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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나쁜 노마드’ 구별해야 ‘진정한 노마드’ 찾아

등록 2008-01-18 19:26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 그는 1980년 가타리와 함께 펴낸 저서 <천의 고원>에서 유목민을 뜻하는 노마드라는 개념을 구체화했다. 국내에 노마디즘을 유행시킨 이진경 교수의 저서 <노마디즘 1·2>는 이 책의 해설서이다. 그린비출판사 제공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1925~1995). 그는 1980년 가타리와 함께 펴낸 저서 <천의 고원>에서 유목민을 뜻하는 노마드라는 개념을 구체화했다. 국내에 노마디즘을 유행시킨 이진경 교수의 저서 <노마디즘 1·2>는 이 책의 해설서이다. 그린비출판사 제공
노마디즘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시대 지식논쟁/

④ 비판들에 대한 재반론

지난 3주 홍윤기 동국대 교수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노마디즘(유목주의)에 대해 엇갈린 견해를 보였다. 이 교수가 노마디즘을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의 표현”이라면서 ‘혁명의 정치학’이란 수사를 통해 정극 옹호했다면 두 사람은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홍 교수는 ‘시장 노마드’나 ‘디지털 노마드’ 등 여러 노마드들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경쟁·대립·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노마드들이 ‘개념’으로 묶이지 못하고 ‘이미지’로만 교착되고 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지난주 김 교수는 현실 속에서 여러 노마드들이 뒤섞일 수밖에 없음을 강조했다. 들뢰즈·가타리도 개념뿐 아니라 실천의 복잡하고 구체적인 맥락과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도 했다. 그는 이런 관점에서 이 교수의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는 아무 관계도 책임도 없는 ‘착한 노마드 이야기’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이 교수는 이 글에서 ‘나쁜 노마드’들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는 “단순화해서 ‘나쁜 노마디즘’과 ‘좋은 노마디즘’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중요한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초월적 외부에서 선과 악이 뒤섞여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에서 올바른 삶을 위한 길찾기에 나선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주제의 마지막 토론자인 이광래 강원대 교수가 다음주 견해를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비판을 서로 자신에 대한 오해라고 반박하며 진행되는 논쟁처럼 소모적인 것은 없지만, 오해나 곡해를 그냥 두고 토론하기는 어렵다. 나 역시 간단하게나마 몇 가지 오해나 곡해에 대해 지적하는 방식으로, 그런 지적에 기생하듯 말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첫째, 나는 어디서도 들뢰즈·가타리 책을 읽지 않았다면서 누구를 반박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반대로 나는 “노마디즘을 모르고도 노마드로 사는 게 가능하다”고 믿는다. 많이 읽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경우도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유목주의는 침략주의다〉처럼 누군가를, 그것도 저리 강하게 비판하려면, 비판하는 대상을, 다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읽거나 알고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 경우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의식이 있다고 해도, 쉽게 무시되는 것을 어찌 피할 수 있을까?

둘째, 나는 “‘매끄러운 공간’이나 ‘외부성’이 그 자체로 초월적인 혁명적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긍정적인 가치를 갖는 전쟁기계도 전쟁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게 되는 사태가 있을 수 있다고 썼다. 마찬가지로, “노마디즘은 현실 속의 나쁜 노마디즘과 아무 관계 없다”면서 “나쁜 자본주의 국가 외부에만 존재하는 착한 노마디즘”에 대해 말할 정도로 순진하지 않다. 다만 홍윤기 교수가 제시한 여러 노마드들 가운데 어떤 걸 ‘진정한 노마드’라고 말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나쁜 노마드나 문화상품화된 ‘노마드’들이 있다는 이유가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답했을 뿐이다. 반복하건대, 김 교수 말처럼 ‘유목주의적 기업’이나 ‘침략적 노마드’들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다. 나치가 생태주의자였다는 게 생태주의를 버릴 이유는 되지 않는 것처럼. “노마디즘에 침략적 성격이 있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나는 이렇게 쓰지 않았지만)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였음을 이해하기가 그리 어려웠을까? 김 교수는 내가 노마디즘은 “더러운 현실과 무관한 이론”이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정말 믿고 있을까? “폐허가 된 마르크스주의, 그 불모의 땅에 달라붙어서, 실패에 달라붙어서 새로운 길을 찾는 게 노마드”라고 썼는데도 불구하고.

현실 속 노마드 무시한 게 아니라
노마디즘을 버릴 이유 아니다 했을 뿐그럴수록 시비 가리고 개념 구분해야

셋째, 나는 전쟁기계 개념을 부차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적절한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있다(나는 경전을 주석하는 훈고학자가 아니기에,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으며 나름의 답을 찾는다).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전쟁’의 개념이 일차적으로 지배적 가치에 대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조건에서 ‘전쟁’이란 말은 국가 간의 적대적 충돌이란 의미가 지배적이기에, 오해 없이 사용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다는 생각에서다. ‘전쟁기계’ 대신에 ‘투쟁기계’라고 쓰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한다. 들뢰즈·가타리가 표현하려는 개념적 내용이 ‘투쟁’이란 말에 더 부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실제로 가타리는 〈새로운 자유의 공간〉에서 그렇게 고쳐 쓴다). 그렇지만 그들이 ‘전쟁기계’란 개념을 오해를 무릅쓰고 사용했던 것은, 전쟁기계가 전쟁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부정적 사태를 지적하기 위해서였다고 덧붙여 놓았다. 따라서 전쟁기계의 무서운 까칠함을 은폐하여 노마디즘을 부드러운 문화상품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넷째, 나는 어디서도 ‘착한 노마드’에 대해 쓴 적이 없다. “노마디즘에는 어떤 오류도 없다”니! 비난과는 반대로, 이주노동자들조차 주어진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안주할 곳을 찾는다면 노마드가 아니라 정착민이라고 썼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도 이주노동자-되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상품화나 유행에 편승하는 유사품과 대비하여 노마디즘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믿으며, 단순화해서 ‘나쁜 노마디즘’과 ‘좋은 노마디즘’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그런 단어를 사용한 것처럼 생각하게 했을지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김 교수는 ‘착한 것’과 ‘폭력적인 것’, ‘선과 악’이 결코 단순하게 분리될 수 없다고 거듭 말한다.

맞다. 데리다 이후, 선과 악이 뒤섞이고 선과 악이 서로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건 일종의 철학적 상투구가 되지 않았던가! 그러니 ‘좋은 노마드’를 ‘나쁜 노마드’ 와 구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철학적 순진성으로 비난받기 딱 좋은 처지를 자초하는 것이다. 확실히 노마디즘이 작동하는 세계를 그 초월적 외부에서 바라보면서, “거기서 선악은 구별 불가능해”라고 해체하는 철학자들이라면, 그것의 복합성이나 결정불가능성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현재적 삶 속에서 그것을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지, 아니 어떠한 삶의 방식을 구성할 것인지, 지금 이 길로 가는 게 옳은 것인지를 고심하고 판단해야 하는 사람에게도 그럴까? 거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 하려는 것이 쉽게 말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가리는 것이고,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포착하는 것이다. 유목을 한다고 하는데, 정말 그게 유목적인 것인지, 아니면 유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닌지, 애써 얻은 하나의 성공에 안주하면서 다시 정착민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구별불가능하고 서로 기대어 있는 ‘좋음/나쁨’을 떠나 초월적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해체해대는 데리다 같은 철학자보다는, 오류를 범할지라도 “자, 다시 한 번!” 하면서 지금 조건에서 어떤 게 좋은 것인지를 그때그때 판단하며 옳다고 믿는 것을 실행하려 애쓰는 나의 친구들을 더 믿는다.

지배적 가치와 싸우는 ‘전쟁기계’
오해 우려했을 뿐 은폐한 적 없어
코뮨-노마디즘 결부해 사유하는 게
전쟁기계 필연성 간과한 건 아니다

다섯째, 개념들을 엄밀하게 구별하고 발전시키는 게 중요한 건 이런 이유에서다. 나쁜 것과 좋은 것이 잘 섞이기 때문에, 잘한다고 믿고 있었는데 어느새 반대가 되는 사태가 빈발하기 때문에, 오류와 위험을 포착하고 구별할 개념들이 필요한 것이다. 가령 내가 “유목민과 이주민은 다르다”고 하며 개념적으로 구별하려 했던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마지막으로 코뮨주의에 대하여. 내가 코뮨주의를 노마디즘과 결부하여 사유하고 있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거기서 전쟁기계적 성격을 간과·은폐한다는 의심은 부당하다. 왜냐하면 나는 코뮨주의가, 혹은 코뮨이 전쟁기계라고, 전쟁기계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개인주의, 전체주의, 가치법칙 등의 지배적인 가치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고서 코뮨이 가능하리라고 믿을 수 있을까? 실제로 우리가 만들어온 코뮨 안에서도 오랫동안 고성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지금도 근본적으로는 마찬가지다. 우리 각자가 자본주의나 근대적 삶의 습속에 너무도 길들어 있기에, 코뮨이 가능하려면 그런 나에 대한 투쟁, 그런 친구들의 습속에 대한 투쟁을 결코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진경 교수
이진경 교수
굳이 새로운 단어를 만들며 코뮨주의를 친숙함과 동질성에 안주하는 공동체주의와 구별하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따라서 코뮨주의는 노마드적 삶의 방식을 포함하며, 또한 그래야 한다. 그러나 코뮨주의가 노마디즘의 선험적 목적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다른 노마드적 삶의 방식이 있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진경/서울산업대 교수


이진경 교수는 1963년생이며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마르크스주의 전반에 대해 다시 사유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와 구별되는 ‘코뮨주의’란 화두를 들고 공부하고 있으며, 생명의 경제·정치학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미-래의 맑스주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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