성을 분리할 필요 없이 음악인인 나 역시 진정성 있게 가장 솔직하게 연주를 하면 베토벤의 마음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베토벤의 치열한 삶을 알고 그의 운명 교향곡을 그대로 느끼고 연주하면 그가 왜 메트로놈 지시로 이분음표=108, 즉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템포 지시를 해놓았는지 마음으로 느끼게 되고, 연주자로서 그의 치열함과 하나가 돼 목숨을 걸고 연주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한 작곡가의 음악을 연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해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 존재의 모든 측면을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우리 자신의 진실에 빛을 비추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결국 음악은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훌륭한 내면관찰의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하늘에서 내리는 수많은 눈송이 중에서 같은 결정체는 단 하나도 없고, 수많은 사람의 지문 중 같은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참 경이로운 사실이 아닌가. 지구에 온 순간부터 우리는 모두 각자 전무후무하며 유일무이한 것이다. 존재 그 자체로 유니크한 것이다. 나에게 개성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 자신이 온전히 진정으로 표현될 때 다른 이들은 그것을 개성으로, 혹은 유니크함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는 그 자체로 벌써 유일무이하기 때문이다. 개성을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도, 특별하게 보이는 다른 사람을 닮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냥 자기 자신이기만 하면 된다. 나 역시 그저 베토벤의 원천적인 의도에 다가가기 위하여 역사적, 정치적 배경을 살피고 그의 심적, 영성적인 탐구를 바탕으로 내가 진정으로 느끼는 바를 최대한 솔직하게 표현한 것뿐인데(물론 베토벤 본인과는 상관없는, 그가 죽고 난 뒤에 생긴 전통과 관습 등으로 정해져 있는 기존 틀에서는 의도치 않게 벗어나는 경우가 없지 않겠지만) 개성 있다, 파격적이다, 독특하다는 평을 듣게 된 것이다!
고유의 나를 그대로 존중하고 표현하여 세상에 나라는 유일한 존재를 누릴 영광을 선물로 주는 것이다. 만약 내가 나를 무시하고 다른 누군가를 닮으려고 한다면 도리어 고유한 ‘나’라는 존재를 누릴 권리를 세상으로부터 뺏는 것이다. 나는 이미 유일한 존재인데, 그것을 벗어나 무언가 다른 개성을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벌써 각자 그들이고, 나는 나 자신이 아닌가?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예술작품인 자기 자신, 그 유니크함을 존중하는 것. 개인적으로 쉽진 않지만 꼭 시간 내서 해보려고 노력하는 숙제이다.
1801년 기존 틀을 깬 자신의 작품에 대해 평론가들이 가혹한 비평을 늘어놓자, 베토벤은 출판사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마음껏 말하도록 내버려 두시오. 그런다고 해서 그 누구도 불멸의 존재로 만들 수 없거니와, 또 아폴로 신만이 수여할 수 있는 불멸의 영예를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그 후에 가혹한 비판의 원인이 되었던 그 화성들을 교향곡 1번에 또다시 도입하게 된다. 비판에 굴복하지 않은 채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펼친 베토벤의 음악을 우리는 과연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주해야 하고 들어야 할까.
음악가로서 나는 과연 베토벤처럼 나의 영혼을 예술로 당당하게 표현하고 있을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자신이 지닌 예술성을 자유롭게 드러내는 음악가들이 많아야 청중도 함께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음악인이 어떠한 성취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고유함을 억누른 채 연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예술인으로서 무대에 서는 순간 청중의 반응에 민감해지는 경우가 있다. 반응이 좋으면 기뻐하게 되고, 나쁘면 울적해지곤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연주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신조차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예술에 정답은 없지 않을까라고 지난 칼럼에서 말한 바 있다. 우선 나부터 나의 마음에 드는 음악을 해야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들거나, 또는 들지 않을 수 있기에 나 자신에게 먼저 떳떳한 음악을 추구하고 내가 정말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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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서울대 산업수학센터(IMDARC) 자문위원. 프랑스 국립음악원 피아노과를 최연소 수석 졸업했으며, 영국의 음반회사 이엠아이(EMI)에서 2012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앨범을 내면서 데뷔했다. 독창적이고 대범한 곡 해석으로 유명하며, 음악에서 자유를 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