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 6. 용도폐기 할 때
진보적 민족주의 유효한가
우리시대 지식논쟁 /
6. 용도폐기 할 때
지난 5주 동안 네 명의 논자가 민족주의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을 펼쳤다. ‘민족’ 진영의 안병욱 가톨릭대 교수와 ‘탈민족’ 진영의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임지현 한양대 교수 그리고 중도적 견해를 가진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현 단계 민족 담론의 유효성과 한계를 주제로 비판과 반비판을 전개했다.
이번 논쟁의 큰 축은 ‘저항적 민족주의야말로 초국적 자본의 힘을 견제할 수단’이라는 안 교수의 입론을 따라 형성됐다. 그는 계급연대는 민족공동체와 연결되었을 때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민족주의의 가장 큰 폐단은 계급모순이라는 기본문제를 호도하는 것이라고 맞받았다. 임 교수도 민족주의적 저항방식은 피지배 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해친다고 했다. 김 교수는 ‘민족 현실론’을 폈다. 한국 사회에서 민족은 구체적인 사회적 힘이기에 이를 무시하고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권혁범 대전대 교수는 이 글에서 민족주의의 본질을 배제와 차별로 규정했다. 민족이 최고의 가치가 되면서 생명·평등 등 보편 가치가 그 아래 종속되고 개체적 정체성과 ‘개인해방’은 사소한 것으로 전제된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부국강병주의’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권 교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의 근거는 민족이 아니라 개발독재가 파괴한 작은 공동체에서 찾아야 한다면서 이제는 민족주의를 땅에 묻어야 할 때라고 단언했다. 이번 논쟁의 마지막 회가 될 다음 주에는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견해를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제3세계의 저항적 민족주의와 제1세계의 민족주의를 뭉뚱그려서 한통속으로 간주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자의 정당방위적인 성격과 후자의 공격적·제국주의적 성격을 구별하지 않는 위험을 갖기 때문이다. 사카이 나오키 등 제1세계 지식인들의 ‘탈민족주의론’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주변부의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관계를 은폐하는 기능을 맡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자와 후자의 유사성을 간과하는 진보적 민족주의론에도 큰 문제가 있다. 여전히 ‘우리’와 ‘남’을 배타적으로 설정하는 프레임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 민족은 동질적 집단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상호 모순적인 성별 계급 등 간의 충돌과 이해관계를 무화시킨다. 계급의식은 몇몇 논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민족공동체’에서 더 강력해지는 게 아니라 약화된다. 진보진영에서 자주파와 평등파의 논쟁이 일어나는 이유다. ‘우리’의 강조는 ‘내부’의 문제를 덮어버리고 지배적 소수의 이익을 ‘우리 민족’이라는 언술적 가면으로 포장한다. 개인=사회=민족=국가=기업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것을 ‘삼성 민족주의’라고 부르면 과장일까? 다른 한편으로는 ‘남’ 역시 동질적인 집단으로 타자화된다. ‘미국놈’ ‘미국사람’ ‘미국정부’ ‘미국 시민사회’가 똑같은 이해관계를 지닌 하나의 단위로 간주된다. 거기서 이삼성의 표현대로 ‘한국 내 냉전세력과 미국 내 군사주의 세력 간의 비대칭적 동맹’을 읽어내기란 어렵다. 민족주의는 민족 및 국가의 영원한 유지와 번영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집단주의다. 따라서 생명·평등·인권·자유 등의 보편적 가치는 그것 아래 종속되며 개체적 정체성과 ‘개인해방’은 ‘사소한 것’으로 전제된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나 타민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자동적으로 생산한다. 그것은 ‘일부 사람들의 일그러진 행태’나 ‘일시적 부작용’이 아니다. 배제와 차별은 민족주의의 본질이다. ‘가장 유용한 유대관계는 민족의식’(안병욱)이라는 주장은 다양한 집단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위계질서화하는 기능을 한다. 민족이 최고고 그 다음은 계급이고, 성별이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계급·젠더 문제 이전에 국가 간의 이해 대립이 초래한 모순에 더 좌우되고 있다”(안병욱)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민족보다 젠더가 더 중요한 기준일 수가 있고 장애인에게는 장애여부가 계급이나 민족보다 우선하는 범주가 될 수 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내 후배(장애인)는 결국 캐나다 이주를 택했고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홍석천은 네덜란드로 떠나고 싶어했다. 국적을 넘어서는 월경적 주체를 지향하는 여성주의자에게도 민족은 부차적인 것일 수 있다. 탈민족적 주체들을 민족의 하위 단위로 포섭할 때 그것은 다중적인 주체의 형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만다. 민족 및 계급해방 다음에 여성해방을 순차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해방론’은 이미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와 ‘남’을 배타적으로 구분
우리 안의 다양한 모순 무화시켜
오히려 계급의식 약화 불러오고
‘남’에 대한 억압과 차별 자동생산 고정적 우선순위를 두면 서열화와 억압이 발생한다. 가령 사회운동이 여성운동이나 장애인운동에 ‘앞서’ 국가보안법 철폐에 ‘집중’하자는 것은 현실을 단순하게 인식한 것이다. ‘진정한 진보’라는 말은 이래서 위험하다. 우선 순위는 상황과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민족을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그 기준에 따라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것은 이성애-비장애인-남성 중심적인 진보적 민족주의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려는 시도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민족주의로부터 나온다는 주장과 민족주의에 대한 공격이 ‘미국발 대자본’의 이해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지적(김동춘)은 어떤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전국적으로 일어난 ‘금 모으기 운동’과 ‘선진국 음모론’은 ‘내부’의 단결을 외치며 ‘외부’를 향해 시선을 돌리게 함으로써 되레 재벌에 대해 면죄부를 주었고 한국사회의 내부적 변혁을 오히려 가로 막는 역할을 담당했다. 민족이라는 코드를 통한 한국의 대자본과 한총련의 입장이 이렇게 유사한 때가 있었는가?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닫힌’ 민족주의나 ‘열린’ 민족주의 간에 둘 다 낡은 부국강병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전통적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 진보적 구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발전주의를 뒷받침하며 그것이 유발하는 모순을 정당화한다. 후진국에 대한 착취나 생태계의 파괴를 ‘우리 민족’의 번영과 ‘힘을 키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중앙집중적 산업문명에 의한 자연의 정복과 약탈, 환경 공공재 파괴에 대한 고려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요즘 유행하는 ‘선진국’ 담론, 통일 담론에도 이런 점이 깊숙이 들어가 있다. ‘국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통일을 하려는 이유도 ‘한민족의 경제력 증강’을 위한 것이다. 진보적 민족주의는 국내·국제의 불균등발전과 재분배에 주목하지만 생태적 재앙을 일으키는 ‘부의 확대재생산’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전통질서 깼지만 ‘부국강병’ 내포
후진국 착취·생태계 파괴 정당화
세계화 맞선 국제연대에도 힘못써
친생태적 마을공동체 복원이 대안 자본과 상품이 무차별적으로 국경을 넘어서는 초국적 자본주의 시대에 사회운동-노동·환경·여성·비정규직·이주자 운동이 민족이라는 코드에만 의존해 ‘국제연대’를 할 수 있겠는가? 점점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은 민족주의에 입각한 일국적 관점과 운동으로는 불가능해지고 있다. 개인을 넘어서면서도 민족에 안주하지 않으며 민족국가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초국가적 시민사회 및 시민운동의 영역이 점점 확대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할 수 있는 근거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개발독재가 파괴한 작은 공동체, 곧 친생태적 풀뿌리 ‘마을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세계화에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삶의 구체적인 테두리’(김우창)를 없애나가는 민족주의로 퇴행하는 것을 막으려는 녹색의 정치학이다. 민족주의는 ‘구체적인 힘’이고 민족을 무시한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김동춘)이라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30년대의 파시즘도 현실적 힘이 아니었던가? 민족의식이 부정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면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세력은 그것을 견제해야지 따라가야 할 것인가?
제3세계의 진보적 민족주의가 한때 가졌던 긍정적 역할과 힘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그것이 가졌던 반냉전주의 및 반제국주의적 성향은 정당하다. 하지만 후자가 결국 주변부 부르주아의 자본주의적 헤게모니에 흡수되고 말았던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21세기의 세계자본주의체제에 대한 고민과 대안 모색에서 필요한 것은 탁석산이 인용한 지수걸의 말대로 민족주의에 대해 ‘겸허한 장례식’을 치르는 일이다.
권혁범/대전대 교수
권혁범 교수는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대(엠허스트)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주요 관심분야는 민족주의·환경·페미니즘입니다. 지은 책으로는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2000), <국민으로부터의 탈퇴>(2004),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2006), <우리 안의 파시즘> (2000, 공저) 등이 있습니다.
제3세계의 저항적 민족주의와 제1세계의 민족주의를 뭉뚱그려서 한통속으로 간주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자의 정당방위적인 성격과 후자의 공격적·제국주의적 성격을 구별하지 않는 위험을 갖기 때문이다. 사카이 나오키 등 제1세계 지식인들의 ‘탈민족주의론’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주변부의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관계를 은폐하는 기능을 맡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자와 후자의 유사성을 간과하는 진보적 민족주의론에도 큰 문제가 있다. 여전히 ‘우리’와 ‘남’을 배타적으로 설정하는 프레임을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 민족은 동질적 집단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사회 안에 존재하는 다양하고 상호 모순적인 성별 계급 등 간의 충돌과 이해관계를 무화시킨다. 계급의식은 몇몇 논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민족공동체’에서 더 강력해지는 게 아니라 약화된다. 진보진영에서 자주파와 평등파의 논쟁이 일어나는 이유다. ‘우리’의 강조는 ‘내부’의 문제를 덮어버리고 지배적 소수의 이익을 ‘우리 민족’이라는 언술적 가면으로 포장한다. 개인=사회=민족=국가=기업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것을 ‘삼성 민족주의’라고 부르면 과장일까? 다른 한편으로는 ‘남’ 역시 동질적인 집단으로 타자화된다. ‘미국놈’ ‘미국사람’ ‘미국정부’ ‘미국 시민사회’가 똑같은 이해관계를 지닌 하나의 단위로 간주된다. 거기서 이삼성의 표현대로 ‘한국 내 냉전세력과 미국 내 군사주의 세력 간의 비대칭적 동맹’을 읽어내기란 어렵다. 민족주의는 민족 및 국가의 영원한 유지와 번영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집단주의다. 따라서 생명·평등·인권·자유 등의 보편적 가치는 그것 아래 종속되며 개체적 정체성과 ‘개인해방’은 ‘사소한 것’으로 전제된다. 또한 사회적 소수자나 타민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자동적으로 생산한다. 그것은 ‘일부 사람들의 일그러진 행태’나 ‘일시적 부작용’이 아니다. 배제와 차별은 민족주의의 본질이다. ‘가장 유용한 유대관계는 민족의식’(안병욱)이라는 주장은 다양한 집단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위계질서화하는 기능을 한다. 민족이 최고고 그 다음은 계급이고, 성별이고 하는 식으로 말이다. “계급·젠더 문제 이전에 국가 간의 이해 대립이 초래한 모순에 더 좌우되고 있다”(안병욱)는 주장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민족보다 젠더가 더 중요한 기준일 수가 있고 장애인에게는 장애여부가 계급이나 민족보다 우선하는 범주가 될 수 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내 후배(장애인)는 결국 캐나다 이주를 택했고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홍석천은 네덜란드로 떠나고 싶어했다. 국적을 넘어서는 월경적 주체를 지향하는 여성주의자에게도 민족은 부차적인 것일 수 있다. 탈민족적 주체들을 민족의 하위 단위로 포섭할 때 그것은 다중적인 주체의 형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만다. 민족 및 계급해방 다음에 여성해방을 순차적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해방론’은 이미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와 ‘남’을 배타적으로 구분
우리 안의 다양한 모순 무화시켜
오히려 계급의식 약화 불러오고
‘남’에 대한 억압과 차별 자동생산 고정적 우선순위를 두면 서열화와 억압이 발생한다. 가령 사회운동이 여성운동이나 장애인운동에 ‘앞서’ 국가보안법 철폐에 ‘집중’하자는 것은 현실을 단순하게 인식한 것이다. ‘진정한 진보’라는 말은 이래서 위험하다. 우선 순위는 상황과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민족을 ‘보편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그 기준에 따라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요구하는 것은 이성애-비장애인-남성 중심적인 진보적 민족주의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려는 시도다.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맞설 수 있는 힘이 민족주의로부터 나온다는 주장과 민족주의에 대한 공격이 ‘미국발 대자본’의 이해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지적(김동춘)은 어떤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전국적으로 일어난 ‘금 모으기 운동’과 ‘선진국 음모론’은 ‘내부’의 단결을 외치며 ‘외부’를 향해 시선을 돌리게 함으로써 되레 재벌에 대해 면죄부를 주었고 한국사회의 내부적 변혁을 오히려 가로 막는 역할을 담당했다. 민족이라는 코드를 통한 한국의 대자본과 한총련의 입장이 이렇게 유사한 때가 있었는가?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닫힌’ 민족주의나 ‘열린’ 민족주의 간에 둘 다 낡은 부국강병주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전통적 신분질서를 무너뜨리는 진보적 구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발전주의를 뒷받침하며 그것이 유발하는 모순을 정당화한다. 후진국에 대한 착취나 생태계의 파괴를 ‘우리 민족’의 번영과 ‘힘을 키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중앙집중적 산업문명에 의한 자연의 정복과 약탈, 환경 공공재 파괴에 대한 고려는 뒷전으로 밀려난다. 요즘 유행하는 ‘선진국’ 담론, 통일 담론에도 이런 점이 깊숙이 들어가 있다. ‘국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통일을 하려는 이유도 ‘한민족의 경제력 증강’을 위한 것이다. 진보적 민족주의는 국내·국제의 불균등발전과 재분배에 주목하지만 생태적 재앙을 일으키는 ‘부의 확대재생산’에 대해서는 문제의식을 갖지 않는다. 전통질서 깼지만 ‘부국강병’ 내포
후진국 착취·생태계 파괴 정당화
세계화 맞선 국제연대에도 힘못써
친생태적 마을공동체 복원이 대안 자본과 상품이 무차별적으로 국경을 넘어서는 초국적 자본주의 시대에 사회운동-노동·환경·여성·비정규직·이주자 운동이 민족이라는 코드에만 의존해 ‘국제연대’를 할 수 있겠는가? 점점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은 민족주의에 입각한 일국적 관점과 운동으로는 불가능해지고 있다. 개인을 넘어서면서도 민족에 안주하지 않으며 민족국가적 경계를 가로지르는 초국가적 시민사회 및 시민운동의 영역이 점점 확대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항할 수 있는 근거는 민족주의가 아니라,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개발독재가 파괴한 작은 공동체, 곧 친생태적 풀뿌리 ‘마을 공동체’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세계화에 반대하면서도 동시에 ‘삶의 구체적인 테두리’(김우창)를 없애나가는 민족주의로 퇴행하는 것을 막으려는 녹색의 정치학이다. 민족주의는 ‘구체적인 힘’이고 민족을 무시한 ‘사회변혁을 구상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김동춘)이라는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하지만 30년대의 파시즘도 현실적 힘이 아니었던가? 민족의식이 부정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다면 사회변혁을 추구하는 개인이나 세력은 그것을 견제해야지 따라가야 할 것인가?
권혁범 교수는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대(엠허스트)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주요 관심분야는 민족주의·환경·페미니즘입니다. 지은 책으로는 <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2000), <국민으로부터의 탈퇴>(2004), <여성주의 남자를 살리다>(2006), <우리 안의 파시즘> (2000, 공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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