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행하고 하늘에 제를 지낸 환구단(왼쪽)과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한 옥호루.
고종 어떻게 볼까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황권 강화·근대화 동시에
‘고종은 개혁군주였다’는 주장과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지난 4주 동안 팽팽한 대치 전선을 이루었다. 첫 논자였던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가장 선명하게 강조했다. 반면에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동국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보다는 한계에 더 주목했다. 세 번째 논자였던 강상규 박사는 고종의 개혁 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많은 장벽이 있었음도 아울러 강조했다. 네 번째 논자 박노자 교수는 하원호 교수와 유사한 입장에서 고종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는 “고종이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고 밝혔다.
다섯 번째 논자로 나선 김도형 연세대 교수도 고종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 가까운 입장을 밝힌다. “고종의 개혁은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권 신장과 군주권 제한을 지향하던 독립협회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는 보수적이었다”는 것이 김 교수의 평가다. 김 교수는 또 “고종의 개혁은 황제권하에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고,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며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마지막 논쟁이 될 다음주에는 강상규 박사가 고종을 둘러싼 엇갈린 평가에 대한 견해를 다시 밝힐 예정이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고종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학계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도 오래된 논쟁거리다. ‘명성황후’ 뮤지컬이나, 대원군과 명성왕후를 소재로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또는 <한반도> 같은 영화가 인기를 얻으면 항상 등장하는 문제였다. 여기에 최근의 <대안교과서>처럼 김옥균 등의 개화파를 부각시키게 되면 더없이 복잡한 논쟁이 된다. 이 논쟁은 결국 한국 근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이 강화되는 가운데 근대화 개혁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최근 고종이 독일 정부에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린 문서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 직후부터 그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고, 헤이그 밀사 사건(1907. 6) 이전에 이미 이런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이나 일부 학자가 언급하듯이, 이것을 고종의 능력과 개혁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 고종의 태도는 애매하였다. 군대를 동원한 일본의 위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종은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원임대신의 의견을 들어야 하므로 자의로 결정할 수 없다”고 하였고, 정작 이 문제를 다루는 어전회의에는 병을 이유로 참석하지도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참석을 강요하자 고종은 “상의할 일이 있으면 대신들과 협의하라”고 하여,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였다. 강압적 분위기에서 고종의 간접적 반대 의사를 인정하더라도, 고종은 ‘대한국국제’에 명시된 황제의 대외적 권한을 포기한 것이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에 임하는 군주의 태도로 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였다. 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된 뒤에도 고종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는 정말 무능한 군주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 외교 활동을 하고 밀지를 보내 의병을 독려했다고 그의 유능과 개혁성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행위는 ‘종묘와 사직’을 책임지고 있던 군주로서는 최소한 해야 할 일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모호한 태도 일관
일 위협 고려해도 분명한 책임 방기
밀서 등 뒤늦은 ‘무효화’ 시도
능력·개혁성의 증거라 볼 수 없어 고종의 개혁성을 강조하면서 흔히 대한제국 이전으로 소급하는 경우도 있다. 친정(親政) 이후, 더러 고종의 정치적 의사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정치를 주도하던 민씨 세력에 비해 특별하게 개혁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양의 기술 문명을 수용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당시의 집권세력과 동일하였다. 모든 정책이 고종의 재가를 받은 것이긴 하지만, 고종의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의사에 따라 정책이 수행된 것은 아니었다. 고종의 정치적 역할은 아관파천 이후, 더 정확하게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민씨 세력이 상대적으로 정권에서 약해진 이후였다. 고종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때, 대한제국기였다. 고종의 개혁성 여부는 결국 대한제국의 개혁사업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대한제국에서는 당시의 사회문제, 곧 농민층의 항쟁을 해결하면서 민족적 역량을 결집하고,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고종의 정치는 이런 점에서 시작되었다. 고종은 가장 먼저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고, 황실을 높이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궁내부를 중심으로 근대적인 개혁을 광범하게 추진하였다. 서양의 문명을 ‘구본신참’의 원칙 아래 수용하여, 서울의 근대적 도시로의 정비, 전기의 보급, 철도 부설, 근대적 교육의 확산 등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런 점만 본다면 고종은 매우 개혁적인 군주였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은 개항 이후 정부 차원에서 전개하던 근대화 사업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왕권을 약화시킨 몇몇의 조처를 빼고는 나머지 많은 부분은 그 직전에 실시했던 갑오개혁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개혁의 원칙과 내용은 철저하게 지배층, 지주층의 입장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광무개혁에서 국가재정 확충을 위해 가장 힘을 들였던 양전지계사업도 그런 원칙에서 추진하였다. 따라서 농민층의 요구는 외면하였다. 고종의 개혁사업을 이끌던 내장원의 운영도 이런 점을 잘 보여 주었다. 내장원에서는 방대한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 관리하면서 지주 경영을 강화하였다. 농민층에 대한 소작료를 올리고, 소유권이 모호한 경우에는 소유권도 빼앗았다. 이에 불만을 가진 농민층의 항쟁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내장원 중심의 정치는 국가재정의 부실화를 수반하였다. 홍삼, 어장 등 각종 전매권을 독점하면서 왕실 재정을 확충하였지만, 정작 정부의 재정은 부족하게 되어, 탁지부가 내장원에 조세 수취권을 넘겨주고 돈을 차용하는 일도 일어났다. 궁내부를 중심으로 행한 고종의 개혁은 정부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농민층을 수탈하면서 행해진 것이었다. 황실·지배층 위한 ‘보수정치’ 틀에서
근대문물 수용 등 ‘개방외교’ 펼쳐
농민층 외면으로 국내 세력결집 실패
격변의 국제정세 속 나라도 못지켜 19세기 말은 격변의 시기였다. 고종은 이런 격변 속에서 국권을 유지하고, 동시에 근대화를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고종이 개혁 군주였는지 여부는 단편적인 몇 가지 사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국가적, 사회적 과제를 고종이 어떤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했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기에 전제적인 황권을 바탕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여 자주적 국가를 만들려고 하였다.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점은 문호를 개방할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이 점은 전통적, 유교적 조선 왕조에 비해서 개혁적이었다. 고종을 ‘계몽군주’로 평가해도 좋을 대목이다. 그러나 고종의 개혁은 농민층의 동력을 결집하지 못하였고, 또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권 신장과 군주권 제한을 지향하던 독립협회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는 보수적이었다.
고종의 정치는 유교적 변통론에 따라 폐단을 고치되 이를 통해 체제의 안정을 꾀한 전통적인 조선 왕조의 대책과 노선이 다르지 않았다. 곧 ‘보수적 개혁’, 바로 그것이었다. 고종이 보수적 차원에서 개혁을 전개한 것은 ‘종사’(宗社)로 대표되는 자신의 나라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종의 개혁은 황제권 아래 국내 세력을 결집하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고,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속에서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고종이 추진하던 다양한 개혁은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새로운 근대사회로 변용되어 갔다. 김도형/연세대 교수·국사학
김도형 교수는 1953년생이며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이기도 합니다. 한국 근대사상사와 민족운동사가 관심 연구 분야입니다. 저서로 <대한제국기의 정치사상 연구>(1994)가 있습니다.
고종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학계는 물론 일반 사회에서도 오래된 논쟁거리다. ‘명성황후’ 뮤지컬이나, 대원군과 명성왕후를 소재로 하는 텔레비전 드라마, 또는 <한반도> 같은 영화가 인기를 얻으면 항상 등장하는 문제였다. 여기에 최근의 <대안교과서>처럼 김옥균 등의 개화파를 부각시키게 되면 더없이 복잡한 논쟁이 된다. 이 논쟁은 결국 한국 근대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이 강화되는 가운데 근대화 개혁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최근 고종이 독일 정부에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린 문서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고종은 을사조약 체결 직후부터 그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노력하였고, 헤이그 밀사 사건(1907. 6) 이전에 이미 이런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론이나 일부 학자가 언급하듯이, 이것을 고종의 능력과 개혁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 고종의 태도는 애매하였다. 군대를 동원한 일본의 위협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종은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원임대신의 의견을 들어야 하므로 자의로 결정할 수 없다”고 하였고, 정작 이 문제를 다루는 어전회의에는 병을 이유로 참석하지도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참석을 강요하자 고종은 “상의할 일이 있으면 대신들과 협의하라”고 하여,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였다. 강압적 분위기에서 고종의 간접적 반대 의사를 인정하더라도, 고종은 ‘대한국국제’에 명시된 황제의 대외적 권한을 포기한 것이었다.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대사에 임하는 군주의 태도로 보기에는 너무나 나약하였다. 조약이 강제적으로 체결된 뒤에도 고종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는 정말 무능한 군주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 외교 활동을 하고 밀지를 보내 의병을 독려했다고 그의 유능과 개혁성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행위는 ‘종묘와 사직’을 책임지고 있던 군주로서는 최소한 해야 할 일이었다. 을사조약 체결 모호한 태도 일관
일 위협 고려해도 분명한 책임 방기
밀서 등 뒤늦은 ‘무효화’ 시도
능력·개혁성의 증거라 볼 수 없어 고종의 개혁성을 강조하면서 흔히 대한제국 이전으로 소급하는 경우도 있다. 친정(親政) 이후, 더러 고종의 정치적 의사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정치를 주도하던 민씨 세력에 비해 특별하게 개혁적인 측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양의 기술 문명을 수용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당시의 집권세력과 동일하였다. 모든 정책이 고종의 재가를 받은 것이긴 하지만, 고종의 독창적이고 독자적인 의사에 따라 정책이 수행된 것은 아니었다. 고종의 정치적 역할은 아관파천 이후, 더 정확하게는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민씨 세력이 상대적으로 정권에서 약해진 이후였다. 고종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이때, 대한제국기였다. 고종의 개혁성 여부는 결국 대한제국의 개혁사업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대한제국에서는 당시의 사회문제, 곧 농민층의 항쟁을 해결하면서 민족적 역량을 결집하고,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아야 할 과제를 안고 있었다. 고종의 정치는 이런 점에서 시작되었다. 고종은 가장 먼저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고, 황실을 높이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동시에 궁내부를 중심으로 근대적인 개혁을 광범하게 추진하였다. 서양의 문명을 ‘구본신참’의 원칙 아래 수용하여, 서울의 근대적 도시로의 정비, 전기의 보급, 철도 부설, 근대적 교육의 확산 등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런 점만 본다면 고종은 매우 개혁적인 군주였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은 개항 이후 정부 차원에서 전개하던 근대화 사업을 마무리한 것이었다. 왕권을 약화시킨 몇몇의 조처를 빼고는 나머지 많은 부분은 그 직전에 실시했던 갑오개혁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개혁의 원칙과 내용은 철저하게 지배층, 지주층의 입장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광무개혁에서 국가재정 확충을 위해 가장 힘을 들였던 양전지계사업도 그런 원칙에서 추진하였다. 따라서 농민층의 요구는 외면하였다. 고종의 개혁사업을 이끌던 내장원의 운영도 이런 점을 잘 보여 주었다. 내장원에서는 방대한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 관리하면서 지주 경영을 강화하였다. 농민층에 대한 소작료를 올리고, 소유권이 모호한 경우에는 소유권도 빼앗았다. 이에 불만을 가진 농민층의 항쟁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심지어 내장원 중심의 정치는 국가재정의 부실화를 수반하였다. 홍삼, 어장 등 각종 전매권을 독점하면서 왕실 재정을 확충하였지만, 정작 정부의 재정은 부족하게 되어, 탁지부가 내장원에 조세 수취권을 넘겨주고 돈을 차용하는 일도 일어났다. 궁내부를 중심으로 행한 고종의 개혁은 정부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농민층을 수탈하면서 행해진 것이었다. 황실·지배층 위한 ‘보수정치’ 틀에서
근대문물 수용 등 ‘개방외교’ 펼쳐
농민층 외면으로 국내 세력결집 실패
격변의 국제정세 속 나라도 못지켜 19세기 말은 격변의 시기였다. 고종은 이런 격변 속에서 국권을 유지하고, 동시에 근대화를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따라서 고종이 개혁 군주였는지 여부는 단편적인 몇 가지 사례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당시의 국가적, 사회적 과제를 고종이 어떤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했는지를 따져야 할 것이다. 고종은 대한제국기에 전제적인 황권을 바탕으로 체제를 유지하는 가운데 근대적 문물을 수용하여 자주적 국가를 만들려고 하였다.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했던 점은 문호를 개방할 당시에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으로, 이 점은 전통적, 유교적 조선 왕조에 비해서 개혁적이었다. 고종을 ‘계몽군주’로 평가해도 좋을 대목이다. 그러나 고종의 개혁은 농민층의 동력을 결집하지 못하였고, 또 ‘민국’(民國) 이념을 천명하면서도 민권 신장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민권 신장과 군주권 제한을 지향하던 독립협회 운동을 탄압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정치는 보수적이었다.
김도형 연세대 교수·국사학 교수
김도형 교수는 1953년생이며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는 연세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이기도 합니다. 한국 근대사상사와 민족운동사가 관심 연구 분야입니다. 저서로 <대한제국기의 정치사상 연구>(1994)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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