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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근대화 아닌 왕권 집착하다 국권 잃어

등록 2008-04-18 18:39수정 2008-04-18 19:18

고종 어떻게 볼까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② 지나친 미화는 곤란

지난주부터 ‘고종은 개혁군주인가’를 놓고 학자들의 논쟁이 시작됐다. 고종이 개혁군주였는가 하는 문제는 조선의 ‘자주적 발전 가능성’이 있었는지를 가늠하는 준거 가운데 하나다. 첫 번째 필자로 참여한 이태진 서울대 교수는 고종에 대한 재평가 작업의 선두에 선 학자답게 고종의 개혁의지, 개혁실천을 강조했다. 이 글에서 그는 고종이 “청년시절 개방·개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일본·미국·영국·독일 등과 잇달아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서양의 우수한 기계문명을 빨리 받아들이기 위해 미국을 최우선 파트너로 택하여 밀착 외교를 펴려고” 했음을 강조했다. 고종의 근대화 의지는 확고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번째 논자로 나선 하원호 동국대 연구교수는 “그동안 무능력으로 대표되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고종이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해 왔다는 점이 밝혀졌다”고 개혁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에 주목했다. 고종이 진정한 근대화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왕권 강화 차원에서 부분적으로 개혁적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온 세계가 근대사회로의 진입에 진통을 겪고 있던 시대에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구국의 인물’로 재해석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요컨대, 고종은 왕권 강화에 골몰했을 뿐 국권 수호나 진정한 근대화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다음주에는 조선정치사상사를 전공한 강상규(도쿄대 박사)씨가 다른 견해를 제시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그동안 고종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는 아버지인 대원군의 등에 업혀 있거나 마누라인 민비의 치마폭 밑에 있다가 결국은 나라 망해 먹은 왕이라는 부정적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연구가 본격화되면서 고종이 그동안 무능력으로 대표되던 대중적 이미지와는 달리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한 정치력을 발휘해 왔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래서 90년대 이후에는 고종의 평가도 많이 달라졌는데, 그동안의 대중적 이미지나 학계의 고종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력히 비판하고 고종이야말로 한국의 현실에 맞는 자주적 근대화를 실현하고 마지막까지 국가를 지키려던 ‘우리의 황제’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치력이란 게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고종의 행위가 오로지 국가를 위해서라는 것이 미화하는 쪽의 입장이다. 왕과 국가가 하나로 묶여 있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왕권이 곧 국권과 동일시된다. 하지만 어느 학자의 주장대로 고종이 아무리 18세기의 ‘영명한 영정조의 이념을 계승’했다고 하더라도 시대가 다르다. 온 세계가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데 진통을 겪고 있던 시대에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구국의 인물’로 재해석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개항 이후 초기 개화정책을 수행한 쪽은 김옥균 등 개화파라는 것이 교과서적 상식이지만, 고종이나 민비도 개화에는 관심이 많았다. 부국강병하자는 데야 권력의 핵심들이 싫어할 리도 없었고 그래서 민씨 일족도 이에 가세하고 있었다. 근대화하자는 큰 논리에는 고종, 민비, 민씨 척족들도 다들 인정하고 있었으나 정치적 행위는 오히려 대원군 이전 세도정권의 부패상을 그대로 잇고 있었다.

근대화에 정치력 발휘했지만
개혁은 권력 강화의 도구였을 뿐
왕권-국권 혼동하며 부패 일삼아
‘구국의 인물’ 재해석은 시대착오적

권력의 부패는 민중의 저항을 야기했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민비는 죽을 위기를 넘겨 장호원으로 피신하게 되고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대원군 덕분에 권력을 행사하기 어렵게 된 고종이나 민비의 입장에서는 이 현상을 타개할 묘안을 찾아야 했고, 민비는 은밀한 서한을 고종에게 보냈다. 청나라 군대의 파병 요청이 그것이었다. 남의 나라 군대를 빌려 국내의 권력다툼을 해결하고자 했던 장본인이 바로 이 고종과 민비였고, 그 뒤 외세가 툭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우리를 협박한 빌미를 제공한 것도 이들이었다.

청나라 군대 때문에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된 고종과 민씨 척족들이 한동안 친일적이던 외교정책을 친청으로 바꿀 것은 당연했다. 갑신정변 실패 뒤 청국은 원세개를 보내 조선을 속국처럼 다루었다. 아무리 고종이 청나라에 기대 권력을 유지하는 처지지만 청에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나 미국을 끌어들여 청을 견제하려 했으나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고종은 나름대로 자주적 외교정책을 내세웠다는 평가가 가능할 정도로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 자주적 외교정책은 국권의 확보를 위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조선에서 고종 자신보다 더한 권력을 휘두르는 청과 감국으로 파견된 원세개에 대한 반발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왕권에 대한 외세의 침해가 일차적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농민전쟁에 대응하는 고종의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청나라 병사로 막아내자.”

고종이 1893년 동학 농민군이 보은집회를 할 때부터 한 말이다. 외교정책의 반청적 성향과 국내에서의 민중봉기에 청군을 끌어들여 해결하려는 이중성의 배후에는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는 고종의 전근대적 인식이 있었던 것이고 이 이중성도 왕권에 대한 집착이라는 점에서 보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농민전쟁 때 고종이 지키려던 것은 분명히 왕권이지 국권이 아니다. 덕분에 왕자리는 보존했지만 그 통에 국가는 결딴이 나고 식민지로의 길도 가속화되고 말았다.

대원군·민중 견제엔 청 군대 이용
청 견제엔 서구 끌어들이려는 시도
권력 지키려다 외세간섭 빌미 줘
개혁도 못한 채 패망·식민지 가속화

일본인들에게 민비가 죽고 난 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했다가 환궁하고 나라 이름을 바꿔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독립협회도 만들어져서 활동하는데 독립협회 초창기에는 고종도 호의적이었지만 의회개설운동을 벌이자 보부상을 동원해 해산하고 전제황권을 강화했다. 이 독립협회의 평가는 학자간에 다소 차이가 있다. 어느 학자는 의회개설 운동이 “독립협회에 잠복한 친일분자들의 황제권 약화운동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황제권의 강화가 이 시대의 대안이었다는 이야긴데 실제로 황실 중심으로 개혁을 시행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이 그것이다.

제도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인 광무양전사업을 벌이기도 하고 상회사, 은행, 근대적 생산공장의 설립과 광산 개발, 철도 부설 등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하지만 광무개혁에서 가장 돈이 많이 들어간 곳은 군사력 강화다. 국가 재정의 40%가 이 비용이었다. 강병을 하지 못해 농민전쟁 때도 외국군을 끌어들인 나라 사정을 생각하면 고종으로서 가장 공을 들일 것은 당연했다.

군사력 강화의 목적은 당연히 국가 주권의 수호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왕권과 국권을 혼동하던 고종이 군사력 강화로 지키려던 것은 왕권 쪽에 더 가까웠다. 이미 1880년대에 경기와 호서, 황해도 지역 연해를 방어해 수도 방위에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던 기연해방연을 왕실 경호를 주임무로 하도록 바꾸어 농민군마저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군사력을 약화시켰던 고종은 대한제국 시기에도 군사력 증강의 주목표를 왕실을 지키는 데 두었다.

근대국민국가가 수립된 뒤의 군사제도는 국민군제다. 국민적 통합에 기반한 국민군제는 대외적으로도 강력하지만, 대내적으로 강력한 군주제를 바랐던 고종의 군대는 왕에게 충성하는 용병제일 뿐이었다. 러일전쟁이 현실화되는 1903년께 가서야 비로소 고종은 징병제 실시를 위한 조칙을 내렸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 등으로 확산되고 있던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운동을 억누르고 전제군주제를 강화하려 했던 고종으로서는 국민통합에 기반한 국민군제인 징병제를 실행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개혁은 실패하고 러일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말았다.


하원호/동국대 연구교수
하원호/동국대 연구교수
우리는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객관성을 잃은 역사의 미화는 현재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일제의 강압이라는 외적 요인에만 두지 않고 우리 내부의 문제를 냉정하게 성찰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최근 뉴라이트 쪽에서 쓴 ‘대안교과서’의 대한제국 평가는 대한제국의 전체상을 그리기보다 경제 쪽에 치중해 부정적 평가를 한다. 이들의 의도는 분명하다. 대한제국의 경제적 근대화의 한계가 바로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에 대한 긍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과론적 함정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역사의 객관성을 잃은 평가다.

하원호/동국대 연구교수 hwh2000@hitel.net


하원호 교수

1954년 생이며 고려대 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요즘 관심을 두고 연구하는 분야는 ‘동아시아사와 한국근대 사회사상의 변동’입니다. 주요 저작으로 <한국근대경제사>(1997), <근대의 진통>(2006), <한말일제하 나주지역의 사회변동 연구>( 2008)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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