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스 101 시즌2>의 방송 장면. 엠넷 제공
바야흐로 조작의 시대다. 음악과 추억을 이야기하는 칼럼이니만큼 대중음악 분야만 한정해서 봐도 그렇다. 신신애씨의 노래 ‘세상은 요지경’이 지금 등장했다면 유튜브 조회 1억뷰는 그냥 넘겼을 테지.
세상은 요지경 속이다. ‘여기도 짜가 저기도 짜가, 짜가가 판을 친다.’ 국민의 선택으로 아이돌을 키운다는 취지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에 대한 수사 결과가 나왔는데, 시즌 4뿐만 아니라 첫 시즌부터 모든 방송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담당 피디와 책임 피디가 작당하여 그룹 워너원의 경우에는 탈락자와 합격생을 바꿔치기했고, 아이즈원과 엑스원의 경우엔 아예 멤버들을 미리 정해두고 국민에게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방송을 했단다. 그래 놓고 피디라는 인간은 강남 유흥주점에서 수십차례 접대를 받고 향응을 즐겼다니….
투표에 참여한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방송사를 믿고 온 힘을 다했다가 탈락한 연습생들, 심지어는 발탁이 되어 활동하고 있는 아이돌 멤버들까지 모두 피해자다. 최근 들어 나이 어린 연예인들이 잇따라 자살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건 그냥 제작진 몇명 구속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방송사 쪽에서 직접적인 피해자들만이라도 피해 보상과 상담 치료를 제공해야 마땅한 일이다.
이 와중에 음원 사재기 논란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블락비 멤버 박경이 공개적으로 다른 가수들의 실명을 들어 사재기 의혹을 제기했고, 거명된 가수들은 의혹을 부인하며 박경을 고소한 상황이다. 바이브와 송하예, 임재현 등등의 가수들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지만, 그들이 받는 의혹과 별개로 가요계에 음원 사재기 행위가 만연해 있다는 증언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제안을 받았다는 가수와 기획사는 물론이고, 사재기 업체 쪽에서 아예 노래를 만드는 과정에서부터 개입한다는 제보도 있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순위 조작 파문 때부터 예견할 수 있는 문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세부적인 작업 방식은 다르겠지만 사실을 왜곡해 대중을 속이고 이익을 취한다는 점은 똑같다. 현물을 사들이는 1차원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던 출판계 사재기의 진화된 형태로 볼 수도 있겠다. 대응책 마련도 쉽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실시간 차트를 아예 없애고 최소 일간이나 주간 인기 차트 정도로 바꾸는 방법이 그나마 현실성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미 몇년 동안 방송과 국민투표 결과를 통째로 조작한 범죄들이 낱낱이 밝혀지고 있는 지금, 뭘 어떻게 한들 조작 의혹을 완전히 피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이런 주장을 하는 분들도 있다. 차트를 아예 없애자고. 그럴 순 없다. 차트란 그저 어떤 노래를 사람들이 제일 많이 듣고 어떤 음반이 제일 많이 팔리는지를 보여주는 현황판에 그치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음악 차트인 빌보드지의 경우를 보자. 무려 19세기에 시작한 이 차트는 현재 노래와 음반을 다루는 두개의 메인 차트 외에도 백 종류가 넘는 서브 차트를 거느리고 있다. 차트는 분류와 추천의 기능을 수행한다. 무수한 플랫폼을 통해 무제한적인 노래와 영상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지만 그걸 다 듣고 볼 시간은 없는 우리에게 차트가 필요한 이유다. 그러니 더더욱 차트는 공정해야 한다. 빌보드 역시 차트 집계 기준과 관련한 논란이 적지 않았으나 끊임없이 쇄신하고 변화하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선정 기준을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많지만,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차트가 무엇이냐고 무작위로 물어보면 가장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빌보드를 꼽을 것이다. 과연 지금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가요 차트 중에서 신뢰와 권위 운운할 만한 차트는 뭐가 있을까? 20년, 30년 뒤에도 살아 있을 차트는? 순위 프로그램은?
개인적으로도 음악을 사랑하고 또 20년 동안 방송을 만들어온 현직 피디가 보기에 올해 2019년은 가요 역사상 최악의 해다. 참담하다. 조작으로 만신창이가 된 가요계가 한달도 안 남은 올해 안에 정화될 리가 없다. 부디 내년에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차트와 순위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그 옛날 1848년에 출판된 어느 고서적의 첫 문장을 적어본다.
‘공산주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이렇게 바꿔 적어보면 어떨까. ‘조작의 유령이 가요계를 배회하고 있다.’
함께 지은 책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을 촉구한다. 2019년이 저물어가는 언덕 위에서 나는 가요계 관계자들의 혁명을 촉구하고 싶다. 음악이란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끔 들러 한 모금 물을 떠 마시는 샘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 소중한 샘에 침을 뱉고 독을 푸는 자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혁명이라도 해서 그자들을 쫓아내야 한다. 조작 방송이나 음원 사재기와 관련한 기사를 보면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는 댓글이라도 달아주자. <에스비에스>(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제보를 수집 중이라고 하니 아는 내용이 있는 분들은 제보를 부탁드린다.
이재익 ㅣ 에스비에스 피디·정치쇼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