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가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98년이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능(홍릉)에 자주 행차했는데, 이것을 고려하여 전차 노선을 서대문~홍릉으로 택했다. 순종의 승용차로 쓰인 미국의 제너럴모터스에서 제작한 캐딜락.(아래)
고종 어떻게 볼까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⑤ 왕권 수호에 올인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삼아 진행 중인 지상논쟁이 지난 3주 동안 벌어졌다. 고종을 개혁군주라고 할 수 있느냐, 개혁군주라면 어느 정도의 개혁성과 실행력을 지니고 있었느냐 하는 논쟁이었다. 첫 번째 논자로 나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의 개혁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반면에 두 번째 논자로 등판한 하원호 교수는 고종의 개혁성을 인정하다고 해도 그 한계에 더 주목해야 함을 강조했다. 고종은 왕권 강화가 궁극적 목적이었을 뿐 진정한 근대화에 큰 관심은 없었다는 것이 하 교수의 주장이었다. 세 번째로 글을 쓴 강상규 박사는 고종의 개혁군주적 모습에 더 주목했다. 강 박사는 “거대한 전환기를 살았던 인물”임을 강조하면서 고종의 개혁·개방 의지가 초기부터 강했지만, 그 의지가 정책으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장벽이 많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네 번째 논자로 나선 이는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다. 박 교수는 하원호 교수와 유사한 견지에서 고종을 비판적으로 들여다 본다. 그는 “고종은 조선 말기의 마지막 세도 정권의 수장에 더 가까웠다”며 “그의 치하에서 세도 통치의 전근대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외세 의존과 같은 근대적 모순들과 중첩됐다”고 말한다. “그가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주에는 김도형 연세대 교수가 다섯 번째 논자로 등장해 또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인간들이 그들의 역사를 창조하지만 원하는 대로 창조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조건 하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이미 존재해 온 조건 하에서 역사를 만든다.” 마르크스의 이 지적대로 역사에서 지도자 개인의 구실이 결정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미미하지도 않다. 지도자 한 명이 역사의 대세를 돌이킬 수야 없지만, 그가 이끄는 집단이 역사 대세를 수용하는 방법은 그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고종이 혼자 힘으로 조선을 망칠 수도 살릴 수도 없었겠지만, 그의 일련의 전략적 선택들은 조선 독립 보존과 근대적 전환에 디딤돌보다 차라리 걸림돌이 됐다.
구한말 위기의 세계사적 본질은 중국 중심 동아시아적 국제 질서의 약화와 몰락이었다. 일본이 이 위기를 기회 삼아 제국주의 국가로 재탄생한 것과 달리 조선이 제국 일본의 피해자가 된 데 대해 얼마든지 한탄할 수 있지만, 그 당시로서 일본과 조선의 위치가 맞바뀌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조선과 비교될 것 없이 일본은 중국 중심의 대륙적 질서와 매우 느슨한 관계에 있었으면서 네덜란드 등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류 폭은 넓었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를 위시한 근대 일본의 1세대 계몽주의자들이 이미 에도 시대 말기에 국내에서 네덜란드어를 익혀 ‘신세계’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을 수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이와 같은 일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거기에다가 일본의 개항이 조선에 비해 20여년 더 빨랐던 것은 ‘시간과의 경쟁’이라는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치명적이었다. 일본의 강요로 조선이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맺었을 때 그 체결의 배경은 3만2777명의 장병과 군함 19척의 일본 육해군을 조선으로서 현실적으로 대항해내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힘의 열세였다. 불리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에서는 비록 성인현철이 왕이 되더라도 국운의 융성을 기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오랜 세도정치의 폐단이 극에 달해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경제적 활동을 파탄에 빠뜨렸던 고종의 측근인 민씨 족벌은 온 나라의 증오 대상이었다. ‘민족’(閔族)이라 불렀던 그들의 족벌에 대한 원한이 하도 높았기에 부정부패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았던 대원군마저도 ‘반민’(反閔)의 명분만으로 일부 개화파나 동학 농민 지도자 사이의 상당한 기대를 모을 정도였다. 민심 이반에다 불가항의 외적 위협까지 겹치니 고종의 고민이란 태산 같았을 것이다. 민씨 일종 부패로 민심 등돌리고
제국 일본 등 외적위협까지
구한말 최악의 여건 속에서도
고종 ‘나라’ 위한 개혁의지 안보여 고종에게 이와 같은 역경을 헤쳐나갈 만한 전략적 선택은 있었을까? 그가 만약 자신의 권력이 아닌 ‘나라’를 구하고 싶었다면 이 나라의 대다수 주민들이 바랐던 사항부터 이행하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요구에서 잘 반영된 민중의 희망은 무명잡세 혁파와 징세 관련 비리 척결 등 조세 제도의 합리화와 관료들의 토색질을 낳는 매관매직의 엄금 등이었다. 거기에다가 해방적인 의미의 근대적 조처-예컨대 노비 해방과 비(非)양반 인재 등용, 근대 교육의 보급-등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적어도 ‘국민 통합’ 효과라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구한말에 ‘나라’를 위한 개혁의 열매를 거둔 일이 언제 있었는가? 갑오경장 때 고질적인 지방관 세금 관련 비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때 징세 업무를 일반 행정과 분리시켜 독립적 기관으로서의 징세서(세무서)를 전국에 설립하여 탁지부로 하여금 총괄케 했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폐지하여 지방관이 징세 업무를 보는 옛날 제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옛 제도의 폐단들이 다 그대로 남은데다가 국가에서 지세를 계속 올리기만 했다. 1900년에 3분의 2나 인상하고 1902년에 다시 5분의 3을 인상하는 조처들이 농민의 불만을 크게 자아내 민란의 도화선이 됐다. 광업·홍삼 등 알짜 사업의 징세를 황실이 장악한데다 역둔토라는 이름의 26만 두락 이상의 광활한 관유지까지 소득원으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이 토지를 경작했던 소작 농민들에 대한 착취가 악질화돼 갔다. 종전의 2~3할 정도의 도조율(소작료)이 1900년대 초기에 3~4할로 오른데다 1904년 이후로는 5할로 고착화돼 수많은 작인들의 저항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고종의 재정 정책은 ‘근대화’의 미명 아래 국가의 부담을 백성에게 전가했을 뿐이었다. 이 정책을 집행했던 관료들이 임용을 따내고자 뇌물을 바치고, 임용된 뒤에 무자비한 가렴주구로 본전을 뽑고 이윤을 올리는 일도 고종이 실권을 내놓기 전까지 계속됐다. 고종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영국 여성 탐험가 비숍마저도 그 당시 조선 국가의 본질을 한마디로 ‘제도적 약탈’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백성들에게서 빼앗았던 혈세를 고종이 어떻게 썼던가? 진정 교육 보급과 같은 근대화 정책을 위해서 썼다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았다. 1905년 정부 예산에서는 교육과 위생 관련 예산은 1.05%에 불과했던 반면, 황실비는 7.6%나 됐다. 고종은 말로는 ‘교육 입국’을 외쳤지만, 1906년에 이르러 전국의 57개의 근대식 소학교에 1924명의 아동만 다니고 있었다. 대한제국 정부보다 외국 선교사들이 몇 배나 더 많은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도일 유학생 파견, 원칙상 신분과 무관한 근대 교육 이수자의 관직 임명 등 혁신 조처들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수혜자는 대개 양반 출신들이나 소수의 부유한 중인 계층들이었다. 갑오경장 때 노비 제도가 형식적으로 혁파되고 그 뒤에 인신매매를 엄금하는 법률이 제정되긴 했지만 향촌사회에서 그대로 실존했던 노비 소유 관계의 해체를 위해 국가가 이렇다 할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고종 시대의 국가가 유일하게 진정한 관심을 보였던 분야는, 민란 진압용으로 군대와 경찰 기구를 키우는 것이었다. 1900년대 초반의 국가예산에서 군사·경찰 비용은 보통 40% 정도 또는 그 이상을 차지했다. 백성들에게서 수탈한 세금으로
근대교육 보급·신분제 혁파 대신
‘민란 진압용’ 군 강화에만 골몰
조선 몰락에 대한 중대책임 물어야 민심을 무시하고 수탈의 강화에 혈안이 된 고종 시대 국가의 생존 방식은 외세 사이의 ‘줄타기’였다. 물론 여러 열강들이 조선을 둘러싼 대립을 벌였던 상황에서는 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는 그 나름의 효과가 따랐다. 예컨대 아관파천과 그 뒤 8년 동안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의 노련한 외교로 고종 정권은 사실상 일본에 의한 식민화를 당분간 미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벌게 된 시간은 결국 허비되고 말았다. 교육 진흥이나 근대적 공업의 진흥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무기 공장 하나 세우지도 못해 총탄 공급까지도 일본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대한제국호가 곧 침몰했다. 고종이 10여 차례에 걸쳐 밀사를 파견하여 열강에 호소도 다 해보고 의병장들에게 밀지를 주어 의병을 일으키는 일도 은밀히 지원했지만 근대적 경제나 교육체계,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다 허사였다. 조선이 처한 최악의 상황에서는 돌파구 찾기란 지난한 과제였겠지만, 고종은 그 해결에 거의 제대로 노력하지도 않았다.
고종을 ‘계몽군주’라고 높여 일컫는 사학자들도 있지만, 그는 사실 차라리 조선 말기의 마지막 세도 정권의 수장에 더 가까웠다. 그의 치하에서 세도 통치의 전근대적 모순들이 해결되지 못한 채 외세 의존과 같은 근대적 모순들과 중첩됐다. 그가 조선을 단독적으로 몰락시켰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선의 몰락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역사의 법정에서 그에게 당연히 물어야 한다.
박노자/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 고대사와 고대 중세 불교사를 연구하다가 요즘에는 19세기 말 이후의 한국 민족주의 형성사, 한국 사회진화론 사상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5세기 말부터 562년까지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의 역사〉(러시아어판·1998), 〈당신들의 대한민국〉(2001), <나를 배반한 역사>(2003), 〈우승열패의 신화〉(2005), <박노자의 만감일기>(2008) 등이 있습니다.
“인간들이 그들의 역사를 창조하지만 원하는 대로 창조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조건 하에서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이미 존재해 온 조건 하에서 역사를 만든다.” 마르크스의 이 지적대로 역사에서 지도자 개인의 구실이 결정적이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미미하지도 않다. 지도자 한 명이 역사의 대세를 돌이킬 수야 없지만, 그가 이끄는 집단이 역사 대세를 수용하는 방법은 그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고종이 혼자 힘으로 조선을 망칠 수도 살릴 수도 없었겠지만, 그의 일련의 전략적 선택들은 조선 독립 보존과 근대적 전환에 디딤돌보다 차라리 걸림돌이 됐다.
구한말 위기의 세계사적 본질은 중국 중심 동아시아적 국제 질서의 약화와 몰락이었다. 일본이 이 위기를 기회 삼아 제국주의 국가로 재탄생한 것과 달리 조선이 제국 일본의 피해자가 된 데 대해 얼마든지 한탄할 수 있지만, 그 당시로서 일본과 조선의 위치가 맞바뀌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조선과 비교될 것 없이 일본은 중국 중심의 대륙적 질서와 매우 느슨한 관계에 있었으면서 네덜란드 등 유럽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교류 폭은 넓었다.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를 위시한 근대 일본의 1세대 계몽주의자들이 이미 에도 시대 말기에 국내에서 네덜란드어를 익혀 ‘신세계’에 대한 기초지식을 쌓을 수 있었는데, 조선에서는 이와 같은 일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거기에다가 일본의 개항이 조선에 비해 20여년 더 빨랐던 것은 ‘시간과의 경쟁’이라는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치명적이었다. 일본의 강요로 조선이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맺었을 때 그 체결의 배경은 3만2777명의 장병과 군함 19척의 일본 육해군을 조선으로서 현실적으로 대항해내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힘의 열세였다. 불리하기 짝이 없는 이 상황에서는 비록 성인현철이 왕이 되더라도 국운의 융성을 기대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오랜 세도정치의 폐단이 극에 달해 가렴주구로 백성들의 경제적 활동을 파탄에 빠뜨렸던 고종의 측근인 민씨 족벌은 온 나라의 증오 대상이었다. ‘민족’(閔族)이라 불렀던 그들의 족벌에 대한 원한이 하도 높았기에 부정부패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았던 대원군마저도 ‘반민’(反閔)의 명분만으로 일부 개화파나 동학 농민 지도자 사이의 상당한 기대를 모을 정도였다. 민심 이반에다 불가항의 외적 위협까지 겹치니 고종의 고민이란 태산 같았을 것이다. 민씨 일종 부패로 민심 등돌리고
제국 일본 등 외적위협까지
구한말 최악의 여건 속에서도
고종 ‘나라’ 위한 개혁의지 안보여 고종에게 이와 같은 역경을 헤쳐나갈 만한 전략적 선택은 있었을까? 그가 만약 자신의 권력이 아닌 ‘나라’를 구하고 싶었다면 이 나라의 대다수 주민들이 바랐던 사항부터 이행하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요구에서 잘 반영된 민중의 희망은 무명잡세 혁파와 징세 관련 비리 척결 등 조세 제도의 합리화와 관료들의 토색질을 낳는 매관매직의 엄금 등이었다. 거기에다가 해방적인 의미의 근대적 조처-예컨대 노비 해방과 비(非)양반 인재 등용, 근대 교육의 보급-등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면 적어도 ‘국민 통합’ 효과라도 얻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구한말에 ‘나라’를 위한 개혁의 열매를 거둔 일이 언제 있었는가? 갑오경장 때 고질적인 지방관 세금 관련 비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때 징세 업무를 일반 행정과 분리시켜 독립적 기관으로서의 징세서(세무서)를 전국에 설립하여 탁지부로 하여금 총괄케 했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폐지하여 지방관이 징세 업무를 보는 옛날 제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렇게 하여 옛 제도의 폐단들이 다 그대로 남은데다가 국가에서 지세를 계속 올리기만 했다. 1900년에 3분의 2나 인상하고 1902년에 다시 5분의 3을 인상하는 조처들이 농민의 불만을 크게 자아내 민란의 도화선이 됐다. 광업·홍삼 등 알짜 사업의 징세를 황실이 장악한데다 역둔토라는 이름의 26만 두락 이상의 광활한 관유지까지 소득원으로 관리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도 이 토지를 경작했던 소작 농민들에 대한 착취가 악질화돼 갔다. 종전의 2~3할 정도의 도조율(소작료)이 1900년대 초기에 3~4할로 오른데다 1904년 이후로는 5할로 고착화돼 수많은 작인들의 저항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고종의 재정 정책은 ‘근대화’의 미명 아래 국가의 부담을 백성에게 전가했을 뿐이었다. 이 정책을 집행했던 관료들이 임용을 따내고자 뇌물을 바치고, 임용된 뒤에 무자비한 가렴주구로 본전을 뽑고 이윤을 올리는 일도 고종이 실권을 내놓기 전까지 계속됐다. 고종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던 영국 여성 탐험가 비숍마저도 그 당시 조선 국가의 본질을 한마디로 ‘제도적 약탈’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던가? 그러면 백성들에게서 빼앗았던 혈세를 고종이 어떻게 썼던가? 진정 교육 보급과 같은 근대화 정책을 위해서 썼다면 몰라도 그렇지도 않았다. 1905년 정부 예산에서는 교육과 위생 관련 예산은 1.05%에 불과했던 반면, 황실비는 7.6%나 됐다. 고종은 말로는 ‘교육 입국’을 외쳤지만, 1906년에 이르러 전국의 57개의 근대식 소학교에 1924명의 아동만 다니고 있었다. 대한제국 정부보다 외국 선교사들이 몇 배나 더 많은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 도일 유학생 파견, 원칙상 신분과 무관한 근대 교육 이수자의 관직 임명 등 혁신 조처들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 수혜자는 대개 양반 출신들이나 소수의 부유한 중인 계층들이었다. 갑오경장 때 노비 제도가 형식적으로 혁파되고 그 뒤에 인신매매를 엄금하는 법률이 제정되긴 했지만 향촌사회에서 그대로 실존했던 노비 소유 관계의 해체를 위해 국가가 이렇다 할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고종 시대의 국가가 유일하게 진정한 관심을 보였던 분야는, 민란 진압용으로 군대와 경찰 기구를 키우는 것이었다. 1900년대 초반의 국가예산에서 군사·경찰 비용은 보통 40% 정도 또는 그 이상을 차지했다. 백성들에게서 수탈한 세금으로
근대교육 보급·신분제 혁파 대신
‘민란 진압용’ 군 강화에만 골몰
조선 몰락에 대한 중대책임 물어야 민심을 무시하고 수탈의 강화에 혈안이 된 고종 시대 국가의 생존 방식은 외세 사이의 ‘줄타기’였다. 물론 여러 열강들이 조선을 둘러싼 대립을 벌였던 상황에서는 이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는 그 나름의 효과가 따랐다. 예컨대 아관파천과 그 뒤 8년 동안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의 노련한 외교로 고종 정권은 사실상 일본에 의한 식민화를 당분간 미루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벌게 된 시간은 결국 허비되고 말았다. 교육 진흥이나 근대적 공업의 진흥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무기 공장 하나 세우지도 못해 총탄 공급까지도 일본에 의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대한제국호가 곧 침몰했다. 고종이 10여 차례에 걸쳐 밀사를 파견하여 열강에 호소도 다 해보고 의병장들에게 밀지를 주어 의병을 일으키는 일도 은밀히 지원했지만 근대적 경제나 교육체계, 시민사회가 형성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다 허사였다. 조선이 처한 최악의 상황에서는 돌파구 찾기란 지난한 과제였겠지만, 고종은 그 해결에 거의 제대로 노력하지도 않았다.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한국 고대사와 고대 중세 불교사를 연구하다가 요즘에는 19세기 말 이후의 한국 민족주의 형성사, 한국 사회진화론 사상사 연구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 〈5세기 말부터 562년까지 가야의 여러 초기 국가의 역사〉(러시아어판·1998), 〈당신들의 대한민국〉(2001), <나를 배반한 역사>(2003), 〈우승열패의 신화〉(2005), <박노자의 만감일기>(2008)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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