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글을 써야 하는 인터넷시대 글쓰기책 범람
논술로 점화돼 직장인·대학생·전문가까지 포섭
의사소통 도구로서 ‘글의 힘’ 키울 비법 전수 열풍
요령 아무리 익혀도 ‘다독·다작·다상량’만 못해
논술로 점화돼 직장인·대학생·전문가까지 포섭
의사소통 도구로서 ‘글의 힘’ 키울 비법 전수 열풍
요령 아무리 익혀도 ‘다독·다작·다상량’만 못해
커버스토리 글쓰기 관련 책들이 범람하고 있다. 교보문고와 알라딘 같은 인터넷 서점의 검색창에 ‘글쓰기’를 쳐 넣으면 무려 500건이 넘는 책 제목이 뜬다. 그 중에는 물론 유아용 한글 쓰기 교재 같은 엉뚱한 책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글을 쓰는 법을 알려주는 책들이다. 대상도 다양해서 초등학생에서부터 중고등학생 및 대학생은 물론, 직장인과 주부 등 일반인에게 초점을 맞춘 책들이 골고루 나와 있다. 서점의 매대를 보면 바야흐로 온 국민이 글쓰기 요령을 배우고자 안달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조차 든다. 예전에도 물론 글쓰기 교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불리는 상허 이태준의 <문장독본>은 작가가 직접 뽑은 명문장들을 예시해 가며 좋은 글을 쓰는 법을 알려주는 고전으로 지금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문장대백과사전>이니 <모범 서한집> 같은 실용적 성격의 글쓰기 지침서도 있었다.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소설작법 책은 예나 지금이나 인기다. 그러나 이즈음의 글쓰기 책 범람은 예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대학 입학시험에서 논술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논술용 글쓰기 교재가 글쓰기 책 트렌드를 이끈 것은 사실이다. <허병두의 즐거운 글쓰기 교실 1, 2>, <너무나도 쉬운 논술>, 도올 김용옥의 <논술과 철학 강의>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글쓰기 능력이 단지 입시 관문을 통과하는 데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직장내에서 글쓰기 능력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기안과 보고서, 프리젠테이션은 물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등에서 글쓰기 능력은 핵심적인 중요성을 지니게 되었다. 심지어는 가게 이름을 짓거나 현수막, 전단지 및 쪽광고를 만드는 데에도 글쓰기 능력은 필요하다. 글쓰는 능력이 업무 능력을 가름할 정도가 되었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대입 논술을 겨냥해 만들었던 <글쓰기의 전략> 같은 책은 수험생만이 아니라 일반인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폭넓은 관심을 끌며 출간 1년 만에 10만권 가까이 팔린 것으로 파악된다. 이 책을 낸 들녘출판사의 윤재인 주간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날 시점에 맞추어 출시했고 실제로 수험생들의 관심이 초기 점화에는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단지 수험생용 도서에 그치지 않고 일반인들까지 아우르는 스테디셀러를 목표로 했던 게 주효했다”고 설명했다. 들녘출판사는 <글쓰기의 전략>에 대한 시장 반응에 고무되어 올 가을에도 글쓰기 관련서를 한 권 더 낼 계획이다. 조직 경영에서 스토리텔링(이야기하기)의 중요성에 착안한 <스토리텔링으로 성공하라>나 제품을 상징하는 이야기의 활용 방법을 일러주는 <브랜드스토리 마케팅> 같은 책들은 글쓰기 능력을 이야기하기로 응용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이태준 ‘문장독본’ 글쓰기 고전
도서평론가 이권우씨는 “기업문화가 강요와 명령에 의존하던 과거 권위적 질서에서 벗어나 논리적 설득을 통한 의사소통과 목표 관철이 중요해지면서 비즈니스 글쓰기의 중요성이 커졌다”고 설명했다. <너무나도 쉬운 비즈니스 글쓰기>의 지은이 황성근(가톨릭대 교양교육원 교수)씨도 “사회 전반적으로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글쓰기와 토론 능력이 새삼스럽게 각광 받고 있는 것”이라면서 “의사소통을 위한 수사학의 측면에서 글쓰기에 접근하는 새로운 책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대학내의 글쓰기 교육 강화와 대학생용 글쓰기 책의 양산은 기업 쪽의 이런 분위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병창 동아대 교수(철학)는 지난해 <교수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글쓰기 교재 출간을 위한 학교 회의에 참석했던 경험담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 글에서 이 교수는 ‘대학 졸업생들이 보고서나 기획서는 물론 이력서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는 현실을 보다 못한 기업 쪽에서 대학생들에 대한 글쓰기 기초 교육을 강화해 주도록 대학에 요청해 온 사실’을 자괴감을 섞어 토로한다. 숙명여대가 일찌감치 2002년 1학기부터 ‘글쓰기와 읽기’와 ‘발표와 토론’을 교양필수과목으로 정하고 14명의 전임교수를 임용해 운영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웬만한 대학에는 글쓰기 강좌가 개설되어 있고, 각 대학 출판부 역시 학생들을 위한 글쓰기 교재를 앞다투어 내놓고 있다. 지난해 1학기 서울대 교양과목 강의평가에서 최고점을 받은 정병기 교수(교양과정부)의 <사회과학 글쓰기>를 비롯해 강준만 교수(전북대 신방과)의 <대학생 글쓰기 특강>과 <글쓰기의 즐거움>이 대표적이다. 대학생을 위한 글쓰기 책은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물론 <한국의 이공계는 글쓰기가 두렵다> <과학 글쓰기 핸드북>처럼 이공계를 겨냥한 책들, 나아가 <체육학 글쓰기>나 <예체능계열 직업세계와 맞춤형 글쓰기>처럼 글쓰기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전공쪽을 겨냥한 책들까지 두루 구색을 갖추어 나와 있는 실정이다. 숙명여대에서 글쓰기 교육을 주도하고 있는 의사소통능력센터의 여건종 센터장(영어영문학부 교수)은 “학생들의 인문학 능력을 함양한다는 취지로 개설된 글쓰기 및 토론 강좌의 반응이 매우 좋다”면서 “한국은행과 서울시교육청, 삼성 등 기업과 단체에서 회의문화 및 논술 수업 모형 개발 등과 관련한 의뢰도 활발히 들어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기업 요구 늘어 대학 강좌 개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글쓰기 수요와 기회가 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글쓰기 관련서 붐을 부추기고 있다. 지난해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글쓰기의 힘>이라는 책을 기획 출간한 출판 칼럼니스트 한미화씨의 말이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소수 전문가만이 글을 쓰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 시사 논객이나 인터넷 서점의 독자 리뷰, 심지어는 각종 사이트의 댓글 형식에 이르기까지 보통사람들이 글을 쓸 기회는 얼마든지 열려 있다. 조금 과장하자면 누구나 글을 쓸 수 있고, 써야 하는 시대다. 글을 쉽고 재미있게 쓰고 싶어하는 대중의 욕구에 부응하고자 관련서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일단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일이다.” 일반인들만 글쓰기 수요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 집단에서도 글쓰기 요령에 대한 갈증은 크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일반인들에게 다가가는 대중적 글쓰기 능력의 보유 여부가 중요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전문가들끼리 통하는 용어와 글쓰기 방식만으로 족했는데, 대중 독자를 상대로 한 책을 써서 ‘스타 필자’가 되는 전문가들이 나타나면서 이제는 거의 모든 전문가에게 대중교양용 글쓰기 능력이 요구되는 세태가 된 것이다. <글쓰기의 전략>의 경우 한의사협회를 비롯한 전문가 집단에서 수백 권 단위로 단체 주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기 발견을 위한 자서전 쓰기> <독서치료와 어린이 글쓰기지도> 등은 글쓰기의 치료 효과에 주목한 책들이다.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심리적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데에 착안했다. 마지막으로, 전통적인 글쓰기의 고수들인 문인들이 쓴 책이 있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는 2002년에 나온 이래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소설가 이외수씨와 안정효씨가 각각 <글쓰기의 공중부양>과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라는 개성 넘치는 책을 내놓았다. <글쓰기의 공중부양>은 작가가 글을 배우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매년 여름과 겨울 ‘글쓰기 연수, 문학 연수’를 진행한 결과를 담았다. 단어 채집에서부터 문학적 문장 만들기, 수사법, 문체 만들기를 거쳐 퇴고에 이르기까지 문학적 글쓰기의 실전적 지침을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친절하게 들려준다.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는 글쓰기를 수영에 비유하면서 기초 교육과 반복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한 꼭지에서부터 자신의 글쓰기 인생을 회고한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짧은 단락과 일화를 중심으로 역시 흥미롭게 글쓰기의 이모저모를 알려준다. 글쓰기 책의 이런 범람은 일단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실 글쓰기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반인들은 물론 논문과 저술 등의 형태로 꾸준히 글을 써야 하는 대학생과 교수들에게서도 글쓰기 능력의 태부족은 심각한 형편이었다. 중등과정과 대학에서 글쓰기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려 온 지도 오래되었다. 직장인을 비롯한 일반인들 역시 글쓰기를 통해 사고력을 높이고 지식을 구성하는 능력 역시 증진시킬 수 있다는 점은 글쓰기 관련서의 증가를 긍정적으로 보게 하는 요인이다. 질적 수준 떨어지는 책도 많아 그러나 글쓰기 책들의 양적 팽창이 질적 수준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비판 역시 거세다. 초보적인 맞춤법을 소개하거나 정해진 틀에 맞추어 기계적인 글쓰기를 하도록 유도하는 점, 나아가 책들 사이에 비슷비슷한 내용들이 중복되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미화씨는 “상당수의 책이 고교 과정에서 배웠어야 할 글쓰기의 기초를 설명하고 표피적인 요령을 가르치는 데에 치중하는 점은 아쉽다”면서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나 데릭 젠슨의 <네 멋대로 써라>처럼 글쓰기 자체의 매력을 보여주면서 독자적인 삶의 철학을 제시하거나 교육현장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번역서들에서 배울 점이 많다”고 말했다. 윤재인 들녘 주간은 “글쓰기를 가르치는 선생님들 자신이 글을 재미있게 쓰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며 “실용적 글쓰기 책에서도 독특한 시각과 문체를 지닌 필자들이 등장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글쓰기의 방법>이라는 책을 낸 김인환 고려대 교수(국문학)는 “학교와 직장에서 글쓰기 능력이 강조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향에서는 문제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글쓰기 교육과 관련 책자들이 맞춤법과 글의 짜임새 같은 테크닉을 강조하느라 오히려 창의적 글쓰기를 방해하기도 한다”며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어디까지나 고전적인 1차 문헌을 읽고 자기 식으로 소화해 쓰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독과 다작, 다상량이라는 글쓰기의 고전적인 금과옥조가 여전히 핵심이라는 뜻이겠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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