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노획된 사진 1949년 박헌영의 결혼식에 참석한 김일성(왼쪽)이 환하게 웃으며 축하해 주고 있다.
박헌영 결혼식 하객 김일성 ‘역사의 희비극’
잃어버린 역사의 ‘판도라 상자’…언제쯤 다 열어볼까
영어·중국어·일어 무기로 한국사 비밀 캐는 노학자 오늘도 문서 더미 넘기리
잃어버린 역사의 ‘판도라 상자’…언제쯤 다 열어볼까
영어·중국어·일어 무기로 한국사 비밀 캐는 노학자 오늘도 문서 더미 넘기리
커버스토리/<한국전쟁> 펴내기까지…정병준 교수 기고
노획문서에서 박헌영과 마주치다
해방후 강철같은 혁명가로 비유되던 남로당의 지도자 박헌영. 1946년 중반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평양으로 건너간 중년의 이 사내가 환하게 웃고 있다. 그의 옆에 26살의 새 신부 윤레나가 다소곳이 서 있고, 풍채 좋은 김일성이 파안대소로 축하하는 모습이 보인다. 1949년 9월에 찍은 결혼식사진이다. 불과 몇 년 뒤 세 사람의 운명은 극적으로 갈라졌다. 박헌영은 ‘혁명동지’의 손에 의해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했고, 윤레나와 그의 아이들의 운명 역시 비감해졌다. 음울한 눈빛의 박헌영이 약간은 의외이고 익살스럽기까지 한 모습으로 찍은 결혼축하기념 사진첩은 1950년 평양을 점령한 미 극동군사령부에 노획되었다. 사라져 버린, 이 대통령의 친필서한
1950년 7월12일 대전. 이승만 대통령은 특유의 떨리는 글씨로 편지 한 장을 썼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에게 이양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의 운명이 누란지위에 처한 순간 국가주권의 주요한 구성요소인 군작전지휘권이 그렇게 미군에게 주어졌다. 조약이나 협정이 아니었으므로 한미 양국 국회에 보고·동의·비준되지도 않았다. 편지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만 원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후 지금까지 26년이 흘렀다. 문제의 원본은 주한 미대사관문서철, 즉 서울대사관(Seoul Embassy) 문서철에 들어 있었다. 최소한 1990년대 후반까지 방선주 박사가 이 서한을 확인한 바 있다. 그렇지만 2001년 내가 문서상자를 열었을 때 이 역사적 문건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NARA에서 한국현대사의 비밀을 만나다
나라(NARA)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은 미국 역사와 문화의 기록이 보존된 곳이다. 독립의 아버지들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로부터 케네디를 암살한 오스왈드의 라이플까지 미국 역사의 굴곡이 남긴 기록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이 연구 목적으로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30여 년간 NARA에서 근무한 선임 군사아키비스트 리처드 보일런(Richard Boylan)은 이렇게 귀띔한다. “닥터 정. 처음에는 독일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 뒤를 이어 이탈리아 사람들이 오더니, 1980년대엔 일본인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 뒤를 이어 당신 같은 코리안들이 찾아오고 있지.”
이들 네 나라의 공통점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의해 점령당했던 국가란 사실. 전후 동맹·유대로 평화관계를 회복했고, 경제성장을 이룬 결과 학자들이 역사적 진실을 찾아 미국을 찾게 된 것이다. 한국현대사가 겪어온 비극적 우여곡절 때문에 학자들은 망실된 진실의 조각보를 찾아 해외로 방랑해야 했다. 20세기 한국역사에 영향력을 끼쳤던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의 문서보관소에서 한국학자들은 언어의 장벽, 시간·비용의 제약, 사상·이데올로기적 장벽과 자기검열 등의 어려움을 견디며 고군분투해야 했다. 특히 미국과 러시아는 한반도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했고, 그 증거기록을 문서로 남겨둠으로써 현재의 학문적 담론에도 여전히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문서보관소는 패권의 그림자를 반영하는 기억보관창고이다. 그중에서도 NARA는 한국현대사와 관련된 핵심비밀을 담은 판도라의 상자이다. 나는 이곳에서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의 요원이자 백의사의 암살단원이라는 문서를 발굴했고, 독도가 한국령으로 표시된 영국 외무부의 대일강화조약 초안의 공식 지도를 찾았다. 자료들은 그냥 그곳에 있었다. 특별한 제약이 있거나 은닉된 것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문서상자에서 세월의 무게를 견딘 자료들은 인내심 있고 안목있는 학자들이 “그 이름을 불러” 주어서야 역사의 비밀을 증거했고, 자신의 가치를 발현했다. 물론 비판적 견해도 있다. 주한미군 정보참모부 군사실에서 근무했던 리처드 로빈슨(Richard Robinson)은 미군정기에 생산된 미군정보 자료의 70% 이상은 조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했고, NARA의 아키비스트 잭 샌더즈(Jack Saunders)는 공개된 미 국무부 문서들의 대부분이 사무관 간의 대화를 기록한 잡동사니이며, 또한 비밀해제과정에서 주요 정보를 삭제한, 위생처리된 역사(sanitized history)라고 평가했다.
브루스 커밍스, 방선주, 한국전쟁
한국학자들이 국내에서 한국전쟁을 공부하기란 고투(苦鬪)의 연속이었다. 이미 1965년 현재 서구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저술은 신문기사 등을 포함하여 1만 편이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전쟁의 상흔이 분명하던 1950-60년대 한국학자들은 한국전쟁에 접근할 수 없었다.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고, 사상·이데올로기적 제약으로 군기관과 인사들만이 전쟁사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 미국문서들이 비밀해제됨으로써 1980년대 중반 국제적으로 한국전쟁 연구의 첫 번째 붐이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한국학자들의 몫은 아니었다. 미국 문서보관소에서 한국현대사의 비밀자료들을 검토한 미국 소장 학자들이 1980년대를 장식했다. 브루스 커밍스, 제임스 매트레이, 존 메릴 등이다. 특히 브루스 커밍스는 “1971년부터 1988년까지 거의 20년간” 북한노획문서를 포함해서 “접근할 수 있는 모든 문서를 가지고 한국현대사의 핵심사건, 한국전쟁을 연구”했다. 1981년 커밍스의 Ⅰ부가 출간되었을 때, 이는 걸음마 단계에 놓였던 한국현대사 연구가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자 충격이었다. 한국인들도 알지 못했던 한국현대사의 내밀한 비밀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그의 책은 방대한 자료의 구사, 탄탄한 이론적 토대, 탁월한 문장, 신선한 평가 등으로 명성을 얻었다. 반면 용기있는 한국의 도전자들은 내심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활용한 자료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때 한국학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것은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였다. 그는 1980년대 이후 국내 한국현대사 연구가 획기적으로 전진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주한 미24군단 군사실 문서철과 북한노획문서철을 본격적으로 소개함으로써 국내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자료의 세계와 연구의 신천지를 보여주었다. 바로 커밍스가 활용했던 핵심자료들이었다. 또한 이 자료들이 그의 손을 거쳐 국내에 입수되었고, 다양한 경로로 출간되었다. 한국학계와 지성계에 큰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그는 역사자료의 빈 공간을 메워줄 수 있는 가능성을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내줌으로써 1980년대 이후 한국 지성계가 외국 이론번역과 반복적 연구사정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 문화운동의 선구자였다. 많은 학자들이 매혹되었고, 열광했으며 자료의 흐름에 따라 현대사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방선주 박사는 NARA의 터줏대감이자 아키비스트(archivist)들이 한국관련 자료를 검색하다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면 찾게 되는 최후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깡마른 체형에 돗수 높은 안경을 쓴 검소한 차림의 이 노인에게선 실천궁행하는 수도승의 기품과 자세가 엿보인다. 산동선교사였던 부친을 따라 중국에서 성장한 덕에 유창한 중국어와 고증학을, 미국·캐나다 유학과정에서 영어와 중국고대사를, 생계수단으로 택시운전사·일본극장 상영기사로 일하며 일본사와 일본어를 배웠다. 동아시아 3국에 대한 깊은 학문적·경험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그의 역사해석과 자료발굴은 독보적이며 탁월하다. 70중반의 이 노학자는 여전히 현역이다. 오늘도 NARA에서 한국현대사의 비밀을 밝혀줄 자료들을 묵묵히 넘기고 있을 것이다. 그가 NARA에 보이지 않는다면, 국회도서관이나 대통령도서관으로 달려가고 있을 터이고, 아니면 캐나다나 인도·호주·일본의 문서보관소를 방문중일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전쟁사에 대해서 모두가 인정하는 진정한 대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입장과 견해를 지닌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역사는 공정하고 객관적 자료와 서술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지름길이 찾고 싶다면 방선주박사가 걸어온 근면성실·노력·인내에 의지할 일이다.
한국전쟁은 한국 현대사연구에서 여전히 넘어야 할 큰 산맥이다. 매년 6월이면 한국전쟁과 관련한 행사와 함께 연구성과들이 발표되지만 올해 특히 관심을 끈 것은 <한국전쟁>(돌베개 펴냄)의 출간이었다. 8백여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을 쓴 정병준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교수는 미국, 옛 소련, 중국, 남북한 등 한국전쟁 참전 당사국 문서들을 샅샅이 뒤져 기존의 두 갈래 한국전쟁 해석방식, 즉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동시에 넘어서려는 시도를 했고 그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정 교수가 그 작업을 어떻게 진행했으며 무엇을 겨냥했는지 그의 글을 통해 그 편린이나마 더듬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해방후 강철같은 혁명가로 비유되던 남로당의 지도자 박헌영. 1946년 중반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평양으로 건너간 중년의 이 사내가 환하게 웃고 있다. 그의 옆에 26살의 새 신부 윤레나가 다소곳이 서 있고, 풍채 좋은 김일성이 파안대소로 축하하는 모습이 보인다. 1949년 9월에 찍은 결혼식사진이다. 불과 몇 년 뒤 세 사람의 운명은 극적으로 갈라졌다. 박헌영은 ‘혁명동지’의 손에 의해 ‘미제의 고용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했고, 윤레나와 그의 아이들의 운명 역시 비감해졌다. 음울한 눈빛의 박헌영이 약간은 의외이고 익살스럽기까지 한 모습으로 찍은 결혼축하기념 사진첩은 1950년 평양을 점령한 미 극동군사령부에 노획되었다. 사라져 버린, 이 대통령의 친필서한
1950년 7월12일 대전. 이승만 대통령은 특유의 떨리는 글씨로 편지 한 장을 썼다.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에게 이양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의 운명이 누란지위에 처한 순간 국가주권의 주요한 구성요소인 군작전지휘권이 그렇게 미군에게 주어졌다. 조약이나 협정이 아니었으므로 한미 양국 국회에 보고·동의·비준되지도 않았다. 편지 내용은 잘 알려져 있지만 원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후 지금까지 26년이 흘렀다. 문제의 원본은 주한 미대사관문서철, 즉 서울대사관(Seoul Embassy) 문서철에 들어 있었다. 최소한 1990년대 후반까지 방선주 박사가 이 서한을 확인한 바 있다. 그렇지만 2001년 내가 문서상자를 열었을 때 이 역사적 문건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② 미 문서기록관리청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전경.
나라(NARA)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은 미국 역사와 문화의 기록이 보존된 곳이다. 독립의 아버지들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로부터 케네디를 암살한 오스왈드의 라이플까지 미국 역사의 굴곡이 남긴 기록들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이 연구 목적으로 방문하는 곳이기도 하다. 30여 년간 NARA에서 근무한 선임 군사아키비스트 리처드 보일런(Richard Boylan)은 이렇게 귀띔한다. “닥터 정. 처음에는 독일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 뒤를 이어 이탈리아 사람들이 오더니, 1980년대엔 일본인들이 많이 찾아왔다. 그 뒤를 이어 당신 같은 코리안들이 찾아오고 있지.”
이들 네 나라의 공통점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의해 점령당했던 국가란 사실. 전후 동맹·유대로 평화관계를 회복했고, 경제성장을 이룬 결과 학자들이 역사적 진실을 찾아 미국을 찾게 된 것이다. 한국현대사가 겪어온 비극적 우여곡절 때문에 학자들은 망실된 진실의 조각보를 찾아 해외로 방랑해야 했다. 20세기 한국역사에 영향력을 끼쳤던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 등의 문서보관소에서 한국학자들은 언어의 장벽, 시간·비용의 제약, 사상·이데올로기적 장벽과 자기검열 등의 어려움을 견디며 고군분투해야 했다. 특히 미국과 러시아는 한반도의 운명에 깊숙이 개입했고, 그 증거기록을 문서로 남겨둠으로써 현재의 학문적 담론에도 여전히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문서보관소는 패권의 그림자를 반영하는 기억보관창고이다. 그중에서도 NARA는 한국현대사와 관련된 핵심비밀을 담은 판도라의 상자이다. 나는 이곳에서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가 미군 방첩대(CIC)의 요원이자 백의사의 암살단원이라는 문서를 발굴했고, 독도가 한국령으로 표시된 영국 외무부의 대일강화조약 초안의 공식 지도를 찾았다. 자료들은 그냥 그곳에 있었다. 특별한 제약이 있거나 은닉된 것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문서상자에서 세월의 무게를 견딘 자료들은 인내심 있고 안목있는 학자들이 “그 이름을 불러” 주어서야 역사의 비밀을 증거했고, 자신의 가치를 발현했다. 물론 비판적 견해도 있다. 주한미군 정보참모부 군사실에서 근무했던 리처드 로빈슨(Richard Robinson)은 미군정기에 생산된 미군정보 자료의 70% 이상은 조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했고, NARA의 아키비스트 잭 샌더즈(Jack Saunders)는 공개된 미 국무부 문서들의 대부분이 사무관 간의 대화를 기록한 잡동사니이며, 또한 비밀해제과정에서 주요 정보를 삭제한, 위생처리된 역사(sanitized history)라고 평가했다.
③ 방선주 박사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의 터줏대감인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
한국학자들이 국내에서 한국전쟁을 공부하기란 고투(苦鬪)의 연속이었다. 이미 1965년 현재 서구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저술은 신문기사 등을 포함하여 1만 편이 넘는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전쟁의 상흔이 분명하던 1950-60년대 한국학자들은 한국전쟁에 접근할 수 없었다. 전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고, 사상·이데올로기적 제약으로 군기관과 인사들만이 전쟁사에 접근할 수 있었다. 1970년대 후반 미국문서들이 비밀해제됨으로써 1980년대 중반 국제적으로 한국전쟁 연구의 첫 번째 붐이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한국학자들의 몫은 아니었다. 미국 문서보관소에서 한국현대사의 비밀자료들을 검토한 미국 소장 학자들이 1980년대를 장식했다. 브루스 커밍스, 제임스 매트레이, 존 메릴 등이다. 특히 브루스 커밍스는 “1971년부터 1988년까지 거의 20년간” 북한노획문서를 포함해서 “접근할 수 있는 모든 문서를 가지고 한국현대사의 핵심사건, 한국전쟁을 연구”했다. 1981년 커밍스의 Ⅰ부가 출간되었을 때, 이는 걸음마 단계에 놓였던 한국현대사 연구가 도달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자 충격이었다. 한국인들도 알지 못했던 한국현대사의 내밀한 비밀들이 끝없이 펼쳐지는 그의 책은 방대한 자료의 구사, 탄탄한 이론적 토대, 탁월한 문장, 신선한 평가 등으로 명성을 얻었다. 반면 용기있는 한국의 도전자들은 내심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활용한 자료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때 한국학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것은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였다. 그는 1980년대 이후 국내 한국현대사 연구가 획기적으로 전진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주한 미24군단 군사실 문서철과 북한노획문서철을 본격적으로 소개함으로써 국내 연구자들에게 새로운 자료의 세계와 연구의 신천지를 보여주었다. 바로 커밍스가 활용했던 핵심자료들이었다. 또한 이 자료들이 그의 손을 거쳐 국내에 입수되었고, 다양한 경로로 출간되었다. 한국학계와 지성계에 큰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그는 역사자료의 빈 공간을 메워줄 수 있는 가능성을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내줌으로써 1980년대 이후 한국 지성계가 외국 이론번역과 반복적 연구사정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준 문화운동의 선구자였다. 많은 학자들이 매혹되었고, 열광했으며 자료의 흐름에 따라 현대사 연구가 활성화되었다. 방선주 박사는 NARA의 터줏대감이자 아키비스트(archivist)들이 한국관련 자료를 검색하다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면 찾게 되는 최후의 전문가이기도 하다. 깡마른 체형에 돗수 높은 안경을 쓴 검소한 차림의 이 노인에게선 실천궁행하는 수도승의 기품과 자세가 엿보인다. 산동선교사였던 부친을 따라 중국에서 성장한 덕에 유창한 중국어와 고증학을, 미국·캐나다 유학과정에서 영어와 중국고대사를, 생계수단으로 택시운전사·일본극장 상영기사로 일하며 일본사와 일본어를 배웠다. 동아시아 3국에 대한 깊은 학문적·경험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그의 역사해석과 자료발굴은 독보적이며 탁월하다. 70중반의 이 노학자는 여전히 현역이다. 오늘도 NARA에서 한국현대사의 비밀을 밝혀줄 자료들을 묵묵히 넘기고 있을 것이다. 그가 NARA에 보이지 않는다면, 국회도서관이나 대통령도서관으로 달려가고 있을 터이고, 아니면 캐나다나 인도·호주·일본의 문서보관소를 방문중일 것이다. 아직까지 한국전쟁사에 대해서 모두가 인정하는 진정한 대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양한 입장과 견해를 지닌 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역사는 공정하고 객관적 자료와 서술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지름길이 찾고 싶다면 방선주박사가 걸어온 근면성실·노력·인내에 의지할 일이다.
정병준/목포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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