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성 시안 교외 첸현 량산에 조성된 첸링(건릉). 거대한 규모와 무덤 양식은 물론 그 안에 잠든 인물이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 무측천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고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극해왔으나 여전히 중국 당국과 고고학계는 발굴 신중론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당나라 황릉중 최대규모 도굴 당한 적도 없어
찬성론자 “세계적 지하 박물관…중화문화 고취”
반대론자 “인공보존땐 변색·훼손 그냥 둬야”
‘50년 논쟁’ 다시 불붙어 최선의 보존 방식 고민
찬성론자 “세계적 지하 박물관…중화문화 고취”
반대론자 “인공보존땐 변색·훼손 그냥 둬야”
‘50년 논쟁’ 다시 불붙어 최선의 보존 방식 고민
커버스토리/중국 측천무후 무덤 발굴 논란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인 무측천(측천무후. 625~705)은 그의 남편인 당 고종 이치와 함께 첸링(건릉)에 합장돼 있다. 중국 산서(섬서)성 시안에서 76㎞ 떨어진 첸현 량산에 자리잡고 있는 첸링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두 황제가 함께 잠들어 있는 무덤이자, 당나라 황릉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문헌 자료나 주변 정밀조사 결과 첸링은 지금까지 한번도 도굴당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측천이 첸링에 묻힐 당시는 당나라 최고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지하궁전 내부에는 당대의 수많은 진귀한 문물이 보존돼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 고고학계에서 첸링은 일종의 성지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 옛 무덤의 문이 열릴 경우 “당나라의 진면목”이 1300년의 시공을 가로질러 현대에 되살아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 무덤의 주인이 문무를 겸비한 데다 합리적이고 과감한 개혁을 추진해 당대의 기틀을 잡았던 ‘철의 여제’ 무측천이기 때문에, 고고학계든 일반인이든 이 무덤을 발굴할 경우 그의 주검을 직접 볼 수 있다는 호기심 또한 팽배해 있다. 그럼에도 이 옛 무덤의 문을 열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싼 찬반 논쟁은 50년이나 이어져왔다. 최근 <청두일보>가 “무측천릉 발굴 유망”이란 기사를 내보낸 뒤 중국 누리꾼들 사이에선 이를 둘러싼 찬반 논쟁이 다시 불붙었다. 이번 찬반 논쟁의 불씨는 지난달 2일 산시성 시안에서 열린 ‘무측천 건릉 매장 1300돌 기념 학술 좌담회’에서 지펴졌다. 산시성 고고연구소 명예회장 겸 당제왕릉연구실 주임인 스싱방은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첸링을 지금 발굴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는 “첸링은 무측천·고종의 주검과 더불어 각종 금·은 기물과 도자기·목기·섬유 등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유물들이 잠들어 있는 세계적 지하 박물관”이라며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발굴 이후 유물들을 충분히 잘 보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보존 조처에 관한 대안으로 지하궁전과 환경이 완전히 같은 표본실을 만들어 문물을 충분히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첸링이 기대고 있는 량산이 카스트 지형에 속해 지표수가 쉽게 땅밑으로 스며들어 묘실 환경이 나빠지고 있고, 지진 등 자연재해를 만난다면 더욱 심각한 훼손을 당할 것”이라며 “보존을 위한 발굴”을 주장했다. 1970~1980년대에도 줄곧 첸링 발굴을 주장해온 원로 고고학자인 스싱방은 “발굴하지 않고 두는 게 문물의 보호와 같은 건 아니다”라며 “땅밑에서도 문물은 계속 훼손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987년 파원쓰(법문사) 지하궁 발굴에도 참여했던 그는 “발굴 당시 지하궁 내부의 종이 문서와 서적은 모두 썩었고, 대부분의 비단 또한 이미 거의 썩었다”고 말한다. 그는 또 “첸링을 발굴할 경우 전성기 당나라 때의 화려한 문물을 드러낼 수 있어 중화문화를 크게 떨칠 것이며 중국 국민의 자신감과 창조력을 고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을 간추리자면 △오늘날 과학기술은 발굴 문물을 원래 상태로 충분히 보존할 수 있고 △땅밑에서도 훼손이 진행되므로 빨리 발굴하는 게 보존에 더 나을 수 있으며 △문물 발굴을 통해 중화문화의 찬란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중앙정부와 고고학계의 주류 의견은 여전히 발굴 반대론을 견지하고 있다. 스싱방의 주장을 근거로 현지 매체들이 “무측천릉 발굴 유망”이란 기사를 내보낸 뒤 누리꾼들 사이에서 논의가 들끓자 량구이린 첸링박물관 부관장은 지난달 4일 언론매체와 인터뷰를 통해 “이번에 나온 것은 일부 전문가의 건의일 뿐 현재로선 전혀 발굴계획이 없다”며 “첸링 발굴에 대해서는 중앙정부든 고고학계든 당장은 발굴하지 않는다는 게 주류 의견”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진시황 병마 검게 산화 침식 이날 좌담회에서 발굴 반대론자인 쑤바이 베이징대학 교수(고고학)는 “세계 고고학계의 보편적인 시각은 관련 과학기술이 아직 충분하지 않을 경우 발굴보다 그대로 두는 게 더 낫다는 것”이라며, “지금까지 1000년 이상 유지되어온 땅밑의 좁은 환경이 발굴 이후의 인공보존 환경보다 더 안정적”이라고 주장했다. 옌원밍 전 베이징대학 역사학계 주임이자 중국고고학회 부회장은 더욱 강경한 말투로 반대론을 폈다. “문물 보존을 위한 기술문제가 오늘날 해결됐는가? 진시황 병마용의 색채가 지금 도대체 어떻게 변했나! 파원쓰(법문사)의 지하궁에서 발굴한 비단은 지금 모두 어떻게 변했는지 한번 가서 보라!” 그는 또 “현재 중국은 싼샤댐 건설 난수이베이댜오(남수북조. 남쪽 양쯔강의 물을 북쪽으로 끌어 쓰는 계획) 공정 등 대규모 건설의 시기를 맞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훼손당할 수 있는 문물에 대해 ‘구조를 위한 발굴’을 진행하는 게 급선무”라며 “당나라 시기는 남아 있는 문헌이 충분하기 때문에 반드시 첸링을 발굴해야만 역사 연구가 가능한 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150만 관광객이 주 오염원
당 태종의 후궁으로 입궐한 뒤 태종 사후 한때 비구니가 됐던 무측천은 신임황제 고종의 비로 복궐하면서 병약한 고종 대신 실질적인 통치를 맡았다. 불심이 깊었던 무측천은 뤄양 룽먼(용문)석굴의 불상에 자기 얼굴을 조각하도록 해 오늘날까지 그 모습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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