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목은 시대에 따라 가치가 변한다. 도전, 절제, 엄격, 관용, 혁신, 기본, 저축, 소비 등 우리가 덕목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서로 상충하며 제각각의 방향을 가리킨다. 마치 주식시장에서 돈이 몰리는 테마가 그때그때 변하듯 시대에 따라 환영받는 덕목도 달라지고 시대에 맞지 않는 덕목은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개인주의로 치닫는 세태를 우려하며 타인과 친밀한 교류를 권하던 시대,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여행하고 배우고 문화를 교류하기를 권하던 시대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거리두기가 미덕이고 국경을 닫아거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인간의 처세에서는 늘 유효한 덕목들이 있으니 그중 하나가 겸손이다. 오늘은 내가 아는 가수 중 가장 겸손하지 못한 가수가 부른 노래를 소개하려 한다. 30년 전 조영남이 발표한 ‘겸손은 힘들어’.
사전적 의미에서 겸손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를 뜻한다. 1940년대생인 조영남의 긴 인생을 아무리 훑어봐도 겸손과는 거리가 멀다. 이건 소위 ‘디스’가 아니라 파란색을 파란색이라고 부르는 정도의 무난한 개념 정리다. 군 복무 논란부터 친일 발언과 저술, 불륜과 이혼에 대한 태도, 영역을 가리지 않는 거침없는 자기표현, 요즘 같으면 성희롱으로 당장 퇴출당하고도 남을 행동을 방송에서 하는 모습을 보면 어안이 벙벙할 따름. 최근 있었던 그림 대작 사건 역시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는데 대법원까지 가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처럼 그의 언행은 보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진다. 그는 자유와 방종, 솔직함과 뻔뻔함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살아왔다.
가수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박하다. 사람들은 그가 번안곡이나 부르고 ‘화개장터’ 한 곡 외에는 자기 노래가 없는 가수라고 깎아내리기도 하는데, 그 평가는 부당하다. ‘딜라일라’나 ‘제비’를 비롯해 그가 부른 무수히 많은 번안곡은 그 시대에는 다른 가수의 창작곡 못지않은 인기를 얻었고 지금의 잣대로 그런 활동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화개장터’를 비롯해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들도 꽤 있는데, 몇년 전에 리쌍이 리메이크하기도 한 ‘겸손은 힘들어’도 그중 하나다.
필자는 이 노래가 수록된 음반을 참 좋아한다. 물론 음반이 발매된 1991년에 고등학생이었던 필자는 조영남의 노래를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고, 방송국에 입사해 옛날 가요들을 공부하다가 뒤늦게 이 음반을 만났다. 그가 작사·작곡한 타이틀곡은 로큰롤 편곡과 여전히 성악가의 발성이 남아 있는 그의 보컬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명곡이다. 화려한 악기 구성의 타이틀곡과 정반대로 ‘겸손은 힘들어’는 오직 어쿠스틱 기타의 심심한 반주 위에 얹힌 아카펠라다. 신입 피디 시절, 여의도 음반실에서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음악적 대담함에 충격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가사를 보자.
‘세상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세상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많고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중엔 내가 최고지/ 나보다 잘난 사람 또 있을까? 나보다 멋진 사람 또 있을까? 겸손 하나 모자란 것 빼고는 내가 당대 제일이지/ 돌아가신 울 아버지 울 어머니, 날더러 겸손하라 겸손하라 하셨지만 지금까지 안 되는 것 딱 한 가지, 그건 겸손이라네.’
손뼉까지 치며 겸손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외치는 이 노래는 지금 보면 얼마나 솔직한 자기 고백인지. 연예인이 이렇게까지 솔직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정작 국민 앞에 솔직해야 할 위정자 중엔 솔직하기는커녕 뻔뻔하기만 한 작자들이 득실거린다.
앞에서 겸손의 사전적 의미를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라고 했는데, 사회적 의미는 좀 더 확장된다. 특히 정치인이나 고위 공직자들에게 있어서 겸손의 핵심은 신중하고 조심하는 태도가 아닐까. 이는 여야를 막론하고 우리 정치인들에게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는 덕목이기도 하다. 셀 수조차 없는 정책 실패로 부동산 시장을 망쳐놓고, 정작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자신들도 힘겨워하는 기준과 규제책을 서슴없이 국민에게 강요하고, 기다려보면 다 잘될 거라는 태도에 여당의 지지율은 곤두박질쳤다. 반사효과로 야당의 지지율이 올라갔는데, 야당은 또 그걸 자기가 잘해서인 줄 알고 경솔한 발언을 쏟아낸다. 기상관측 사상 최장의 장마 때문에 물난리인 와중에 난데없이 4대강 사업 찬양론이라니. 4대강 사업이 홍수 방지에 별로 실효가 없다는 연구 결과도 여럿 나와 있는데다, 아직 물난리가 진행 중인 지금이 자화자찬할 때인가? 어찌 다들 이리 겸손하지 못할까?
연예인은 굳이 겸손할 필요가 없다. 꼴 보기 싫으면 대중이 알아서 퇴출한다. 요즘은 소위 ‘플렉스’라는 과시 문화가 유행이기도 하고. 그러나 법을 만들고 세금을 집행하고 또 세금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겸손해야 한다. 그건 덕목이 아니라 의무다.
그들에게 월급을 주는 국민으로서 부탁드린다. 겸손하세요. 공부하시고요. 의석수 플렉스, 반사효과 플렉스 하지 말고.
에스비에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