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공간 ‘수유+너머’ 회원들이 재작년 경기 평택 시청 앞에서 대추리 미군기지 건설 계획의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고 대표는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들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로 가는 유효한 방도라고 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 제공
‘코뮨주의’ 대안 맞나
① 독점당한 삶 벗어나야 할 때
‘코뮨주의’는 21세기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매우 익숙한 용어이다. 현실 사회주의 패배 이후에도 마르크시즘을 고수하고 있는 좌파 진영 일군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이 용어 속에 담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라고 옮겨 온 ‘코뮤니즘’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영어 표기를 할때 ‘Commun’(공동체란 뜻)과 ‘ism’ 사이에 하이픈(-)을 끼워 넣기도 한다. 코뮨주의를 통해 새 대안 체제를 구상해온 그룹 가운데 하나인 연구공간 ‘수유+너머’ 쪽이 최근 한 권의 책을 내어 그 개념과 전략을 소상히 밝혔다. 이 논쟁을 통해 코뮨주의가 새로운 대안 체제 담론으로서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지 알아본다.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는 이 글에서 자신들이 내세우는 ‘코뮨주의’를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존재들은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는다. 예컨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국내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그 보기이다. 때문에 과거와 같은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던 운동은 더는 의미가 없다고 본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이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여는 유효한 방도라는 것이다. 이들은 특히 탈국가적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서 다른 코뮨주의자들과 차이를 보인다. 국가의 개입은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 낳으면서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의 발명”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이라는 견해다. 다음 주에는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국가와 자본의 탈근대적 폭력이 그야말로 만연한 시대다. 지난 십여년간 한국 사회의 대중들은 부와 권력의 장에서 계속 배제되고 추방되었다. 국가경쟁력, 기업경쟁력의 이름으로 자기 나라 안에서 자기 정부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 나라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별 의미도 없을 정도로 권력과 자본의 지구적 폭력에 난타당하고, 마치 이국인처럼 나라 안에서 거처를 잃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말 그대로 ‘홈리스’가 우리 사회 대중들의 보편 형상이 되고 있다. 역설적인 것은 국가와 자본에 의한 추방과 배제가 노골화될수록 사람들은 그것들에 더 매달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삶의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삶의 소속과 근거를 얻기 위해 온갖 불이익과 차별을 감수한다. 비정규 노동자들은 반밖에 안 되는 임금에 고용 기간만 일정하게 보장하는 직군·직무군제도 감지덕지 받아들이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농민이나 어민은 적은 보상금이나마 더 받으려고 경쟁한다. 일자리만 늘어난다면 자연이 어찌되든 대운하라도 만들라 하고, 먹고 살게만 해준다면 국가 지도자나 기업가의 부도덕성 따위는 문제도 안 된다. 삶의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와 자본의 온정에 기대를 걸게 하고, 국가와 자본의 힘은 습한 환경의 곰팡이처럼 이런 불안 속에서 급속히 증대된다. 이제야말로 다른 삶의 방향을 발명해야 할 때가 아닐까. 좋은 정부와 좋은 기업에 대한 소속을 그리워할 게 아니라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삶을 시도해야 할 때가 아닐까. 코뮨주의는 이처럼 우리 삶을 보살핀다는 환상 속에서 사실상 우리 삶을 지배하고 한정짓던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이며,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은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다.
코뮨주의를 제창하면서 우리는 국민이나 시민, 노동자 등의 이름으로 진행된 과거 운동의 유산, 곧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던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가령 1987년의 ‘국민운동본부’는 오늘날 더는 작동할 수 없다. 최근 민노당의 자주파 논란에서 학계의 민주주의 논쟁까지 ‘국민’의 표상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우리 안에는 이미 국민이 아닌 자, 시민권이 없는 자, 가령 이주노동자 같은 존재들이 들어 있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지, ‘그들’이 새로운 ‘우리’임을 깨닫지 못한다. 국가와 자본의 탈근대적 폭력이
대중들 삶 지배하고 불안 키워
사회운동도 자격·소속에 기반
이주민·실업자·비정규직 등 외면 노동 운동은 어떤가. 취업과 노조라는 자격과 소속을 기본으로 자기 이익을 확대하려는 운동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현재 민주노총이 자격과 소속이 불투명한 실업자나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에 실질적으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나 자본보다 먼저 대기업 노동조합들, 현장의 운동가들이 자격과 소속을 은연중에 문제삼기 때문이다. “우리도 힘든데,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희생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단결시켰던 동일성의 표상이 이제는 거기에 속하지 못한 자들, 자격 없는 자들을 내치는 장치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변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동원했던 방식이 그렇게 기능하는 것이다. 이는 대표를 늘리고 소속을 늘려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정규직을 늘리고, 민주노총의 발언권을 키우고, 민노당의 국회의원을 늘리고, 시민단체의 참여를 확대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소속이나 자격, 근거의 공유 없이 서로의 자유와 해방, 삶의 행복을 위해 공통 작용을 생산해낼 수 있는 실질적인 운동의 기예이다. 이주노동자와 중증장애인이 만나는 데 인간이라는 공통 근거가 필요하지 않고, 비정규 노동자가 농민회와 접속하는 데 생산자라는 공통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주노동자와 중증장애인의 싸움이 이동권이라는 공통의 권리를 창안해낼 수 있을지, 홈에버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홈에버에 물건을 납품하던 농민과 함께 대형마트를 극복하는 농산물 유통에 성공할 수 있을지이다. 상이한 존재들의 이러한 공통 운동은 서로의 삶에 절실한 상호협력뿐만 아니라 국가나 기업의 정책에 맞설 힘과 방향을 제공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구상을 공상적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공상적인 것은 국가의 핵심을 장악한 후 그것으로 사회 전체를 바꾸겠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구체적 이미지도 없으면서 국가를 장악한 후 그런 삶을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그런 식으로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을 낳을 뿐이다. 대안적 삶을 꿈꾸었던 공산주의가 삶의 다양한 특이성을 상실하고 획일적 국가 독점 체제가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복지국가도 국가권력만 확대
지식·정보 등의 독점 아닌 공유 바탕
각계각층 사람들의 공통 운동으로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한 길 찾아야 이런 면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좌파들의 갈망에는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 복지국가 모델은 국가 권력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보살핌을 확대하는 것이다. 국가는 복지제공을 명목으로 삼아 사람들을 분류 관리하고 서비스를 매개로 지배력을 키운다.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삶의 의존이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본적 삶에 대한 보장이지 국가권력의 확대가 아니다. 우리는 소속이나 자격에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본적 삶의 보장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소통하고 협력하는 대중의 것이어야 한다. 공공성 강화는 이 점에서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코뮨주의자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공공성은 진보진영에서 그동안 강조해온 것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공공성의 강화가 국가성의 강화로 귀결되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는 국가 독점과 사적 독점(계급 독점)이라는 나쁜 선택지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교육을 국가가 독점해야 하느냐 민간이 독점해야 하느냐 하는 나쁜 선택지를 버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국가적이든 사적이든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깨고 자유롭게 소통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비국가적 공공성’인 소통과 협력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식, 정보, 에너지, 생명 자원, 그 무엇이든 함께 소통하고 생산하는 비국가적·비시장적 네트워크를 구축해가야 한다. 사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강할 때일수록 정부 역할이 중요해 보이고 안정된 일자리 창출이 중요해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좋은 정부에 대한 갈망,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갈망은 해법이라기보다는 증상이다. 그것들은 우리 삶이 얼마나 불안한지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어떻게 대안적인 삶을 구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코뮨주의자로서 우리는 국가나 시장이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단지 지금처럼 그것들에 대한 의존을 높여 놓고서는 결코 그것들을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뿐이다. 분명한 것은 대안적 삶을 향한 끊임없는 실험들과 그것의 소통만이 지형을 바꿀 힘과 방향을 알려 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
고병권 대표는 1971년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코뮨주의, 혁명 등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고,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새롭게 사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가, 공저로는 <코뮨주의 선언> 등이 있습니다.
국가와 자본의 탈근대적 폭력이 그야말로 만연한 시대다. 지난 십여년간 한국 사회의 대중들은 부와 권력의 장에서 계속 배제되고 추방되었다. 국가경쟁력, 기업경쟁력의 이름으로 자기 나라 안에서 자기 정부에 의해 추방된 사람들. 나라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이 별 의미도 없을 정도로 권력과 자본의 지구적 폭력에 난타당하고, 마치 이국인처럼 나라 안에서 거처를 잃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 말 그대로 ‘홈리스’가 우리 사회 대중들의 보편 형상이 되고 있다. 역설적인 것은 국가와 자본에 의한 추방과 배제가 노골화될수록 사람들은 그것들에 더 매달리게 된다는 사실이다. 삶의 극심한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삶의 소속과 근거를 얻기 위해 온갖 불이익과 차별을 감수한다. 비정규 노동자들은 반밖에 안 되는 임금에 고용 기간만 일정하게 보장하는 직군·직무군제도 감지덕지 받아들이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는 농민이나 어민은 적은 보상금이나마 더 받으려고 경쟁한다. 일자리만 늘어난다면 자연이 어찌되든 대운하라도 만들라 하고, 먹고 살게만 해준다면 국가 지도자나 기업가의 부도덕성 따위는 문제도 안 된다. 삶의 불안은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와 자본의 온정에 기대를 걸게 하고, 국가와 자본의 힘은 습한 환경의 곰팡이처럼 이런 불안 속에서 급속히 증대된다. 이제야말로 다른 삶의 방향을 발명해야 할 때가 아닐까. 좋은 정부와 좋은 기업에 대한 소속을 그리워할 게 아니라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지는 삶을 시도해야 할 때가 아닐까. 코뮨주의는 이처럼 우리 삶을 보살핀다는 환상 속에서 사실상 우리 삶을 지배하고 한정짓던 국가와 자본에서 벗어나는 삶의 시도이며, 소속과 근거를 공유하지 않은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이다.
코뮨주의를 제창하면서 우리는 국민이나 시민, 노동자 등의 이름으로 진행된 과거 운동의 유산, 곧 자격이나 소속, 근거에 기반했던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가령 1987년의 ‘국민운동본부’는 오늘날 더는 작동할 수 없다. 최근 민노당의 자주파 논란에서 학계의 민주주의 논쟁까지 ‘국민’의 표상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우리 안에는 이미 국민이 아닌 자, 시민권이 없는 자, 가령 이주노동자 같은 존재들이 들어 있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지, ‘그들’이 새로운 ‘우리’임을 깨닫지 못한다. 국가와 자본의 탈근대적 폭력이
대중들 삶 지배하고 불안 키워
사회운동도 자격·소속에 기반
이주민·실업자·비정규직 등 외면 노동 운동은 어떤가. 취업과 노조라는 자격과 소속을 기본으로 자기 이익을 확대하려는 운동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현재 민주노총이 자격과 소속이 불투명한 실업자나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에 실질적으로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가나 자본보다 먼저 대기업 노동조합들, 현장의 운동가들이 자격과 소속을 은연중에 문제삼기 때문이다. “우리도 힘든데, 왜 그들을 도와야 하는가. 우리가 살기 위해서라도 그들이 희생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을 단결시켰던 동일성의 표상이 이제는 거기에 속하지 못한 자들, 자격 없는 자들을 내치는 장치가 된 것이다. 사람들이 변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동원했던 방식이 그렇게 기능하는 것이다. 이는 대표를 늘리고 소속을 늘려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정규직을 늘리고, 민주노총의 발언권을 키우고, 민노당의 국회의원을 늘리고, 시민단체의 참여를 확대해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정말 필요한 것은 소속이나 자격, 근거의 공유 없이 서로의 자유와 해방, 삶의 행복을 위해 공통 작용을 생산해낼 수 있는 실질적인 운동의 기예이다. 이주노동자와 중증장애인이 만나는 데 인간이라는 공통 근거가 필요하지 않고, 비정규 노동자가 농민회와 접속하는 데 생산자라는 공통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주노동자와 중증장애인의 싸움이 이동권이라는 공통의 권리를 창안해낼 수 있을지, 홈에버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이 홈에버에 물건을 납품하던 농민과 함께 대형마트를 극복하는 농산물 유통에 성공할 수 있을지이다. 상이한 존재들의 이러한 공통 운동은 서로의 삶에 절실한 상호협력뿐만 아니라 국가나 기업의 정책에 맞설 힘과 방향을 제공한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구상을 공상적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공상적인 것은 국가의 핵심을 장악한 후 그것으로 사회 전체를 바꾸겠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삶의 구체적 이미지도 없으면서 국가를 장악한 후 그런 삶을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그런 식으로는 새로운 삶이 아니라,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을 낳을 뿐이다. 대안적 삶을 꿈꾸었던 공산주의가 삶의 다양한 특이성을 상실하고 획일적 국가 독점 체제가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복지국가도 국가권력만 확대
지식·정보 등의 독점 아닌 공유 바탕
각계각층 사람들의 공통 운동으로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한 길 찾아야 이런 면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좌파들의 갈망에는 걱정스러운 면이 있다. 복지국가 모델은 국가 권력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보살핌을 확대하는 것이다. 국가는 복지제공을 명목으로 삼아 사람들을 분류 관리하고 서비스를 매개로 지배력을 키운다. 국가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한 삶의 의존이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본적 삶에 대한 보장이지 국가권력의 확대가 아니다. 우리는 소속이나 자격에 상관없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기본적 삶의 보장을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 요구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소통하고 협력하는 대중의 것이어야 한다. 공공성 강화는 이 점에서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러나 코뮨주의자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공공성은 진보진영에서 그동안 강조해온 것과는 차이가 있다. 우리는 공공성의 강화가 국가성의 강화로 귀결되는 것을 경계한다. 우리는 국가 독점과 사적 독점(계급 독점)이라는 나쁜 선택지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령 교육을 국가가 독점해야 하느냐 민간이 독점해야 하느냐 하는 나쁜 선택지를 버려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국가적이든 사적이든 지식과 정보의 독점을 깨고 자유롭게 소통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일종의 ‘비국가적 공공성’인 소통과 협력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식, 정보, 에너지, 생명 자원, 그 무엇이든 함께 소통하고 생산하는 비국가적·비시장적 네트워크를 구축해가야 한다. 사실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강할 때일수록 정부 역할이 중요해 보이고 안정된 일자리 창출이 중요해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좋은 정부에 대한 갈망, 안정된 일자리에 대한 갈망은 해법이라기보다는 증상이다. 그것들은 우리 삶이 얼마나 불안한지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어떻게 대안적인 삶을 구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코뮨주의자로서 우리는 국가나 시장이 중요치 않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고병권 대표
고병권 대표는 1971년생으로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코뮨주의, 혁명 등을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고,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적 현실을 새롭게 사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서로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 마법의 사중주>가, 공저로는 <코뮨주의 선언>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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