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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쇼팽 ‘흑건’이 프랑스 교실의 인종차별을 깼다

등록 2021-11-06 10:40수정 2021-11-08 15:52

[한겨레S] 임현정의 클래식 산책
33㎝의 여행
“음악은 모든 것을 안아주며 포용하는 바다 같다. 그런 언어를 다루는 음악인인 만큼 그것이 우리에게 누리게 하는 영적, 정신적, 심적인 자유로움은 그 어떤 것과도 양보할 수 없다.” 피아노를 치는 임현정씨의 손.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음악은 모든 것을 안아주며 포용하는 바다 같다. 그런 언어를 다루는 음악인인 만큼 그것이 우리에게 누리게 하는 영적, 정신적, 심적인 자유로움은 그 어떤 것과도 양보할 수 없다.” 피아노를 치는 임현정씨의 손.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사람들은 “제가요”라고 말할 때 머리가 아닌 가슴에 손을 얹는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핵심이 머물러 있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을 때가 가끔 있는데, 어느 순간 그 어려웠던 것이 가슴을 후려치는 ‘당연함’으로 오는 때가 있다. 뼈저린 아픔을 겪었을 때, 직접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하여 깊은 공감을 하게 되었을 때, 그 깨우침의 소낙비가 쏟아진다.

노력할 필요도 없이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옮겨지는 그 순간, 바로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 진행되는 순간이 온 것이다. 그 여정으로 나를 인도했던 두 문구가 있는데 바로 “우리는 모두 동등한 인간이다”와 “음악은 유니버설한 언어다”가 그것이다. 나는 만 세살에 피아노를 시작해서 만 열두살이던 1999년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프랑스에 가면 만화에서만 보았던 눈도 파랗고 머리도 노란 신기한 외국인들을 만날 거라는 생각에 어린 내 가슴은 기대로 잔뜩 부풀어 올라 있었다. 어린 나는 정작 그들 눈엔 내가 외국인으로 비칠 수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막상 도착하니 또래 아이들은 눈을 손으로 쫙 찢고서는 “칭총, 칭총” 하며 날 동양인이라고 놀려댔고, 어른들은 동물원의 동물을 보듯 나를 바라보았다. 하루아침에 나는 타국에서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는, 언어까지 못하는 이방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말 대신 음악으로 나를 표현

‘봉주르’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던 나는 자신을 설명하거나 그들에게 대항할 수가 없었다. 당시 프랑스는 살인적인 태풍이 몰아친 가을이었고, 내 마음도 벼랑 끝에서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난, 진정으로 음악을 만나게 되었다. 비록 프랑스 언어는 구사할 수 없었지만, 전세계인이 다 알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언어는 국경·전통·문화·종교·인종을 초월해 가슴에서 가슴으로, 영혼에서 영혼으로 바로 통하는 언어, 내가 한글을 읽고 쓰기도 전에 먼저 배운 ‘모국어’, 바로 음악이다. 종이 위에서 춤추는 음표들은 콩나물과 같았고, 피아노의 음성은 따뜻한 엄마의 품과 같이 따뜻했다.

어린 동급생들의 인종차별을
음악 시간 피아노 연주로 극복
짧은 연주로 국경·언어 뛰어넘어
“음악은 유니버설한 언어” 실감

평소와 다름없는 어느 날이었다. 음악 시간에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며 말씀하셨다. “림(Lim), 앞으로 나와서 피아노 연주를 해보렴.” 당황한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은 진정시켰지만, 만감이 교차한 내 마음은 다리를 마비시켰다. 칠판 앞에 있는 피아노는 사형대처럼 보였고 거기까지 걸어나가는 데 몇십년이 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는 순간, 나는 선택의 여지 없이 날 적대시하는 아이들의 공격에 피아노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쇼팽의 ‘흑건’을 연주했다. 이 작품은 오른손이 검은 건반만 연주해서 ‘흑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곡을 시작한 순간, 모든 것은 다 사라지고 나와 흑건만이 존재했다. 어느새 나는 열두살의 소녀로 돌아갔고, 이방인이 된 사실도 잊어버린 채 그저 피아노 건반과 재밌게 노는 천진난만한 소녀가 되어버렸다.

연주가 끝나자 묘한 침묵이 교실을 덮었다. 영원과 같았던 그 침묵의 순간이 흐르는 동안 모두와 친해지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실패로 끝나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한명씩, 조금씩 박수를 치기 시작하더니 결국 다 같이 환호하며 찬사를 보냈다. 쉬는 시간이 되자 반 아이들은 처음으로 내게 다가와 진심으로 다정하게 말을 걸었고 친구가 되고 싶어 했다. 지금까지 내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말을 음악이 대신 해준 것이다. “나도 너희들과 똑같이 엄마 배 속에서 나온 한 아이일 뿐이야. 너희들처럼 생각하는 머리와 느끼는 심장이 있어. 서로 다른 개성과 모습이지만 우리는 모두 동등한 인간일 뿐이야.”

“피아노만 잘 치면 뭐하냐”는 가르침

피아노는 두려움을 극복시키면서 내 마음 그대로를 전달해주었다. 단 몇분의 음악은 9000㎞의 거리로 떨어져 있는 언어와 국경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했고, 음악은 이렇게 나와 바깥세상을 연결해주는 가장 멋있는 다리이자 고유한 언어가 되었다. 내 영혼은 피아노를 통해 세상과 대화하게 되었고, 그때 나는 진정으로 음악을 만났다. 피아니스트라는 것이 그저 막연한 꿈이 아닌 사명으로 다가왔고, 직업이 아닌 존재 이유로 다가왔다. 음악이 ‘유니버설한 언어’라는 표현은 언어의 개념을 뛰어넘어 ‘생존 키트’로 다가왔고, 부당한 인종차별을 직접 당하면서 본질적으로 우리는 모두 얼마나 동등한 인간인지를 피부로 느꼈다. 좁은 우물 안 개구리가 갑자기 끝도 없이 넓은 대서양을 보며 정신이 확 열린 것이다. 진짜 여행은 한국과 프랑스를 가로지르는 9000㎞가 아니라 머리에서 가슴까지 33㎝의 여행이었다.

음악은 모든 것을 안아주며 포용하는 바다 같다. 그런 언어를 다루는 음악인인 만큼 그것이 우리에게 누리게 하는 영적, 정신적, 심적인 자유로움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 또한 이것은 끊임없이 내 존재의 실체를 알게 해준다. 나 임현정은 피아니스트이기 이전 피아노를 도구로 음악을 하는 음악인이고, 더 나아가 음악을 수단으로 예술을 하는 예술인이다. 그리고 예술인이기 전에 한 인간일 뿐이다. 모두와 똑같이 목마를 땐 마셔야 하고, 배고플 땐 먹어야 하며, 졸릴 때는 잠을 자야 하는 생명체이다. 이렇게 가장 기초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모두 상호의존하고 연결된 공동체이다. 그래서 부모님이 나에게 어렸을 때 수도 없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 같다. “피아노만 잘 치면 뭐 하냐? 사람이 먼저 돼야지. 인간이 되어서 인간 도리를 먼저 하고 피아노를 해라.” 그 말은 과연 지금까지도, 그리고 평생 공부해야 할 나의 숙제로 남아 있다.

피아니스트, 서울대 산업수학센터(IMDARC) 자문위원. 프랑스 국립음악원 피아노과를 최연소 수석 졸업했으며, 영국의 음반회사 이엠아이(EMI)에서 2012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앨범을 내면서 데뷔했다. 독창적이고 대범한 곡 해석으로 유명하며, 음악에서 자유를 추구한다.

피아니스트 임현정씨.
피아니스트 임현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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