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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손오공아 ‘드래곤 볼’ 그만 찾아라

등록 2006-07-27 22:16수정 2006-07-28 15:44

노력하고 협동하고 승리하리라
하나의 가치에 목숨 거는 ‘잇쇼겐메이’
일본 만화는 주류 이데올로기 대변하는 수호자
“조선 침략의 첨병도 만화” 파헤친 책 나와
커버스토리/국가주의자 키우는 일본만화

일본이 진정한 ‘만화왕국’임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잡지 주간 <소년점프>다. 일본의 대표적인 출판사 슈에이샤가 1969년 창간한 이 잡지는 일본 만화의 주류 가운데 주류다. 공전의 히트작 <드래곤 볼>부터 지금 우리 청소년들에게도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원피스>나 <나루토>까지, 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 인기만화들이 이 잡지에 연재되어 왔다.

이 잡지의 발행부수는 한때 600만부까지 올라갔다. 세계 잡지사상 최고 기록이었다. 다른 비슷한 만화잡지들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찍은 부수다. 인터넷과 게임이란 강적과 맞서는 지금도 300만부에 육박한다. ‘만화왕국’이므로 가능한 수치다.

어떻게 일본에서는 청소년용 만화잡지가 수백만부씩 팔려나갈 수 있을까? 왜 일본 사람들은 <소년점프>로 대표되는 청소년 만화에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만화가 공부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만화가 핍박받는 한국과 달리 일본은 청소년은 물론 어른까지 만화에 우호적이다. 그 이유는 도대체 뭘까.

<소년 점프>는 그 답을 보여준다. <소년점프>가 70년대 욱일승천하며 일본 주류만화를 대표하는 매체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잡지의 편집 방향 덕분이었다. <소년점프> 연재 만화들은 한결같이 ‘노력’ ‘협동’ ‘승리’ 등 3가지를 주제로 다룬다. 만화의 내용이나 소재가 무엇이든 이 3대 주제를 충실히 따른다. 주인공은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자기가 하려는 것에 끝없이 도전한다. 그리고 그런 도전정신으로 친구들을 감동시킨다. 적도 감동해 동료가 된다. 그리고 팀을 이뤄 함께 도전하고, 마침내 승리해 꿈을 이룬다. 그 꿈이 야구든, 축구든, 무술이든, 아니면 심지어 라면 요리든 마찬가지다. <드래곤 볼>의 주인공 손오공은 여의주 7개를 모으기 위해 결코 대결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다. 손오공과 싸운 라이벌들도 그 모습에 감동해 팀을 이루고, 힘을 합쳐 외계인을 물리치는데 목숨을 건다. 그리고 언제나 승리하고 마는 해피엔딩. 일본의 ‘닌자’를 팬터지 활극으로 꾸민 <나루토>도 그 구조와 이야기 공식은 마찬가지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렇게 노력하고, 협동하고, 승리한다는 것은 일본 사회의 주류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부응하는 내용이다. 이는 ‘자기가 맡은 한 가지에 목숨을 거는’ 일본인들의 전통 관념 ‘잇쇼겐메이’(一生懸命) 사상이 그대로 만화가 된 것이다. 자기 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되는 것, 그 과정에 목숨을 잃어도 도전하는 것. 그것을 보여주고 가르치는 만화는 당연히 일본 사회가 국민에게 주입하는 가치관을 대변한다.


만화잡지 ‘소년점프’ 600만부

한국을 혐오하는 내용으로 화제가 된 만화 <망가 겐칸류>에 등장하는 한국인의 모습. 아시아에서 스스로를 떼어내 서구 열강과 동일시하는 일본의 욕망은 만화에도 살아 있다. 오늘날 일본 만화에서도 일본인은 서양인과 비슷한 모습으로, 한국인들은 작은 눈과 튀어나온 광대뼈를 강조해 부정적 모습으로 묘사했다.
한국을 혐오하는 내용으로 화제가 된 만화 <망가 겐칸류>에 등장하는 한국인의 모습. 아시아에서 스스로를 떼어내 서구 열강과 동일시하는 일본의 욕망은 만화에도 살아 있다. 오늘날 일본 만화에서도 일본인은 서양인과 비슷한 모습으로, 한국인들은 작은 눈과 튀어나온 광대뼈를 강조해 부정적 모습으로 묘사했다.
사회의 지배규칙 그 자체인 만화가 일본 만화다. 그리고 그걸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일본만화 특유의 ‘열혈’ 코드다. 하나의 가치에 목숨을 걸고, 그 가치를 위해 도전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는 <소년 점프>식의 ‘열혈코드’는 일본만화에는 있지만 한국만화에는 없는 특징이다. 그리고 일본만화가 주류 지배 이데올로기의 수호자이자 전파자임을 보여준다. 온갖 다양한 만화가 자유롭게 나오는 것이 일본 만화문화의 힘이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소년점프>로 상징되는 주류 만화들이 이런 가치관을 지키면서 대중을 훈육한다.

이런 일본만화의 특성은 만화가 일본 문화계에서 주류가 되기 위해 스스로 찾아낸 생존방식인 동시에 국가주의와 사회통합적 가치관을 극도로 강조하는 일본 사회가 만화에 요구한 덕목이다. 문화 특유의 반항기와 실험정신이 간혹 만화들을 이런 공식에서 풀어내곤 했지만, 언제나 일본 만화는 다시 주류 질서로 복귀해왔다. 정치 운동과 젊은이들의 실험정신이 절정을 이뤘던 1960년대, 만화는 새로운 실험의 수단으로 활용됐다. 젊은이들은 만화에서 도피와 환상을 찾았고, 잠시 일본에서 만화가 일탈하는 시기를 맞았다. 전투적, 반항적 만화들이 만화산업의 이미지를 해칠 수 있다고 우려한 대형 출판사들은 다시 만화의 이미지를 정립하며 ‘반정’을 시도했다. 만화가 일본의 오랜 문화전통을 이어받았으며, 어린 청소년들에게 훌륭한 사회적 덕목을 심어주는 매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만화는 다시 철저하게 일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청소년에게 심어주는 통로로 되돌아갔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만화가 ‘일본적 가치’의 대변자가 되어 대중을 국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일본만화의 특성은 결코 최근의 일이 아니라 일본 만화가 시작할 때부터 ‘만들어진 전통’이다. 일본이 근대 국가가 되는 과정에서 일본인을 하나로 묶고 황국신민으로서 국가의 이익을 향해 움직이게 만든 주역이 바로 만화였다.

한상일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일본연구자인 한정선씨 부녀가 함께 쓴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일조각 펴냄·1만8000원)는 19세기 일본이 자국을 근대화하고 아시아를 침략하는 과정에서 만화가 첨병에 섰던 것을 파헤치는 책이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비롯해 당시 일본에게 최대의 국익 현안이었던 조선 침략 문제를 다룬 시사만화들을 분석한 이 책에서 지은이들은 당시 일본 지배층들이 ‘탈아입구’를 부르짖으며 제국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의 동의와 희생이 꼭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선택한 수단이 바로 만화였다고 강조한다.

초기 시사만화 식민논리 전파

1910년 9월1일치 만화잡지 <도쿄퍽>에 실린 만화 ‘합병의 돌문을 열다’(왼쪽).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가 돌문을 열자 가려져 있던 일본의 신 아마테라스가 조선인들에 빛을 비추고 있다. 오른쪽은 역시 <도쿄퍽> 같은해 9월10일치에 실린 ‘결혼 당시’. 일본인 남편이 조선인 새색시의 손톱을 깎아주는 모습을 그렸다. 긴 손톱으로 자신을 할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진짜 의미다.
1910년 9월1일치 만화잡지 <도쿄퍽>에 실린 만화 ‘합병의 돌문을 열다’(왼쪽).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가 돌문을 열자 가려져 있던 일본의 신 아마테라스가 조선인들에 빛을 비추고 있다. 오른쪽은 역시 <도쿄퍽> 같은해 9월10일치에 실린 ‘결혼 당시’. 일본인 남편이 조선인 새색시의 손톱을 깎아주는 모습을 그렸다. 긴 손톱으로 자신을 할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진짜 의미다.
근대 일본을 만들어낸 주역 중의 주역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창간한 신문 <지지신보>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일본 저널리즘 발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지지신보>는 1902년 1월부터 신문 한 면을 만화란으로 정해 만화로 여론을 이끌었다. 이 잡지에서 만화를 담당했던 기자이자 일본 직업만화가의 시조로 꼽히는 기타자와 라쿠텐은 이후 만화전문잡지 <도쿄퍽>을 창간했다. 이 잡지에 실린 그의 작품은 조선 초대 총독 데라우치가 동굴 문을 열어젖히자 일본의 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뿜는 광채가 조선인들을 비추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조선병탄이 조선인들 모두에게 광명의 혜택을 내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일본의 초기 시사만화들은 서양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침략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조선과 청나라를 야만적으로 그리는 대신 일본인들은 문명국가로 그려 일본의 식민논리를 부추겼다. “일본의 시사만화는 일본이 제국으로 성장하는 것을 ‘힘들지만 희망찬 과업’으로 형상화하면서 독자에게 제국으로 가는 길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 ‘그림 초대장’이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그 힘을 이끌어낸 주역 가운데 일본 만화가 있었던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는 가고, 21세기 일본 만화는 분명 초기 만화와 다르다. 그럼에도 일본 만화가 여전히 주류 지배 데올로기에 충실하게 복무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일본의 침략을 겪은 주변 나라들의 시각에서는 일본 만화를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만화로 제국을 그리다>의 두 지은이도 아직 일본 만화에 대한 우려를 벗어던져서는 안된다고 덧붙인다.

90년대 이후 일본 사회는 자학사관을 극복하자는 수정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국가상을 세우고 새 국가 진로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일본 침략을 겪은 주변 아시아 국가들로서는 예의 주시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런 흐름을 주도하는 수정주의자들이 과거 일본의 팽창주의자들이 그랬듯 만화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을 혐오하고 비하하는 내용으로 일본 내에서 크게 화제를 모으며 수십만부 이상 팔린 책 <망가 겐칸류>(만화 혐한류)가 바로 ‘만화’였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한국인의 모습은 찢어진 작은 눈, 튀어나온 광대뼈가 특징으로 한국인의 부정적인 인상을 강조하고 있다.

침략의 역사도 만화로 지울까

일본은 왜 만화왕국이 된 것일까? 실은 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만화가 근대 일본을 만든 것이다. 또한 일본이 스스로 만화를 골랐던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을 만든 것이 초기 시사만화였고, 현대 최강의 제조업국가 일본을 만든 것이 주류 코믹스만화였다. 만화를 동반자로 고른 일본은 만화를 일본 최강의 문화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강력하고 물리적인 힘보다도 오히려 더 효과적으로 좋은 이미지를 심어줘 우위에 서는 무기인 ‘소프트파워’로 만화처럼 강력한 일본의 자산은 없다. 불행한 역사를 만드는데 힘을 보탰던 일본 만화, 언제나 일본 주류를 대변하는데 충직했던 일본 만화가 일본이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지워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은 아직은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일본 만화의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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