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어진. 고종은 과연 개혁군주였는가, 개혁군주였다면 개혁의지는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문제는 한국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관건적인 문제다. 이태진 교수는 고종이 확고한 개혁·개화 의지를 지닌 군주였다고 역설한다.
고종 어떻게 볼까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① 개혁군주다
지난 5주 동안 네 명의 학자가 참여한 ‘이명박 정부의 성격’ 논쟁에 이어 이번주부터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놓고 학자들의 논쟁이 펼쳐진다.
고종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한국 근현대사의 출발점을 이해하는 데 관건적 문제다. 고종의 퍼스낼리티나 정책 방향, 시대인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 아니면 일제 강점으로 비로소 타율적 근대화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제3의 대안세력이 존재했는지, 존재했다면 어느 정도의 역사적 무게를 지니고 있었는지 따져보는 데도 고종은 하나의 준거가 된다. 그동안 고종에 대한 일반적 인식은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사이에 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무능하고 유약한 군주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논자로 나선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에 대한 이런 기존 인식이 고종의 개혁 의지와 개혁 방향을 과소평가한 데 따른 것이라며 ‘고종 재평가’를 가장 선도적으로 주장해 온 학자다. 이번 글에서도 이 교수는 고종이 “청년 시절 개방·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미국·영국·독일 등과 잇따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했음을 강조한다. 이 교수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도 고종의 근대화 정책에 일본이 위협을 느낀 결과라고 해석한다. 고종의 근대화 의지는 확고했다는 것이 이 교수의 논지다. 다음주에는 하원오 동국대 연구교수가 고종에 대해 다른 견해를 밝힌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최근 ‘뉴라이트 교과서’로 지칭되는 <대안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가 무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근대사 서술에서 최근 학계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반면, 일본 의존의 갑신 ‘개화파’와 식민지 시기 경제성장론을 줄기로 삼은 것이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식민지 시기를 근대 문명학습 또는 실천기로 평가하면서 경제 발전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강조한 것이 물의를 일으켰다. 이런 역사 서술로 과연 대한민국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자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마저 빚어졌다. 나는 2004년에 이미 이런 식의 역사인식과 반년에 걸친 긴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교수신문>을 통해 벌인 이 논쟁은 한국 논쟁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 아래 <고종황제역사청문회>란 책자로 출판되기까지 했다. 백 번의 대결을 불사했던 나에게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다시 논하라는 주문이 들어온 순간, 뒤늦게 피로감을 느꼈다. 넘어야 할 산이 이렇게 첩첩인가. ‘대안교과서’는 4년 전 논쟁에서 판정승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면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고려해 좀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던가. 달포 전, 어느 일간지에 고종황제가 을사늑약의 실효를 저지하고자 프랑스인 고문을 독일에 보내 우리 공사관들이 현지에서 철수하지 말 것을 훈령하고 또 독일 황제에게 일본의 조약강제의 만행을 알리면서 일본의 보호국이 되기보다 차라리 서구 열강국들의 시한부 공동보호를 받겠다고 제안하는 친서가 공개되었다. 그 내용의 절박성과 절절함이 국민적 감동을 자아냈는데 이번 ‘대안교과서’의 서술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않은 역사 서술이다. 내가 보기에 ‘대안교과서’가 개화파 주도의 근대화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두 가지로 우리 근대사를 엮은 것은 유감스럽게도 일본의 극우 역사관과 너무 많이 닮았다. 대한제국의 자력 근대화노력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조선총독부 지도 하의 ‘근대문명 학습’을 홍보하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을사늑약부당” 독일에 보낸 친서
고종의 구국의지 여실히 드러내
뉴라이트, 자력 근대화 노력 폄하
시대적 분위기 감지 못한 것 1919년 3월1일에 만세 시위운동이 있은 뒤 9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조선공화국이란 새 국호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대의원회의에서 긴급동의가 나왔다. 곧 반 년 전 대한문 앞에서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죽음에 대한 애도요 충성의 소리인 만큼 그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대한민국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 인식은 이렇게 대한제국의 역사를 끌어안고 있었다. 고종은 청년 시절 개방ㆍ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ㆍ미국ㆍ영국ㆍ독일 등과 잇따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고자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하였다. 수교 조약을 맺은 뒤에 미국 정부에 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미국 회사들과 계약하여 왕궁에 먼저 전기를 시설하고, 통신과 우편제도를 도입하고, 광산 개발 준비도 하였다. 이런 개화 노선에 대해 아버지 대원군이 불필요하게 임오군란을 일으켜 이를 빌미로 청국이 개입하여 속방화정책을 폄으로써 군주의 개화정책은 위기를 맞았다. 그의 근대화 정책은 그 뒤 일본으로부터도 위협을 받아 청일전쟁 직전에 왕궁을 침범당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왕비가 시해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만약 군주와 그의 정부가 어리석고 무능하기만 했다면 일본이 왜 국제적 비난을 사기 마련인 이런 만행을 저질렀겠는가? 고종의 개화정책은 왕비를 잃고 대한제국을 세운 뒤에 탄탄대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으로 청국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일본이 삼국 간섭으로 일시 침략의 방향을 대만으로 돌린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은 눈부시다 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반도 북부 지역의 금광ㆍ석탄 개발을 중요 사안으로 한 국토개발 계획이 세워진 상태에서 철도 부설과 광산 개발이 진행되고 서울에서는 워싱턴 디시를 모델로 한 도시 개조사업이 착수되었다. 오늘날 시청 앞 광장과 방사상 도로체계는 이때 처음 틀을 잡은 것이다. 곧 미국의 대통령궁(백악관)처럼 왕궁(현 덕수궁)을 도심에 새로 짓고 대안문(대한문) 앞을 방사상 도로의 중심으로 삼고, 기존의 종로, 남대문로를 확장하여 연결시켜 전차를 달리게 하였다. 고종 청년시절 서구와 수교 맺고
미국과 밀착외교로 문명수입 시도
일 ‘왕비 시해’ 위협 속에서도
개화·개방정책으로 근대화 밑그림 한편, 서울ㆍ개성ㆍ인천 등지의 자산가들 힘으로 1899년 대한천일은행이란 국고 은행을 세우고 1902년에는 지폐 발행을 위해 중앙은행 발족 준비를 마쳤을뿐더러 1899년 한청조약을 체결하여 청국과 대등한 독립국의 위상을 세우고, 바로 이어 헌법 전문(前文)에 해당하는 국제(國制)를 반포하여 황제국을 자처하였다. 이를 두고 군주전제정치로의 회귀란 비판은 한쪽 눈으로만 보는 역사다. 천황권의 신성성까지 표방한 명치 일본제국 헌법은 고대로의 회귀란 말인가. 근대국가 수립에서 군주권의 절대성 표방은 보편적 현상인데 굳이 대한제국만 예외적으로 비판받아야 하는가. 나는 고종이 청년 시절에 어떻게 해서 선진문명 수용의 개방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이 의문을 풀 실마리를 최근에서야 잡았다. 지난가을,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열하(북경 북방 600여㎞ 지점)를 찾으려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이 책에는 벽돌ㆍ수레 등의 사용을 주장하는 이용후생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지만 더 중요한 대목은 열하에 도착하여 건륭제가 티베트 라마불교의 지도자 판첸라마를 평등례로 대우하는 광경을 목도한 부분이다. 청국은 몽고족의 위협을 제어하기 위해 대부분의 몽고족이 믿고 있는 라마불교의 지도자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그런 우대 정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은 바깥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조선은 대명의리의 북벌론에 빠져 있는 것이 너무도 개탄스러웠다. <열하일기>는 이렇게 세계정세에 대해 눈뜨기를 외친 역사 교훈서로 큰 의미가 있다.
나는 여기서 고종의 선진문명 수용 개방주의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금방 깨달았다. 청년 군주의 곁에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가 있기도 하였지만, 직접 정치를 선언하면서 새로 지은 집무실 겸 서재(집옥재ㆍ集玉齋)를 벽돌로 지은 사연도 알 수 있었다. 아들 순종 황제가 나라를 강제로 빼앗기기 사흘 전 박지원을 “문장과 나라를 운영하는 방법이 일세에 탁월하였다”는 사유로 좌천성에 추증한 사실은 비감하기까지 했다. 순종 황제는 아버지ㆍ어머니가 연암 박지원을 높이 받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망의 순간에 이 사실을 밝혀두고 싶었던 것이다. 박지원의 북학파 실학은 개화 군주 고종의 자력 근대화의 사상적 기초를 이루었던 것이다. 고종의 개혁정치는 이제 우리 민족사의 본류로서 깊이 천착ㆍ음미되어야 할 때가 되었다. 이태진/서울대 교수·국사학
이태진 교수는 1943년 경북 영일 출생이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사회사연구>, <조선유교사회사론>,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이 있다.
최근 ‘뉴라이트 교과서’로 지칭되는 <대안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가 무성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근대사 서술에서 최근 학계에서 재평가되고 있는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에 대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반면, 일본 의존의 갑신 ‘개화파’와 식민지 시기 경제성장론을 줄기로 삼은 것이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식민지 시기를 근대 문명학습 또는 실천기로 평가하면서 경제 발전으로 생활수준이 향상되었다고 강조한 것이 물의를 일으켰다. 이런 역사 서술로 과연 대한민국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을 자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려마저 빚어졌다. 나는 2004년에 이미 이런 식의 역사인식과 반년에 걸친 긴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교수신문>을 통해 벌인 이 논쟁은 한국 논쟁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 아래 <고종황제역사청문회>란 책자로 출판되기까지 했다. 백 번의 대결을 불사했던 나에게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다시 논하라는 주문이 들어온 순간, 뒤늦게 피로감을 느꼈다. 넘어야 할 산이 이렇게 첩첩인가. ‘대안교과서’는 4년 전 논쟁에서 판정승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면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고려해 좀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던가. 달포 전, 어느 일간지에 고종황제가 을사늑약의 실효를 저지하고자 프랑스인 고문을 독일에 보내 우리 공사관들이 현지에서 철수하지 말 것을 훈령하고 또 독일 황제에게 일본의 조약강제의 만행을 알리면서 일본의 보호국이 되기보다 차라리 서구 열강국들의 시한부 공동보호를 받겠다고 제안하는 친서가 공개되었다. 그 내용의 절박성과 절절함이 국민적 감동을 자아냈는데 이번 ‘대안교과서’의 서술은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전혀 감지하지 않은 역사 서술이다. 내가 보기에 ‘대안교과서’가 개화파 주도의 근대화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두 가지로 우리 근대사를 엮은 것은 유감스럽게도 일본의 극우 역사관과 너무 많이 닮았다. 대한제국의 자력 근대화노력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조선총독부 지도 하의 ‘근대문명 학습’을 홍보하려는 목적 때문이라고 오해를 사기 십상이다. “을사늑약부당” 독일에 보낸 친서
고종의 구국의지 여실히 드러내
뉴라이트, 자력 근대화 노력 폄하
시대적 분위기 감지 못한 것 1919년 3월1일에 만세 시위운동이 있은 뒤 9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할 때, 조선공화국이란 새 국호가 준비되었다. 그러나 대의원회의에서 긴급동의가 나왔다. 곧 반 년 전 대한문 앞에서 울려 퍼진 만세의 함성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의 죽음에 대한 애도요 충성의 소리인 만큼 그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대한민국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던 우리 선조들의 역사 인식은 이렇게 대한제국의 역사를 끌어안고 있었다. 고종은 청년 시절 개방ㆍ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ㆍ미국ㆍ영국ㆍ독일 등과 잇따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고자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하였다. 수교 조약을 맺은 뒤에 미국 정부에 교사 파견을 요청하고 미국 회사들과 계약하여 왕궁에 먼저 전기를 시설하고, 통신과 우편제도를 도입하고, 광산 개발 준비도 하였다. 이런 개화 노선에 대해 아버지 대원군이 불필요하게 임오군란을 일으켜 이를 빌미로 청국이 개입하여 속방화정책을 폄으로써 군주의 개화정책은 위기를 맞았다. 그의 근대화 정책은 그 뒤 일본으로부터도 위협을 받아 청일전쟁 직전에 왕궁을 침범당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왕비가 시해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만약 군주와 그의 정부가 어리석고 무능하기만 했다면 일본이 왜 국제적 비난을 사기 마련인 이런 만행을 저질렀겠는가? 고종의 개화정책은 왕비를 잃고 대한제국을 세운 뒤에 탄탄대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청일전쟁으로 청국이 한반도에서 물러나고 일본이 삼국 간섭으로 일시 침략의 방향을 대만으로 돌린 상황에서 대한제국의 근대화 사업은 눈부시다 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반도 북부 지역의 금광ㆍ석탄 개발을 중요 사안으로 한 국토개발 계획이 세워진 상태에서 철도 부설과 광산 개발이 진행되고 서울에서는 워싱턴 디시를 모델로 한 도시 개조사업이 착수되었다. 오늘날 시청 앞 광장과 방사상 도로체계는 이때 처음 틀을 잡은 것이다. 곧 미국의 대통령궁(백악관)처럼 왕궁(현 덕수궁)을 도심에 새로 짓고 대안문(대한문) 앞을 방사상 도로의 중심으로 삼고, 기존의 종로, 남대문로를 확장하여 연결시켜 전차를 달리게 하였다. 고종 청년시절 서구와 수교 맺고
미국과 밀착외교로 문명수입 시도
일 ‘왕비 시해’ 위협 속에서도
개화·개방정책으로 근대화 밑그림 한편, 서울ㆍ개성ㆍ인천 등지의 자산가들 힘으로 1899년 대한천일은행이란 국고 은행을 세우고 1902년에는 지폐 발행을 위해 중앙은행 발족 준비를 마쳤을뿐더러 1899년 한청조약을 체결하여 청국과 대등한 독립국의 위상을 세우고, 바로 이어 헌법 전문(前文)에 해당하는 국제(國制)를 반포하여 황제국을 자처하였다. 이를 두고 군주전제정치로의 회귀란 비판은 한쪽 눈으로만 보는 역사다. 천황권의 신성성까지 표방한 명치 일본제국 헌법은 고대로의 회귀란 말인가. 근대국가 수립에서 군주권의 절대성 표방은 보편적 현상인데 굳이 대한제국만 예외적으로 비판받아야 하는가. 나는 고종이 청년 시절에 어떻게 해서 선진문명 수용의 개방주의 사상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이 의문을 풀 실마리를 최근에서야 잡았다. 지난가을, 박지원의 <열하일기>의 열하(북경 북방 600여㎞ 지점)를 찾으려 이 책을 열심히 읽었다. 이 책에는 벽돌ㆍ수레 등의 사용을 주장하는 이용후생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지만 더 중요한 대목은 열하에 도착하여 건륭제가 티베트 라마불교의 지도자 판첸라마를 평등례로 대우하는 광경을 목도한 부분이다. 청국은 몽고족의 위협을 제어하기 위해 대부분의 몽고족이 믿고 있는 라마불교의 지도자를 제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그런 우대 정책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원은 바깥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데 조선은 대명의리의 북벌론에 빠져 있는 것이 너무도 개탄스러웠다. <열하일기>는 이렇게 세계정세에 대해 눈뜨기를 외친 역사 교훈서로 큰 의미가 있다.
이태진/서울대 교수·국사학
이태진 교수는 1943년 경북 영일 출생이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사회사연구>, <조선유교사회사론>,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왕조의 유산-외규장각도서를 찾아서>, <고종시대의 재조명>, <의술과 인구 그리고 농업기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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